2023-09-07

ㄱ부터 Z까지 광활한 문자의 세상으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②

: file no.2 : 종이를 닮은 건축물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위에서 내려다본 전경. 출처: 디자인예감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2017년 국제현상설계공모를 통해 건물 설계안을 모집했다. 최종 출품작은 총 126점, 126:1의 경쟁률을 뚫고 당선된 안은 삼우건축의 ‘페이지스(Pages)’였다. 여기 참여한 건축가들은 문자가 쓰이는 바탕, 종이를 떠올렸고 이는 곧 설계의 콘셉트가 되었다. 실제로 페이지스는 두루마리를 닮은 형태로 완성됐다.

건축가들은 건물을 공원 위로 높이 쌓아 올리기보다, 대지에 자라는 나무, 흐르는 물과 예사롭게 뒤섞이도록 건물을 잔디로 덮는 편을 택했다. 그 결과 이미 존재하는 환경에 녹아드는 한편, 문자의 세계로 사람들을 자연스레 이끄는 건축물이 탄생했다. 설계에 참여한 건축가 중 한 사람인 김진화 마스터에게 페이지스에 관한 더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interview with 김진화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마스터·건축사

국립세계문자박물관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축사 중 한 명. 삼우건축에서 일한 지 13년 차가 되었다. 그는 인터뷰를 하는 내내 이 프로젝트가 동료들과 함께한 작업임을 강조했다. 건축설계에 임할 때만큼은 여전히 설렌다. 시간이 흘러도 건축을 대하는 순수성을 잃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품고 있다.

김진화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마스터·건축사

립세계문자박물관(이하 문자박물관)은 2017년 국제 건축설계 공모를 진행한 프로젝트입니다. 이 공모가 발표되었을 때, 삼우건축에서는 사내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직원 중 참여자를 모집했다고요. 이 프로젝트의 어떤 면에 끌려 공모에 참여했나요?

보통 우리 회사와 같은 대형 건축설계사무소에서는,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할 팀을 우선 정한 다음 설계에 돌입합니다. 그런데 문자박물관 프로젝트는 사내 공모를 거쳐 제출안을 최종 선정하는 방식이었어요. ‘누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냐보다는 ‘어떤 설계안’을 내놓느냐가 더 중요했던 거죠. 평소 마음에 품고 있던 건축설계 콘셉트나 아이디어를 실현해 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이제껏 박물관 설계를 맡을 기회가 없었기에 더욱 끌렸습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같은 팀 동료들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공원 위 물결처럼 자리 잡은 박물관

문자박물관은 송도국제도시의 센트럴파크 위에 지어졌어요. 공원이라는 대지는 건축가에게 어떻게 다가오던가요.

실제로 센트럴파크에 방문해 대지를 둘러봤습니다. 박물관이 지어질 자리가 무척 훌륭했어요. 전면에는 공원과 호수가 있어 시야가 트여 있었죠. 사람들은 곳곳에서 저마다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었고요. 박물관이 생기더라도, ‘공원’이라는 장소가 갖는 의미는 유지되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박물관의 건축물이 공원을 이용하는 이들에게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말이지요.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과정이 흥미롭더군요. 문자의 ‘이중성’을 모티프로 삼아 기획을 발전해 나갔다고요. 문자의 이중성이란 무얼 일컫는 걸까요?

문자박물관은 그 이름처럼 문자를 중심으로 한 콘텐츠를 담는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에서 파생한 콘셉트를 녹여내는 일이 필요했어요. 팀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오래 고민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데, 동료가 안네 프랑크가 쓴 〈안네의 일기〉 이야기를 했어요. 문자를 사용해 일상적으로 쓴 일기가 시간이 흐른 후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이 된 사례잖아요.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문자는 무척 일상적인 요소이면서도, 누적되면 일부는 중요한 역사, 즉 비일상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거죠.

개념 스케치. 출처: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그 아이디어를 어떻게 건축설계로 풀어냈나요?

일상성과 비일상성을 모두 담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방문하는 사람들이 공간적인 전이를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겠다고 판단했어요. 일상적인 공간인 외부 공원에서 비일상적인 공간인 전시 공간으로 자연스레 이동하는 시퀀스를 만들고자 했죠. 현재 박물관은 여러 루트로 진입할 수 있는데요, 외부 산책로를 천천히 걸으며 야외 전시 공간을 둘러보세요. 그렇게 걷다 보면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입구를 만나게 됩니다. 이 루트를 통하면 그 시퀀스를 좀 더 명확하게 체감할 수 있을 겁니다.

박물관은 공원 산책로와 이어진다.
하얀 종이를 닮은 건축물

마침내 ‘종이’를 메인 콘셉트로 한 설계 ‘페이지스(Pages)’를 완성했죠. 종이를 떠올린 이유가 궁금합니다.

문자는 탄생할 때부터 그것이 기록되는 바탕이 존재해 왔습니다. 오래전에는 동굴 벽이나 바위가 그 바탕이었고, 나뭇잎이나 양피지도 있었지요. 요즘은 웹페이지나 휴대폰 화면이 그 바탕 중 하나가 되고 있고요. 문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바탕’을 포괄적으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또 그 형태의 유연함 덕분에 박물관의 전시 동선부터 야외 전시 공간, 산책로 등 여러 공간을 자연스레 구축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구부러진 종이 형태의 벽면

종이는 수많은 모양으로 가공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페이지스는 종이를 휘어서 세운 형태예요.

박물관의 내외부에 크기와 형태가 다양한 공간을 갖추고 싶었어요. 관람객들이 자연스럽게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동선, 그리고 공원을 산책하는 이들이 박물관으로 흘러들 수 있는 동선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선을 고민하다 보니, 곡선을 이루는 벽체가 떠오르더군요. 센트럴파크에는 유선형의 산책로와 호수가 있습니다. 곡선의 건물이라면 공원에 이미 자리 잡은 산책로나 호수와도 잘 어우러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워진 곡선 형태의 벽은 공간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물리적인 공간감을 확실히 안겨줄 수도 있을 테고요. 공원의 일부로서 조형물처럼 보이는 효과도 기대했습니다.

콘셉트 발전 과정. 출처: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휜 종이를 세운 형태의 벽체
벽체는 종이가 겹쳐진 모양으로 중첩된다.

공원에서 박물관을 소요하는 경로를 수없이 상상했겠지요. 자연스러운 시퀀스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고 말하기도 했고요. 상상한 시퀀스를 구현해 나간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시퀀스는 결국 관람자들이 박물관을 경험하는 일련의 과정일 텐데요. 문자박물관을 방문하는 이들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일 거로 예상했어요. 첫 번째는 문자박물관이라는 목적을 갖고 찾아오는 관람객, 두 번째는 공원을 이용하는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이죠. 이 유형을 모두 고려하여 접근 동선을 계획했습니다.

1층과 2층에 각각 출입구를 마련한 건 그래서군요.

부지 북동쪽, 센트럴로를 향해 열려 있는 1층 출입구는 박물관을 찾아온 사람들을 고려한 출입구예요. 남쪽, 공원의 산책로와 연결된 2층 출입구는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고려한 것이고요. 페이지스는 구부러진 곡선의 벽체로 설계되었는데, 이렇게 구부러진 벽체는 구부러진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구불구불한 공간은 그저 걷던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박물관 내부로 이끌어요. 휘어진 벽체로 인해 생기는 공간에서 야외전시를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야외전시가 이뤄질 경우, 공원에 그저 산책을 하러 왔던 이들이 문자와 박물관에 대해 알아가는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지요.

구부러진 벽체는 공간을 만든다.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야외전시를 만나게 된다.

구부러진 벽체가 박물관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도 특정한 흐름을 만듭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방문객들은 곡선의 벽체를 따라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상설전시장으로 이동하게 돼요. 공원에서부터 전시 공간까지, 문자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는 하나의 여정을 경험하도록 의도한 부분입니다.

초기 콘셉트로 제작했던 모형의 일부. 곡선을 이루는 벽면이 지상과 지하를 관통한다.
배치도. 출처: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전시 공간은 물론 교육과 연구 공간, 카페테리아, 녹지 공간 등 성격이 다른 공간을 조화롭게 배치해야 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어떻게 해결책을 찾아 나갔나요?

중심에 전시 공간을 두고, 이를 둘러싸는 형태로 연구 및 사무 공간 등 서비스 공간을 배치했습니다. 평면도로 보면 사각형 프레임 형태로 이뤄져 있어요. 전시 공간 중심으로 박물관이 효과적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한편, 서비스 공간에 필요한 기능적인 부분도 충족하는 배치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공간 위에 녹지 공간이 포개어지는 형태로 설계해 공원 산책로와 이어지게 했어요.

따지고 보면 건물 지붕 위에 야외 전시 공간과 산책로가 있는 셈이네요.

사람들이 지붕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위화감 없이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공원으로 흘러 나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개념 스케치. 출처: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설계를 실제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요.

송도국제도시는 원래 바다, 갯벌이었던 공간을 흙으로 메워 만든 간척지입니다. 건축물을 세우기 위한 암반이나 땅의 조건이 일반적인 조건과는 달라서 어려움이 있었어요. 특히 토목공사를 고려하다 보니, 개념 설계에서 계획했던 것처럼 지하공간을 깊이 파기가 어려웠습니다. 건물이 높아지면서 언덕으로 오르는 동선이 길어지고 외벽이 드러나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고요. 그 부분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입면도. 출처: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또 건축설계가 완료된 이후에 다른 업체의 전시설계가 이뤄졌습니다. 물론 건축설계 당시에도 전시에 관한 계획설계 정도는 진행되었지만, 실제 공사를 고려한 설계는 그 이후 진행되었어요. 건축설계와 전시설계가 시간차를 둔 채 따로 이뤄지다 보니 개념적인 부분의 연속성이 다소 약화된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들어요. 원래 건축설계에서의 의도는, 현재 외부와 로비, 중앙계단에서 볼 수 있는 건축물의 벽체들이 전시 공간에서도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시 콘텐츠를 표현하는 방식을 고려하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구현한 데 의도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현재 잘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로 아쉬움을 달래 봅니다.

로비. 곡선이 두드러진다.
TPO

페이지스 설계의 지향과 닮은 부분이 있는 공간

‘문자박물관이 이런 건축물 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그려본 적이 있어요? 있다면, 그 건축물에 대해 들려주세요.

국제설계공모에 참여하기 직전, 팀원들과 함께 건축 답사를 겸해 일본 테시마 미술관(Teshima Art Museum)에 다녀왔습니다. 건축가 니시자와 류에(Ryue Nishizawa)가 설계한 미술관으로, 테시마섬의 고즈넉한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주변 바다와 하늘을 가득 품고 있는 건축물이지요.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바다와 어우러진 채 서 있는 미술관을 만나게 돼요. 그 시퀀스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이 미술관이 단 하나의 예술작품만을 위한 건축물이라는 점도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야말로 건축과 예술이 하나가 되어 빚어진 작품이에요. 내부의 전시 공간은 마치 명상공간 같았어요. 모든 것이 절제돼 있었죠. 물방울로 이뤄진 예술 작품, 하늘과 숲을 향해 열린 원형의 창, 바람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어요. 오롯이 그 순간에 몰입하는 경험을 한 곳입니다.

프로젝트 캐비닛은 참신한 기획과 브랜딩, 디자인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헤이팝 오리지널 시리즈입니다. 매주 목요일, 영감을 주는 프로젝트들을 꺼내 보세요.

[Project Cabinet] ㄱ부터 Z까지 광활한 문자의 세상으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 : file no.1 : 개관 한 달 만에 12만 명 방문한 이 박물관엔 무엇이?

▶ : file no.2 : 종이를 닮은 건축물

▶ : file no.3 : 한눈에 보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글 김유영 기자

사진 표기식

프로젝트
[Post-It]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장소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오픈 시기: 2023년 6월 30일)
주소
인천 연수구 센트럴로 217
크리에이터
MI 디자인 및 가이드라인 개발 | ㈜피앤, 상설전시 연출 | ㈜피앤, 특별전시 연출 | ㈜엠아티존, 설계사 |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설계 참여 인원 | 박도권, 김형철, 강지윤, 김상석, 이주병, 김영걸, 이준석, 박예은, 김진화, 박성호, 이용훈, 김준엽, 박현아, 시공사 | 남광건설㈜, 건축주 | 문화체육관광부
링크
홈페이지
김유영
에디터.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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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부터 Z까지 광활한 문자의 세상으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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