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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7

ㄱ부터 Z까지 광활한 문자의 세상으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①

: file no.1 : 개관 한 달 만에 12만 명 방문한 이 박물관엔 무엇이?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전경. 출처: 김태동스튜디오

Briefing

국립세계문자박물관

2023년 6월 30일, 국립세계문자박물관(National Museum of World Writing Systems)이 인천 연수구 송도동에 개관했다. 프랑스 샹폴리옹 박물관, 중국 문자박물관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문을 연 문자 전문 박물관이다. 문자박물관이 바로 지금, 여기 한국에 세워져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출처: 김태동스튜디오

“한글은 세계적으로 독창성과 과학성을 인정받는 문자이자 문화 콘텐츠예요. 우수한 고유 문자를 가진 나라에 문자박물관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요?” 박준호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전시운영부장의 대답이다. 실제로 자국의 고유 문자를 가진 나라는 많지 않다. 한 나라에서 탄생한 고유 문자는 단 여섯 개뿐. 한자, 로마, 아라비아, 인도, 에티오피아 문자, 그리고 한글이 그것이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한글과 더불어 인류 공동의 유산인 세계 문자 55종을 전시한다. 문자는 역사와 문화를 품고 퍼뜨리는 씨앗이므로, 이 박물관에서 우리는 인류가 걸어온 길과 일궈온 다채로운 문화까지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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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곳으로 향하는 여정

인천 송도국제도시에는 도시공원으로 조성된 센트럴파크가 있다. 꽃과 나무가 자라고 물이 흐르는 대지에 레저와 문화 시설이 알맞게 자리 잡아 수많은 시민이 찾는 휴식처가 되었다. 센트럴파크의 푸른 잔디 위, 하얀 종이를 휘어 놓은 듯한 곡선이 아름다운 건축물이 서 있다. 이 건축물이 바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하 문자박물관)이다. 종이를 닮은 건축물의 이름은 페이지스(Pages)’, 2017년 진행한 국제현상설계공모에서 126:1의 경쟁률을 뚫고 당선된 삼우건축의 작품이다.

공원에 자리 잡은 박물관

문자박물관은 지하 1층부터 2층에 이르는 3개 층으로 구성돼 있다. 지하 1층에는 상설전시실이, 1층에는 기획전시실과 어린이 체험실, 교육과 연구가 이뤄지는 공간이 있다. 2층에는 카페와 야외 전시 공간이 마련됐다. 박물관의 지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상설전시실이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점은 의미심장하다. 상설전시의 제목은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문자의 탄생부터 다양하게 뻗어 나간 갈래, 현재의 모습까지 찬찬히 짚을 수 있는 전시다. 1층의 출입구로 들어선 관람객은 벽면의 곡선을 따라 자연스레 지하로 향하게 된다. 자신도 알아채지 못하는 새 유구한 문자의 기원 속으로 파고드는 여정을 시작하는 셈이다.

상설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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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레 만져 보세요”

원형 배 점토판. 이 유물은 원본으로 만질 수 없다.

문자박물관은 상설전시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으로 쐐기문자부터 이집트문자, 마야문자, 라틴문자, 한글 등 세계 곳곳의 문자는 물론, 문자로 말미암아 탄생한 인쇄술과 번역, 서체, 매체 등의 문화까지 다채롭게 조명한다. 이와 관련한 유물은 어떻게 갖췄을까? 박물관은 기원전 2000년~1600년의 문서로 쐐기 문자를 확인할 수 있는 ‘원형 배 점토판’, 아랍문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슬람교 경전 ‘쿠란’, 서양 최초의 금속 활자로 인쇄한 구텐베르크 성서의 「여호수아서」 등 희귀 유물을 포함한 543점을 소장하고 있다. “아시아권에서 구텐베르크 성서를 소장한 곳은 일본 게이오대학 외에는 우리 박물관뿐입니다. 전 세계에서도 구텐베르크 성서의 초판본은 49부 정도만 남아 있다고 알려졌을 정도로 귀한 유물이지요. 이 원본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건 대단히 큰 의미이고, 우리 박물관의 쾌거입니다.” 박준호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전시운영부장의 설명이다.

쿠란

이처럼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을 확보했지만, 박물관은 전시의 흐름을 한층 빈틈없이 구성하기 위해 또 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문자 관련 자료 중에는 대여 자체가 불가한 것이 많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 중인 함무라비 법전이 그 대표적 예지요.” 문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유물을 빼놓고 상설전시를 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자박물관은 실제 유물 대신, 소장처의 허가를 얻어 복제한 유물을 전시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박물관의 유물 중 44점이 복제품이다. “복제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원본에 최대한 가깝도록 정교하게 복제하기 위해 현지에서 작업을 진행했어요. 복제한 유물을 항공편으로 이송하는 일도 만만찮았습니다.” 복제품 전시는 관람객에게 각별한 경험이 되기도 한다. 유물을 매우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몇몇 유물의 경우 가볍게 만져보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 만질 수 있는 유물을 조심스레 매만지면서, 수천 년 전에도 무언가를 기록하여 남기고자 했던 사람들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유물들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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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 예민한 유물들

문자박물관은 국내에선 비교적 생경한 소재로 제작된 유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는 환경 변화에 예민한 것이 많다. 이는 관람객에게는 낯선 즐거움을, 박물관에는 또 하나의 과제를 안기는 요인이 됐다. 파피루스 에버스(Papyrus Ebers)가 일례다. 파피루스 에버스란 의학 관련 내용을 파피루스에 기록한 고대 이집트의 실용서로 원본은 독일 라이프치히대학 도서관이 소장 중이다. 이 유물의 복제품을 문자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데, 그 전시 모습이 퍽 독특하다. 높이 30cm, 길이는 무려 1,863cm에 이르는 얇은 파피루스가 공중에 뜬 채 전시되어 있다. “파피루스 에버스는 복제 허가를 얻는 일부터 복제품을 우리 박물관에 설치하는 작업까지 여러모로 공을 들여야 했습니다. 국내에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자료를 전시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이 유물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어떻게 전시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이 난관은 라이프치히대학 도서관과의 협업을 통해 타개했다. 도서관 복원팀의 전문가들이 개관 전 박물관을 찾아 유물 설치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것. “그들의 조언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며 익혔습니다. 앞으로는 비슷한 유물이 있다면 직접 설치할 수 있죠.”

파피루스 에버스 설치 모습. 제공: 국립세계문자박물관

1397년 말라왕조의 유물 ‘판차락사 패엽경’은 또 다른 예다. 패엽경이란 나뭇잎을 재단한 다음 날카로운 철로 긁어 쓴 경전을 일컫는데, 주로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 사용된다. “처음 패엽경이 이곳에 왔을 땐 유물이 아주 힘들어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어요. 춥고 건조하니까 비틀리는 거예요. 여름이 되고 장마가 와서 습해지니까 얘네가 편안해져요. 자연스럽게 펼쳐지고요. 해외 전문가의 의견을 구하고 내부에서도 여러 연구를 하면서 알맞은 관리법을 찾았지요.” 문자박물관의 이러한 노력이 문자라는 콘텐츠는 물론 국내 전시 방식에도 의미 있는 영향력을 미치리라 기대한다.

판차락사 패엽경
「춘향전」의 프랑스 역본 「향기로운 봄」 번역: 홍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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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박물관

훈맹정음은 송암 박두성이 창제한 한글점자다. 시각장애인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했던 박두성은 점자가 시각장애인이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가 되리라 믿고 창제에 몰두했다. 노력 끝에 그는 1926년 훈맹정음을 발표한다. 자음과 모음, 숫자를 포함하는 63개의 한글점자로 구성된 훈맹정음은 한국의 문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를 반영해 문자박물관 역시 상설전시 일부로 훈맹정음을 무게 있게 조명한다. 훈맹정음과 훈맹정음의 유래, 한글 점자 원고와 문서의 복제품을 전시하는 한편, 점자 패널과 한글 양각 패널을 나란히 배치했다. (원본은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 또 이 구역에서는 수어 영상을 제공하며, 시인 윤동주의 ‘서시’를 점자로도 읽을 수 있도록 설치해 두었다.

훈맹정음
윤동주의 ‘서시’를 점자로도 읽을 수 있다.

문자박물관은 ‘모두를 위한 박물관’을 표방하며 공간 내외부에 범용 디자인을 표준으로 적용했다. 휠체어 사용자가 무리 없이 전시 설명을 읽을 수 있도록, 유물 설명 패널을 휠체어 높이에 맞춘 위치에 부착했다. 시각장애인이 만져보면서 유물을 경험할 수 있는 모형 전시품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휠체어 사용자의 진입 동선이나 이를 안내하는 조명도 더 손봐야 해요. 수어 통역사가 상주하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도 있고요.” 모두를 위한 박물관을 만드는 노력은 여전히 완료되지 않았지만, 이미 다양한 관람객이 문자박물관을 찾고 있다. “시각장애인인 초등학생 관람객이 방문한 적이 있어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유물과 촉각 전시용 모형, 점자 패널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돌아갔습니다. 모두가 편안한 전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더 애써야겠다고 마음먹는 계기가 됐죠. 아, 그분이 점자 패널 중 오자가 있다고 짚어 주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웃음)

프로젝트 캐비닛은 참신한 기획과 브랜딩, 디자인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헤이팝 오리지널 시리즈입니다. 매주 목요일, 영감을 주는 프로젝트들을 꺼내 보세요.

[Project Cabinet] ㄱ부터 Z까지 광활한 문자의 세상으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 : file no.1 : 개관 한 달 만에 12만 명 방문한 이 박물관엔 무엇이?

▶ : file no.2 : 종이를 닮은 건축물

▶ : file no.3 : 한눈에 보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김유영 기자

사진 표기식

프로젝트
[Post-It]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장소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오픈 시기: 2023년 6월 30일)
주소
인천 연수구 센트럴로 217
크리에이터
MI 디자인 및 가이드라인 개발 | ㈜피앤, 상설전시 연출 | ㈜피앤, 특별전시 연출 | ㈜엠아티존, 설계사 |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설계 참여 인원 | 박도권, 김형철, 강지윤, 김상석, 이주병, 김영걸, 이준석, 박예은, 김진화, 박성호, 이용훈, 김준엽, 박현아, 시공사 | 남광건설㈜, 건축주 | 문화체육관광부
링크
홈페이지
김유영
에디터.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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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부터 Z까지 광활한 문자의 세상으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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