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마을은 아직 귀에 선 이름일지도 모른다. 서울역에서 한 시간은 넘게 지하철을 타야 닿을 수 있는 동인천의 한갓진 마을. 나지막한 건물과 견고한 이야기가 있고, 그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모인 동네다. 지명처럼 한때는 배와 배를 연결해 다리처럼 밟고 다녔던 곳이었고, 조계지에 밀린 조선인들이 모여 공장과 시장을 형성한 마을이었고, 인천 최초로 만세운동을 벌인 본거지이자, 헌책방 40여 곳이 배움의 갈증을 해소해 주던 거리이기도 했다.
2023년, 배다리 마을을 기반으로 여러 가지 문화 예술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로컬 크리에이티브 기획사 ‘패치워크(PATCHWORK)’가 생겼다. 패치워크는 동네의 면면을 바라보며 지역민들과 소통하고, 마을의 정서를 기반으로 여러 프로젝트를 만든다. 그들이 로컬과 이야기를 짓는 매개는 문화 예술. 다소 멀게 느껴지는 문화 예술이라는 단어는 패치워크가 만드는 장면들 안에서 지역과 나를 알아가는 모험이 된다. 올 시월에는 마을 곳곳을 배경으로 23일간 전시와 프로그램을 경험하는 타운 페스티벌 〈패치워크 크리에이티브〉를 열었다. 축하 공연도, 먹거리도 없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축제 현장이었을 배다리 마을로 향했다.
Interview with 김해리 패치워크 대표
— 패치워크는 배다리 마을을 기반으로 일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배다리 마을의 존재를 처음 알았어요.
헌책방과 문구점, 오래된 건물들이 늘어선 동네예요. 한때는 큰 시장도 서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인천의 중심지였어요. 지금은 예전처럼 북적이지 않지만 오래된 것을 쉽게 부수거나 버리지 않고 정성스럽게 되살려내는 사람들, 자기만의 기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중심이 단단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요. 아날로그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한 동네라, 처음 이곳을 만났을 때 무척 신이 났던 기억이 있어요.
— 배다리 마을은 유난히 헌책방이 많은 곳이기도 했어요. 왜 배다리 주변으로 헌책방들이 생긴 걸까요?
사실 인천뿐 아니라 부산과 같은 항구 도시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 같아요. 전쟁 상황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외지인들이나 피란민들이 버린 책을 손수레에 쌓아두고 팔던 것이 시작이라고 보는 거죠. 옛날 배다리 지역 사진을 찾아보는 걸 좋아하는데, 이렇게 책을 파는 듯한 모습을 보고 혼자 얼마나 흥미로워했는지 몰라요. 1948년에 미군 부부가 찍었던 사진이라고 하는데, 당시 배다리 마을이 얼마나 북적였는지 느껴지죠.
— 배다리 마을을 기반으로 일하게 된 건 우연이라고 들었어요.
인천 원도심에 우연히 놀러 온 날에 오래된 간판 등을 찍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어요. 그걸 보고 지인이 아는 곳이 근처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1950년대부터 하던 ‘이십세기약방’ 건물을 정성스럽게 되살려 현재는 한의원으로 운영하고 있는 특별한 공간이었는데요. 결이 맞는 사람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로 옆 건물을 오래 비워 두셨다고 하더라고요. 지인이 그곳과 저희를 연결해 주었고, 그 이후로는 일이 빠르게 진행됐어요. 겨울에 보러 왔다가, 그해 8월에 오픈했으니까요.
— 시작은 카페였어요. 지금도 1층에서 손님을 맞고 있는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동양가배관’이죠.
중국을 오가면서 브랜드를 소개하고 인사이트 콘텐츠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잠깐 합류했는데, 그때 현재 패치워크와 동양가배관을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이성은 대표를 만났어요. 성은 대표는 오랫동안 커피를 해왔던 로스터였고,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 하는 상황이었어요. 저는 브랜드와 콘텐츠를 기획해 온 사람이었으니까 함께 무언가를 만들 수 있겠다 싶었죠. 당시 전통문화를 현대적 감성으로 소개하는 중국 브랜드를 경험하면서, 브랜드를 통해 우리 문화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동양가배관’이라는 이름을 짓고 커피 브랜드를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역사적으로 가배(커피)가 처음 들어온 곳도 인천이고, 성은 대표가 살면서 로스팅을 하는 곳도 인천이라 이곳에 자리를 잡았죠.
— 동양가배관이 배다리에 자리 잡고 2년 정도가 지난 2023년에 패치워크의 활동이 시작됐어요.
동양가배관으로 지내온 시간 덕분에 패치워크가 지역 연계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도 원활히 흘러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저희가 가진 진정성이 시간으로 증명됐다고 할까요. 로컬 기획에 있어서 신뢰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굉장히 진심으로 다가가야 하고요.
— 진심으로 다가가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요?
다른 지역도 그렇겠지만 배다리 마을 역시 마을의 문화를 만들고, 오랜 시간 이곳을 지켜온 사람들이 존재해요. 이들이 쌓아온 시간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패치워크가 작년에 ‘이상하고 엉뚱한 책의 경험’이라는 슬로건으로 〈언노운 북 페스티벌〉을 열었는데요. 이렇게 ‘책’을 주제로 행사를 기획할 수 있는 것도 책방들이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왔기 때문에 가능한 거잖아요. 축제를 기획하면서 마을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조명하기 위해 애썼어요. 존중을 표현하고 싶었죠.
— 배다리 마을에서 헌책방이 가진 문화적 위상이 느껴져요.
배다리 마을에 있는 헌책방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운영하는 분들이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경우가 많고, 그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는 점이에요. 책방마다 시 낭송회라든지, 전시라든지 문화 행사를 하는 공간이 하나씩 꼭 있어요. 헌책방 집현전은 2층을 예술인들이 작업할 수 있는 레지던시 공간으로 운영하기도 하고요. 내가 문화 기획자들의 동네에 들어왔구나, 하면서 신기해했죠.
— 문화 기획자는 해리 님이 스스로를 소개하는 직업이기도 해요. 해리 님의 일을 해리 님의 언어로 들어보고 싶어요.
저는 늘 ‘예술적 상상력으로 창조적 변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소개해요. 특정 장르나 영역에 얽매이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면서 일하고 있어요. 기존과 다른 상상을 하고, 그것을 재료로 콘텐츠를 기획해서 이를 경험한 사람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 문화 예술이라는 개념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해요. 광범위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내가 왜 문화 예술에 끌렸는지 생각해 봤어요. 저는 정해진 대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대학에 가야 하고, 졸업하면 대기업에 다녀야 하고, 그런 틀이 저를 답답하게 만들 때 문화 예술 콘텐츠를 경험하면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죠. 저한테 문화 예술은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게 하고, 현실의 영역에서 잠시 발을 떼고 또 다른 가능성을 꿈꿔보는 장이었던 거예요. 그러니 어떤 장르의 예술을 다룰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거죠.
— 해리 님이 이야기하는 예술은 펜스로 보호된 회화 작품처럼 느껴지진 않아요.
저에게 예술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에요. 예술이라고 하면 몇 억에 호가하는 작품이 멋지게 걸린 갤러리나 화려한 무대, 유명한 아티스트의 이름을 떠올리기 쉬워요. 오히려 저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꺼내고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존중하는 창조적인 과정이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결과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는데, 삶을 변화시키는 예술의 본질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실천하려고 애쓰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태도를 지니게 된 것 같아요.
— 예술에 대한 가치관이 패치워크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 같아요.
각자의 관심사와 취향을 녹인 진(zine)을 만드는 진 메이킹 프로그램이나 다양한 워크숍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세운 나름의 기준이 있어요. 멋진 결과물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걸 만들면서 나를 만나고 발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많은 아티스트들과 로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법’과 같이 예술적 기예를 갈고 닦는 방법을 알려주는 방식은 경계하고 있어요. 위계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그보다 예술가들이 어떤 시선으로 나와 일상, 지역을 바라보고 매만지는지, 그 시선을 나누고 싶었어요.
— 문화 기획자로서 ‘로컬’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가 있나요?
문화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을 때 결국에는 ‘삶의 방식’이잖아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으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함께 했을 때 문화가 된다고 생각해요. 온라인에서 생겨나는 문화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물리적 거점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기에 지역과 뗄레야 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삶과 예술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로컬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 로컬을 발전시키는 건 쇼핑몰처럼 자본이 결합한 상업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물론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고요. 상업 시설과 달리 문화 예술이 로컬 안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상업 공간의 역할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사람들이 상업 공간에서 주로 하는 행위는 소비잖아요. 직접 생산하거나, 창작하거나, 주인공이 되는 경험은 하기 어려워요. 저는 문화 예술 활동을 통해서 나의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로 인해 도시와 지역민들과 관계를 맺는 경험을 하고, 결국은 그게 그 지역의 고유한 색과 문화를 만든다고 봐요.
— 지금 열리는 타운 페스티벌 〈패치워크 크리에이티브〉도 문화 예술 활동의 일환이겠죠. 이번 축제는 기간이 상당히 길어요.
작년에 했던 〈언노운 북 페스티벌〉이 짧다고 아쉬워하는 분이 많았어요. 서울 한복판도 아닌데 일정을 맞추는 게 쉽지 않겠더라고요. 올해는 한 달 내내 축제를 해보면 어떨까, 실험해 본 거예요. 일상이 축제가 되는 순간을 만들고 싶었고요. 사람들이 모여 로컬 문화를 경험하고, 본인도 영감을 얻어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그런 장을 꿈꿨어요.
— 어떤 전시와 프로그램이 있었나요?
일단 7명의 아티스트들이 3개월 이상 마을과 교류하면서 각자의 시선으로 지역을 표현한 아트워크들이 마을 곳곳에 전시되어 있어요. 전시를 보며 자연스럽게 지역의 숨은 공간들을 발견하고, 각자의 시선으로 지역의 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랐어요. 3대째 동네에서 살아온 토박이와 노포를 산책하는 프로그램처럼 지역민들과 연결되는 프로젝트도 있고, 아티스트와 보물찾기하듯 마을의 글씨를 수집해 진을 만드는 등 창작형 워크숍도 있어요.
— 축제 기간에 각자의 지역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 이들을 한데 모아 컨퍼런스도 진행했다고 들었어요.
로컬 활동을 이어나가는 건 갖가지 실험과 작은 실패, 그리고 이게 맞는지 의구심이 드는 날의 연속이에요. 저는 저희 같은 사람이 각 지역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현장에서 만난 사례를 공유하고, 과정을 나눠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5인의 일 실험가에게 ‘당신들은 어떤 실험을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장을 만들고 싶다’고 초대장을 보냈고, 전국 각지에서 모였어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교류하기 위해 60여 명의 사람들이 왔고요. 마치 동료를 만난 것 같았죠. 그날 발견한, 동료의식을 기반으로 무언가를 또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지금까지 이어온 패치워크의 로컬 기반 프로젝트를 다른 지역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요?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애정을 주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기에, 단기간 이식은 어려울 거예요. 물리적인 시간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거든요. 로컬 기반 문화 기획은 긴 호흡이 필요해요. 제가 이전에 했던 기획은 팝업이나 공연처럼 비교적 짧은 기간 압축적으로 에너지를 쏟아부어 보여주는 방식의 일이 많았어요. 하지만 도시와 관련된 일은 아무리 열심히 일을 벌이더라도 단숨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기는 어려워요. 요행을 바라지 않고 지속적인 유지가 필요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 지역의 고유성을 발견해 온 방식이나 작업을 만들어가는 태도 등 ‘과정’을 다른 곳에서 적용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 패치워크처럼 로컬의 이야기를 발굴해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분에게 전해줄 말이 있다면요.
나의 관심사나 라이프스타일과 맞닿은 접점에서 시작하는 게 좋아요. 이 지역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보다는, 내가 이 지역에 왜 끌리는지 개인적인 이유를 찾는 것부터 출발해 보세요. 고구마가 유명한 지역이라고 해서 나도 반드시 고구마를 말할 필요는 없어요. 내 눈엔 이곳의 잡초가 남다르다고 느껴진다면, 그게 나만의 기획 요소가 될 수 있어요. 내 인생에서도 귀중한 시간을 쓰는 건데, 나부터 설득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에게 집요하게 질문해 보세요. 자기만의 답이 나올 거예요.
글 김기수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패치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