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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9

열렬히 덜어내는 삶, 수수진 작가

비움을 추앙하기
수수진 작가는 힘껏 비움의 가치를 외친다. Less makes things better. 끝내 모든 것을 이롭게 하는 뺄셈(-). 작가는 덜어낼수록 선명해지는 이 가치를 그림으로 또 글로 세상에 내보인다.
전주도서관 팸플릿 ⓒ 수수진

자로 그은 듯 반듯하진 않지만 때문에 더 따스한 그림. 조금 삐뚤빼뚤 해도, 곧바로 걷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듯 해서일까. 은은한 위로를 안기는 그림을 그려내는 수수진은 1인 스튜디오 ‘프로젝트158(project158)’을 운영하고 있다. 5년간의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독립 작가로 생활한지 어느덧 5년 차. 체질이 변해가는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그와 이야기 나눴다.

Interview with 수수진

ⓒ 수수진

‘Less makes things better’라는 메시지를 기반으로 작업하고 계세요. ‘프로젝트158’의 인스타그램 계정 피드도 이 메시지로 가득하네요.

공간과 관련이 깊은 메시지예요. 집이자 작업실인 공간에 짐을 다 둘 수 없어서 부모님 댁에 일부를 보관해뒀거든요. 두 집 살림이나 마찬가지죠. 5평 남짓한 공간에서는 최대한 짐을 줄일 수밖에 없어요. 대형 캔버스 작업도 어렵고요. 어느 순간 ‘차라리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삶의 짐을 줄이면서 그림에도 더 넣을 수 있는 요소들을 오히려 빼기 시작했죠. 그림자, 반사광 등 서양화 기법 특유의 요소들을 하나씩 덜어내면서 한결 편안해졌어요. 디자이너 디터람스(Dieter Rams)의 ‘Less is more’도 명문장이지만 저는 더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에서 ‘Less makes things better’라고 해요. 제가 만들었지만 좋아하는 말이에요. 

lmtb(less makes things better) 로고 ⓒ 수수진
lmtb '5월의 포스터' ⓒ 수수진

매월 한 디자인의 포스터만을 판매하는 독립 프로젝트명 역시 ‘lmtb(less makes things better)’예요.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lmtb(less makes things better)’는 자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프로젝트랄까요. 독립 작가의 세계는 직장인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고정적인 수입이 없을뿐더러 때에 따라 수입의 편차도 크니까요. 이런 환경에서 돈이 우선순위가 되어 제 스케줄이 그에 맞춰지면 평생 끌려다닐 것 같았어요. 절 이끄는 원동력이 돈이면 안 되겠다 싶었죠. 일주일 내내 일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제가 자본 위에 서기로 마음먹었어요. 대량 판매가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니어서 경제적으로 실질적인 자유를 주진 않지만, 개념적으로 이 작업을 지속하고 싶어요. 저의 예술성을 더 담아낼 수도 있고요. 평소에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왔다면 ‘lmtb’를 통해 내보이는 그림은 그렇지 않거든요.

lmtb '6월의 포스터' ⓒ 수수진
lmtb '7월의 포스터' ⓒ 수수진

이 프로젝트를 지치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려면 과하게 에너지를 투입하지 않고도 핸들링 할 수 있는 정도여야 했어요. 매월 한 디자인의 포스터. 말 그대로 ‘Less makes things better’인 셈이죠.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면 결과물이 계속 쌓일 테고, 제가 열심히 하는 만큼 포스터의 가치가 오를 거라고 생각해요. 굳이 리미티드 에디션이라고 명명하고 싶진 않아요. 조금 웃긴 얘기일 수도 있지만 ‘6월의 포스터’가 단 한 장 판매됐으니 그 디자인의 포스터는 구매자와 저만 가지고 있는 거예요. 마음이 동하는 디자인이라면 구매하시고 포스터의 가치가 올랐을 때 그 가치를 충분히 누려주세요. 지금은 제가 ‘무명’으로 ‘유명’하지만 훗날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웃음)

lmtb '8월의 포스터' ⓒ 수수진

포스터가 아닌 다른 형태의 작품도 계획하고 있나요?

지금으로서는 포스터 형태의 작품만 염두에 두고 있는데요. 가능하면 재활용이 되는 어떤 것을 만들고 싶고, 현재 지류가 재활용률이 가장 높아 종이를 활용한 작품을 제작하고 싶었어요. 완벽하게 재활용되는 소재가 있다면 다른 형태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도가의 장남 김민규씨는 발효라는 아이디어를 발효주에서 건축의 공간으로 재해석하여, 공간이 인간에게 유용하게 바뀌는 과정을 '발효건축'이라 정의했다. | 이미지 출처: 복순도가 공식 홈페이지
복순도가 x 수수진 ⓒ 수수진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했어요. 특히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요?

‘복순도가’와 협업하며 브랜드 리서치를 오랜 기간 진행했어요. 복순도가는 발효문화를 건축에 담아 ‘발효건축’이라는 정의를 만들었을 만큼 발효의 가치를 지속하려는 브랜드예요. 이처럼 깊고 풍부한 스토리를 가진 브랜드의 결을 잘 살리기 위해서는 리서치를 바탕으로 제 색을 어떻게 입혀낼지 고민이 필요하겠더라고요. 브랜드를 해석하는 능력도 작가의 역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무엇보다 제품의 맛이 훌륭하기도 합니다.(웃음)

첫 직장 퇴사 후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 애플스토어에서 근무했다. ⓒ 수수진

그림 그리는 작가 수수진이 글을 쓰게 된 계기도 궁금한데요.

먼 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아요. 어릴 적 화가를 꿈꿔 꾸준히 그림을 그리며 미대 진학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결국 미대 입시를 포기하고 평생교육학을 전공했어요. 대학 졸업 후에는 홍익대학교 부근 문화예술 공간의 교육기획팀에서 일하며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했고요.

 

첫 직장을 퇴사하고는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죠. 독일인 룸메이트의 소개로 애플 리셀러로 일하게 됐고, 그곳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에 돌아와 애플 코리아에 입사했어요. 3년간 고객 서비스팀 직원들을 위한 뉴스레터 번역과 디자인 업무 등을 진행했고요. 이후 이직한 IT 기업에서 만난 동료 직원 덕에 ‘독립출판’을 알게 됐고, 취미로만 이어오던 기록을 모아 책으로 내게 돼요.

 
첫 독립출판물 ⓒ 수수진

첫 독립출판 책인 에세이 <목늘어난 티셔츠가 지저분해 보이지 않는 이유> 말이죠.

스토리지북앤필름에서 진행하는 독립출판 워크숍을 수강한 후 틈틈이 써두었던 글을 묶어 낸 에세이집이에요. 당시 독립출판 시장이 꽤 인기였던 터라 반응이 좋았어요. 인스타그램 메시지로 후기와 응원의 말을 전하는 분도 있었고요. 독자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저도 책을 많이 읽는 편인데 작가에게 직접 연락을 취한 적은 없었거든요. 전해 받은 한 마디 한 마디에 큰 위로를 받아 꾸준히 책을 내온 것 같아요.

은 일본에서도 출간됐다. ⓒ 수수진
최근 출간한 에세이 ⓒ 수수진

책 <수수한 드로잉북>과 <수수한 아이패드 드로잉> 그리고 <나는 알람없이 산다>를 이어 출간했어요.

앞서 이야기한 <목늘어난 티셔츠가 지저분해 보이지 않는 이유>가 글을 한데 묶은 책이었다면, <수수한 드로잉북>은 그려두었던 그림을 묶어 낸 책이에요. 감사하게도 이 책을 통해 클래스 제안과 함께 큰 사랑을 받았어요. 이후 펴낸 <수수한 아이패드 드로잉>은 처음으로 출판사와 작업한 책인데요. 제가 진행하는 아이패드 드로잉 클래스가 마감되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잘 되었거든요. 이때 영진닷컴에서 제의가 와 출간하게 되었어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고 메인 섹션에 소개되기도 해서 저에게는 감사한 경험이었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간 것 같은데요.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며 불안감은 없었나요.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스스로를 이끌어온 건 아니에요. 돌아보니 일련의 과정들이 하나의 맥락이 되어 현재의 제가 있지만, 당시에는 답답하기도 했어요. 특히, 최근 출간한 에세이 <나는 알람없이 산다>는 2년 동안 준비한 결과물임에도 기대에 비해 반응이 뜨겁지 않았고요. <수수한 아이패드 드로잉>이 워낙 반응이 좋았기에 같은 온도를 예상했던 거예요. 하지만 오히려 ‘내 길은 그림이다’ 깨닫게 된 좋은 기회였어요.

 

이것저것 시도하는 과정을 방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고민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긴 결과들이 저를 한 방향으로 이끌었거든요. 예전에는 글에 대한 집착이 있었어요. 어떻게든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에세이에 도전했지만, 결과적으로 제 재능은 그림에 있음을 다시 느끼게 되었듯 결과물이 직접 말을 거는 순간이 있지 않나요? 고민만 하기보다 직접 부딪히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보일 거예요.

수수진 작가의 생활공간이자 작업공간인 '집업실' ⓒ 수수진

‘예술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말이 인상 깊었어요. 작가님이 쓰고, 그리는 모든 것들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닿기를 바라는지.

일단 거창하고 대단한 무언가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예술계에서 작품에 과한 가치를 매겨 장벽을 높이는 시도는 늘 있어왔는데요. 제 손에서 태어난 것들은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닿기를 바라요. 특별한 누군가만 작품을 보고, 수집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김가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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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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