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이 ‘경작자’를 모집한다. 내년 1월부터 열리는 전시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의 참여작인 아사드 라자(Asad Raza)의 〈흡수(Absorption)〉를 구현할 사람이다. 면접과 오리엔테이션을 거쳐 발탁된 일곱 명의 경작자는 약 3개월간 흙을 돌보고 분석하며, 그 과정을 관객들과 나누게 된다. 이례적인 제안은 질문을 남긴다. 〈흡수〉는 왜 ‘경작자’를 필요로 할까. 그리고 라자는 왜 이러한 방식을 택했을까.
아사드 라자의 작업 방식
아사드 라자는 조각, 설치, 퍼포먼스, 문학, 스포츠 등 각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활동해 온 인물이다. 스스로를 특정 직업으로 규정하기보다, 전시를 하나의 ‘활동 구역’으로 설정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전통적인 예술 개념에 도전하며, 학문과 장르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흐리는 작업을 지속해 온 작가다. 한국과 연이 깊진 않다. 2017년 벨기에 브뤼셀 미술관 빌라 엉팡(Villa Empain)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며 한국 작가 전광영의 개인전을 기획한 바 있고, 그 연을 계기로 2018년 PKM 갤러리에서 열린 전광영 개인전에 참석해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라자의 작업에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협업’이다. 그는 예술가뿐 아니라 과학자, 농부, 운동선수 등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인물들과 생각을 나누고 팀을 이뤄 작업하는 방식을 즐긴다. 이러한 태도는 2015년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열린 〈홈 쇼(Home Show)〉에서도 잘 드러난다. 라자는 자신의 생활 공간을 전시장으로 열고, 동료 예술가와 가족, 친구들이 제안한 규칙과 개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침실 침구와 욕실 배수구까지 모두 작품의 일부가 됐다. 현재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를 진행 중인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역시 냉동고에 바닷가재와 석류 등을 결합한 작품을 설치했다. 라자는 4주 동안 방문객과 대화를 나누며 전시를 안내했다.
‘관객 참여’ 역시 라자의 작업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그의 전시에서 관람객은 작품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품 안으로 들어와 머무르고, 때로는 관리하고 대화를 나누며 작업의 일부가 된다. 2017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Root Sequence. Mother Tongue〉에서는 나무를 돌보는 관리자(caretakers)들이 상주하며 관람객과 대화를 나눴다. 이러한 방식은 〈흡수〉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흡수〉의 ‘경작자’는 선택적인 참여자가 아니라, 작품이 성립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라자가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협업과 관객 참여 방식은 이번 전시에서도 또 하나의 실험으로 이어진다.
도시 에너지를 흡수한 토양
〈흡수〉는 2019년 시드니 칼도르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지금껏 이어진 작품으로 토양을 중심에 둔 참여형 작업이다. 이 작품에서 흙은 단순한 조형 재료가 아니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자, 수많은 생명체와 물질이 상호작용하는 복합적인 네트워크로 다뤄진다. 〈흡수〉는 이러한 흙의 성질을 전시 공간으로 끌어와 변화하는 과정 자체를 작품으로 드러낸다.
“예술 매체로서 흙은 종종 장식적인 용도로 사용되거나, ‘자연 세계’를 상징하는 레디메이드—즉 발견된 재료—로 다뤄져 왔다. 그러나 흙은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휴대전화, 옷, 스티로폼과 같은 현대의 부산물은 흙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흙의 미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에 남아 있는 흙에 항아리 조각이 섞여 있듯, 베를린 인근 테우펠스베르크의 흙이 제2차 세계대전의 불에 탄 잔해로 이루어져 있듯이 말이다. 오늘날 도시들은 의도하지 않은 채로, 이러한 인간 기원의 물질이 포함된 새로운 토양 유형, 이른바 ‘테크노소일(technosoils)’을 만들어내고 있다.”
ㅡ FRIEZE 「Asad Raza on Sculpting with Soil」by ASAD RAZA
핵심은 ‘네오소일(neosoil)’이라 불리는 토양이다. 네오소일은 전시가 열리는 지역에서 수집한 다양한 폐기물과 유기물을 흙과 섞어 만들어진다. 시드니에서 선보인 〈흡수〉에는 맥주를 만들고 남은 보리, 박물관 카페에서 나온 커피 찌꺼기, 미술품 운반 과정에서 나온 팔레트 조각 등 도시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재료들이 사용됐다. 이렇게 수집된 물질들은 토양 속 미생물과 반응하며 새로운 생태적 과정을 만들어낸다. 흙은 전시 내내 섞이고 뒤집히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완성은 없다. 〈흡수〉는 도시의 소비 구조와 폐기 시스템을 가시화하는 동시에, 버려진 물질이 다시 생명의 토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을 가꾸는 ‘경작자’의 역할은?
전시 동안 경작자들은 도구를 사용해 흙을 갈고, 새로운 재료를 더하며, 토양의 수분과 상태를 조절한다. 변화 과정을 기록하고, 미세한 차이를 관찰하는 일 역시 이들의 몫이다. 이러한 반복적인 노동과 관리가 축적되며 네오소일은 하나의 ‘상태’로 유지되고, 작품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갱신된다. 경작자가 없다면 〈흡수〉는 전시될 수 없다.
경작자의 역할은 흙을 돌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관람객이 작품 안으로 들어와 흙을 밟고 만지고 냄새 맡는 과정에서, 경작자들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건넨다. 흙에 더해진 물질이 무엇인지, 현재 토양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이 작업이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설명하며 참여를 돕는다. 경작자는 〈흡수〉라는 작품을 살아있게 유지하는 사람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찾는 경작자는 특별한 전문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다. 자연에 대한 관심, 반복적인 작업을 성실하게 이어갈 수 있는 책임감, 그리고 소통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흙을 좋아하고,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돌보는 일에 의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지원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이벤트 게시물을 참고하자.
글 김기수 기자
자료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칼도르 공공미술 프로젝트, 프리즈, 월페이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