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바람은 인간의 옆과 안으로 흐르는 생동하는 물질성을 명료하게 표현함으로써, 사물들의 힘을 더 정당하게 다루었을 때 정치적인 사건을 분석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접하는 것이 잡동사니, 폐물, 쓰레기, 또는 ‘재활용품’이 아니라 퇴적된 한 더미의 활기 넘치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물질이라면 소비 양식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9p中
미국의 정치 이론가 제인 베넷(Jane Bennett)은 무력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졌던 물질에도 자체적인 역량이 있다는 ‘생기적 유물론’을 주장했다. 인간만이 아니라 사물에도 힘과 활력이 있으며, 우리가 이를 존중할 줄 알아야 ‘생동하는 물질’과 공존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앞서 인용한 그의 저서 「생동하는 물질: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의 첫 번째 챕터 ‘사물들의 힘’에서 이름을 딴 전시가 스페이스 이수에서 열렸다. 베넷의 관점처럼 철학적으로 접근하지 않더라도 사물이 늘 우리와 함께하는 동반자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사물과 미술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는 작가의 작품을 모은 기획전 〈사물들의 힘〉 전시 현장에 다녀왔다.
그간 우리의 삶으로 예술적 시야를 확장하는 전시를 선보였던 스페이스 이수에서 일상의 사물을 조명하는 전시가 열리는 건 퍽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번 전시장에 오른 사물들은 다음과 같다.
가정 바닥재로 흔히 쓰인 노란 비닐민속장판, A4용지 더미, 촉촉한 수분을 뿜는 대야와 스펀지, 유니폼, 프로젝터, 지점토로 빚은 통닭 두 마리, 전자레인지, 카펫….
자칫 미술과 동떨어지게 느껴지는 사물들이 예술의 얼굴을 하고 서 있다. 낯섦도 잠시, 작가의 사물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사물이 미술이 되는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사물이 가진 힘에 대해 사유할 만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 네 점을 기사로 먼저 소개한다.
“사물은 개인과 시대에 대해 무엇을 설명할 수 있을까”
서도호, 「유니폼/들: 자화상/들: 나의 39년 인생」 (2006)
서도호의 「유니폼/들: 자화상/들: 나의 39년 인생」은 시기마다 갈아입은 열 벌의 유니폼을 통해 작가의 39년 인생을 설명하는 작업이다. 유치원 원복부터 교복과 교련복, 군복과 예비군복, 민방위복이 시대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본래 옷은 개인의 기억과 경험이 깃드는 사적 사물이지만, 유니폼은 집단을 표상하고 통일감을 강조하는 공적 사물의 특성을 겸한다. 특히 교련복, 군복, 민방위복 같은 특수 제복들은 한국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역할까지 한다.
작가가 매거진 「W」와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에게 옷은 건축과 같다. 성북동 한옥과 뉴욕 아파트를 구석구석 측정해 한복 천으로 정교하게 떠낸 그의 전시 작품 「집 속의 집」처럼, 옷 역시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 성찰을 돕는 도구 중 하나다. 작가 자신의 옷이나 집에서 출발해 사회 공통의 기억으로 확장하고, 개인과 집단, 개인사와 시대사를 동시에 환기한다.
* 황선우, “‘서도호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W, 2012. 03. 29.
“소모된 사물은 그대로 사라져야만 하는 걸까”
이주요, 「가습기」 (1998-1999)
임시적이고 가변적인 일상 재료를 조합해 드로잉, 설치, 아트북, 공공조형물 등을 선보이는 이주요는 이번 전시에서 「가습기」를 부분 복원해 선보였다. 「가습기」는 이름처럼 춥고 건조한 환경을 견디기 위해 만든 가습 장치다. 1998년, 쌈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함께하던 선배 작가의 춥고 건조한 스튜디오를 위해 제작했는데, 마음에 들 때까지 여러 가지 모양의 가습기를 만드는 것을 반복했다고 한다.
「가습기」는 ‘물을 담는 용기’, ‘잘 젖는 천’, 그리고 ‘수분을 증발시키는 온풍 또는 난로의 열’로 구성된다. 각각의 공간과 환경에 맞춰 ‘물을 담는 용기’는 대야가 되거나 바가지가 되기도 하고 ‘잘 젖는 천’은 수건, 천, 스펀지로 재료가 가변적이다. 살림살이나 잡동사니라고 불릴 만한 평범한 사물들이 다소 허술하게 연결된 「가습기」는 수분을 뿜는 실용적 임무를 거뜬히 해낸다. 우리는 종일 사물의 한가운데에 산다. 이주요의 작품은 쉽게 사고, 쓰고, 버려지면서 우리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소모품들에 대한 감각을 확장하고, 예술이란 무엇인가 다시 질문하게 한다.
“일상적 사물도 작품이 될 수 있을까”
정서영, 「ㅡ어」 (1996)
벽면에 걸린 「ㅡ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익숙한 빛깔이다. 「ㅡ어」는 1990년대 한국 가정 인테리어에 흔히 쓰이던 바닥재인 황색 비닐민속장판 위에 소리글자 ‘ㅡ어’를 락카 페인트로 새긴 작품이다. 정서영 작가(앞서 이주요 작가의 작품 배경에 언급되었던 선배 작가다)가 비닐민속장판을 재료로 선택한 건 전통한지장판의 값싼 모방품이라는 점 때문이다. 우리 현실에 깊숙이 자리 잡은 모방품이 관습화, 고착화되어 삶의 일부가 되고, 때로는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의 발아래에 있던 특별할 것 없는 바닥재가 캔버스가 되어 미술관 벽에 걸리는 건 생경한 광경이다. ‘이것도 미술인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를 관람객에게 작품은 선수 치듯 ‘ㅡ어’라고 말한다.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초조하거나… 다양한 상황에서 쓰이는 감탄사인 ‘어’는 정서영의 작품 안에서 상황에 관한 결정을 보류하는 음성어로 표현된다. 사물과 미술, 회화와 조각, 모방과 창작, 저급 문화와 고급 문화, 일상과 예술 그 사이를 요리조리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가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은 채 ‘사물이 조각이 되는 비범한 순간’을 선사한다.
“사물과 예술의 경계선은 어디일까”
베르트랑 라비에, 「FM 400」 (1986)
베르트랑 라비에(Bertrand Lavier)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가다. 일상적인 오브제에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해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작업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프너(Haffner)사 금고 위에 브란트(Brandt)사 냉장고를 올려놓은 작품처럼 일상 사물을 ‘접붙이기(Graft)’하거나 기성 사물에 페인트를 칠하는 ‘페인티드 오브제(Painted Objects)’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라비에는 1980년 휴대용 라디오에 페인트를 칠한 「Solid state」를 선보인 이후 냉장고, 테이블, 가구 같은 가정용 제품부터 그랜드 피아노나 자동차 같은 대형 산업 제품에도 임파스토 기법*을 이용해 칠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전자레인지 위에 페인트를 덧칠한 작품 「FM 400」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을 보는 관람객은 생각에 빠진다. 페인트를 칠한 전자레인지는 회화인가? 조각인가? 금고 위에 올려놓은 냉장고는 사물인가? 작품인가? 그의 손길을 거친 사물은 본래의 기능을 잃은 대신 낯설고 아름다운 오브제가 된다. 주방용품을 예술로, 일상적 행위를 창조적 행위로 역전하는 순간에 주목한 라비에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삶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물의 면모를 깨닫게 된다.
*임파스토 기법: 물감을 두껍게 올려 입체적인 질감을 만드는 기법으로, 붓 자국이나 팔레트 나이프의 흔적이 살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흐, 렘브란트의 작품들에서 자주 사용된다.
글 김기수 기자
자료 제공 스페이스 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