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과 팝업의 조합은 별반 새롭지 않다. 대형 서점의 기획 섹션도 어찌 보면 일종의 팝업이었으니까. 더군다나 팝업이 온라인 숍만큼이나 대중화됐고, 텍스트힙으로 서점이 주목받는 시대라면 두 단어의 조합만으로 눈길을 끌긴 어렵다. 그 주체가 오선희 디렉터라면 경우가 달라지겠지만. 패션지에서 강산이 변하는 시절을 보낸 그는 패션 브랜드 ‘바이에딧’과 독립 출판사 ‘포엣츠앤펑크스’를 운영하는 대표이기도 하다. 주제를 관통하는 재료를 수집하는 작업은 어릴 적 하던 놀이에 가깝고, 대상이 책이라면 말할 것 없이 수월하다.
커리큘럼 서점을 팝업 형태로 정한 데에는 별난 의도가 없다. 팝업이 가진 유한성이나 유행을 의도한 건 더욱 아니다. 매달 이슈를 정해 발간하는 매거진처럼, 공간의 이슈를 만들기로 했다. 다만 1년에 세 번가량 변화하는 것을 고려 중이다. 적당한 호흡을 유지하기 위한 이유도 있고, 영국 런던과 서울을 오가는 그의 삶의 패턴에도 그게 맞다. 주기적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서울 삼청동 커리큘럼 서점에 다녀왔다.
공간이 품은 원시적인 아우라
안개꽃이 비스듬히 보이는 유리 출입문으로 세 단어가 적혀있다. Book, Kitchen, Garden. 커리큘럼의 공간을 이루는 키워드다. 책은 커리큘럼을 뒷받침하는 정체성이다. 오선희 디렉터가 알고, 좋아하고, 했던 일이기도 하다. 어떤 주제와 모임을 다루든 책은 존재감을 낸다. 이례적으로 느껴지는 키친과 가든은 오선희 디렉터가 유념했던 공간의 요건이다. 먹고, 마시는 건 그의 기호이자 현시대를 풍미하는 트렌드다. 포엣츠앤펑크스를 통해 편집한 〈에딧 파스타 쿡북〉, 〈에딧 샐러드 쿡북〉, 〈안주와 반주〉 등을 생각하면 수긍 가는 요소다. 작은 면적이지만 사방에 존재감을 주는 가든은 영원히 존경하고, 품고 싶은 한갓진 로망. 계절에 따라 여러 얼굴을 보여줄 예정이다.
인테리어는 주력을 다 하지 않았다. 필요 없었다. 그만큼 공간이 주는 힘이 분명했다. 공간에 끌려가는 생경한 경험을 했다는 오선희 디렉터는 후회 없이 마음을 주게 된 것도 처음이라 말했다. 두 눈으로 바라본 서점은 응당 그럴 만했다. 창으로 보이는 삼청동 전경과 채광만으로 충분하게 느껴졌다. 멋진 조명이나 디자인 가구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의도다. 자신의 취향인 양 멋 부리고 싶지 않았고, 공간을 이길 힘도 없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가구를 맡기면서 요구한 건 ‘1980년대에 집에 있던 리바트 가구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것. 백 년을 써도 영원히 괜찮을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를 원했다.
영양가 있는 만남
하나의 주제를 비교적 길게 가져가는 만큼, 여러 프로그램으로 시간의 빈틈을 채울 예정이다. 오선희 디렉터는 런던의 독특한 다이닝 문화인 서퍼 클럽(Supper club)을 서점에 적용했다. 서퍼 클럽은 소셜 다이닝의 한 형태로, 하나의 공간에서 소규모 식사를 하는 마케팅 창구이자, 소셜 네트워크를 만드는 문화다. 최근에는 내추럴 와인바 마나를 운영하는 이윤경 셰프의 음식과 함께 그가 추천하는 식문화와 관련된 책을 나눴다. 책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은 셈이다. 이건 서점의 이름인 커리큘럼과도 관련이 있다. 커리큘럼은 어떤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여정(Journey), 말이 달리는 코스(Course of race)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 앞으로도 그 인물이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무슨 여정을 거쳤는지 책을 통해 보여줄 생각이다. 추후 셰프, 기획자, 소믈리에, 베이커, 디제이, 가드너, 플로리스트 등 다양한 서사를 가진 이들과 함께 협업하며 서퍼 클럽을 이어 나갈 예정이다.
백 명의 소녀, 백 가지 대화
커리큘럼이 정한 첫 번째 주제는 〈The manner of girl〉. 소녀의 태도, 소녀의 방식, 소녀의 관점으로 고른 100여 종류의 책을 전시했다. 하나의 주제로 수집된 책들의 면면은 소녀의 미래처럼 방대하다. 전혜린과 최승자, 아무로 나미에와 뉴진스, 다이애나비와 엘리자베스 퀸, 케이트 모스와 샤를로트 갱스부르, 마녀 키키와 소공녀 세라가 대화를 나누듯 하나의 서가를 공유한다. 모든 책은 판매용이다. 신간과 구분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책을 여러 출판사 버전으로 두기도 한다. 소장의 기쁨이 있는 절판본과 희귀본도 다수다. 수량이 적은 책은 금세 동나기도 하지만, 꾸준히 새로운 희귀본을 들이고 있어 오히려 새롭다.
대부분 수집품은 그의 소녀 시절 안에서 영감받았다. 소녀 시절 읽던 문학, 혹은 소녀 시절에 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후회되는 문학. 저런 소녀 시절을 보냈으면 어떨까 싶은 동경의 모델… 중학생 때 등굣길 엘피 숍에서 봤던 미야자와 리에의 사진집 〈Santa Fe〉도 있다. 모두 그의 조각이다.
서점을 특별하게 만드는 작가 중 한 명은 전혜린이다. 독문 번역가이자 수필가였던 전혜린은 많은 소녀들의 동경이었다. 부모의 사상 문제와 시대감각의 부재로 외면받기도 했지만, 당시에 드러나지 않던 현대 여성의 심리를 모던하게 풀어낸 문장은 여전히 가치롭다. 현재 전혜린 작가의 모든 책은 절판된 상태다. 오선희 디렉터는 중고 책과 초판본 등을 구해 테이블에 두었다. 자라나는 소녀들에게 영원히 잊힌 작가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맘을 담았다.
글·사진 김기수 기자
취재 협조 서점 커리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