탭샵바에서 단 하루 머물렀을 뿐인데도, 여느 바에서 만나기 힘든 장면을 여럿 마주쳤다. 점심시간 가볍게 와인을 곁들여 식사하는 직장인들의 모습, 어른과 아이가 함께 앉아 차를 마시는 모습, 홀로 전자책을 읽으며 와인을 마시는 이의 모습…. 이 풍경들이 탭샵바가 누가 언제 찾더라도 편안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게 아닐지. 다양한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공간을 설계한 박수철 쓰쿠루 대표를 만났다.
Interview with 박수철 쓰쿠루 대표
— 쓰쿠루라는 사명이 인상적이에요. 이름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랜 팬이에요. 특히 군 시절에 만난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제 구원이었어요. 주인공 쓰쿠루가 옛 기억 속 친구들을 한 사람씩 찾아가면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요. 어쩐지 브랜딩의 전반적인 과정이 떠오르더군요. 브랜딩 일은 결국 스스로 답을 찾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또 일본어 ‘쓰쿠루(つくる, 作)’라는 단어에는 ‘만들다’, ‘디자인하다’라는 뜻도 담겨 있어서 이름으로 삼게 됐어요.
— 나기정 대표님과 탭샵바 프로젝트를 함께하면서, 어떤 공간을 만들려고 했어요?
그때까지는 와인에 아예 관심이 없었어요. 술을 마시지 않았고요. 탭샵바 프로젝트 이야기를 듣고 ‘술을 경험하는 공간’이라는 생각보다는 ‘오래 머무르고 싶은 공간’을 상상하게 됐어요. 내가 오래 머무르고 싶었던 공간에는 어떤 특징이 있었는지 곰곰 떠올려 봤죠. 탭샵바를 그런 곳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어요.
— 대표님이 오래 머무르고 싶은 공간엔 어떤 특징이 있었나요?
그런 공간 중 한 곳이 르코르뷔지에가 만든 빌라 사보아(Villa Savoye)예요. 그곳에 들어섰을 때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감동했죠. 그곳이 왜 그토록 좋았는지를 기억에서 되살리려 했어요. 탭샵바를 설계하면서 르코르뷔지에가 보여준 어떤 양식을 오마주하는 방식으로 풀어가보자고 생각했어요. 탭샵바의 메인 컬러는 빨강과 파랑, 노랑인데요, 르 코르뷔지에가 자주 사용했던 색이기도 해요. 영감의 대상 하나로부터 힌트를 얻어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일하는 방식을 좋아해요.
— 브랜드는 결국 사람들에게 특정한 이미지로 닿게 돼요. 탭샵바라는 브랜드는 어떤 이미지로 다가가길 바랐어요?
이미 존재하는 브랜드로 말하자면, 무인양품 같은 이미지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무인양품은 쉽사리 다가갈 수 있으면서도 세련됐어요. 그 지점에 놓인 브랜드가 많지 않아요. 무인양품처럼 탭샵바도 합리적인 가격을 중요한 마케팅 포인트로 삼을 계획이었는데, 합리적인 가격을 내세우면서도 제대로 설계된 공간이라는 느낌을 받도록 하고 싶었어요. 또 와인 자체가 이미 세련된 대상이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공간의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짜맞추지는 않았어요. 성긴 부분을 만들었죠.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이 부담 없이 들어오시길 바랐어요.
— 공간을 성글게 디자인한다는 건 어떤 의미죠?
시골 슈퍼마켓의 미감을 좋아해요. 어르신들이 오래 머물면서 편한 대로 물건을 툭, 툭 놔둔 것 같은데 조화를 이루거든요. 그런 공간은 자연스러워요. 누구나 쉽게 들어설 수 있고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훌륭한 팀파니 연주자는 모든 음을 완벽하게 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자신 역시 모든 문장을 완벽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면서요. 모든 문장이 완벽하면 읽는 이가 피곤할 뿐 아니라, 어떤 문장은 다른 문장을 강조하기 위해서 좀 덜어내야 한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공간 디자인에도 적용했어요. 이를테면 오와 열, 그리드 같은 요소를 완벽하게 짜맞춰 놓고 마지막에 좀 틀어버리는 식으로요. 도산대로점에 벽돌과 PVC를 함께 사용한 것도 그래서예요. 벽돌만 가득하면 자칫 공간이 더운 듯 느껴지기가 쉽거든요. 그래서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다른 소재를 함께 써서 밸런스를 맞췄어요.
— 도산대로점에 쓰인 주요 소재가 벽돌과 PVC였다면 동대문점엔 콘크리트와 스틸, 청계천점엔 목재가 두드러져요. 지점마다 주요 소재가 다른데, 그 선택은 어떻게 이뤄지나요?
장소가 정해지고 둘러보면서 떠오르기도 해요. 동대문점 자리에는 수많은 점포가 들어왔다가 철수하기를 반복했다고 해요. 그래서 공간에 이런저런 흔적이 많았어요. 바닥이 패여 있다든가, 콘크리트가 거칠게 마무리돼 있다든가요. 그 흔적들이 어쩐지 싫지 않았어요. 계획해서 만들 수도 없는 미감이라면 살려야겠다고 판단하고 어울리는 소재를 찾아 나갔죠. 마침내 거친 질감과 어울리는 콘크리트와 스틸을 주요 소재로 삼게 됐어요.
청계천점 자리는 이전에 카페였는데, 천장이 너무 낮았어요. 이렇게 천장이 낮은 공간이지만 덜 답답하게, 그러면서도 맥락은 있게 디자인해야 했어요. 그러다 ‘다락방’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렸어요. 다락방은 보통 천장이 낮지만 아늑하죠. 그곳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더욱 달고요. 다락방 같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고목을 중심으로 사이사이 금속을 더해 사용했어요.
—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벽돌과 PVC, 목재와 금속을 함께 사용할 소재로 엮은 선택은 흥미로워요. 완전히 거리가 멀어 보이는 소재들이 빚어내는 효과를 좋아해요?
충돌하는 것들이 만났을 때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나요. 탭샵바를 자주 찾는 어르신들이 꽤 많아요. 고객 연령층이 다양해요. 매우 세련되기만 했거나, 그 반대였다면 다양한 분들이 찾아주진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상충할 것 같던 요소들이 적절히 섞이면서 더욱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내죠.
— 공간 디자인뿐 아니라 탭 디스펜서와 가구 디자인, 웹 애플리케이션 디자인도 담당했어요. 특히 웹 애플리케이션은 내가 어떤 와인을 마셨는지 보기 좋게 기록돼 있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더군요.
흥겹게 술을 마시다 보면 내가 뭘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많잖아요. (웃음) 처음 탭샵바의 카피 후보 중 하나는 ‘당신이 어제 마셨던 와인, 우리가 기억할게요’였어요. 그 아이디어를 계속 떠올리면서 애플리케이션을 설계했어요.
— 일부러 성기게 조성하거나 러프한 채 그대로 둔 부분이 있지만, 조명과 사운드는 완벽하게 갖추려 한 것 같아요. 조명들이 범상치 않던데요.
고객들이 알아채시든 아니든, 그분들이 머무는 공간에 좋은 조명을 두고 싶었어요. 작은 감사의 인사랄까요? 르코르뷔지에에서 공간 콘셉트의 힌트를 얻었으니 이탈리아 오리지널 조명을 소개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유서 깊은 조명은 이 공간 안에 성글거나 러프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건 ‘의도적으로 디자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치로도 기능하리라고 봤어요.
— 조명과 스피커, 흡음 페인트 등은 모든 사람이 곧바로 느낄 수 있는 요소는 아니잖아요. 느끼지 못한 채 지나치는 요소일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요소에 공을 들이는 건,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인가요?
저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공간 자체가 주연인 장소들도 있지만, 제가 만들고 싶은 공간은 아니에요. 이곳에서 누군가는 사랑을 시작하거나 끝낼 수도 있고, 사업을 꿈꾸거나 도전을 마음먹을 수도 있잖아요.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있는 공간, 오래 남는 공간이 된다면 최대한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 쓰쿠루는 탭샵바뿐 아니라 또 다른 클라이언트들과 브랜딩 작업도 여럿 진행했어요. 어떤 브랜드가 좋은 브랜드라고 정의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진짜를 말하는 브랜드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꼭 데워지는 것 같아요. 투박하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브랜드는 생명이 길더라고요. 사실 디자인은 거들 뿐이라고 생각해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해야 한다고 자주 생각하죠. 그래서 탭샵바를 작업하면서도 ‘대화하는 시간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공간’이라는 메시지를 끝없이 상기했어요. 나기정 대표님과 무수한 대화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 메시지에 자연스레 공감하게 되었죠.
— 이야기하다 보니, 대표님이 좋은 공간이라고 느낀 또 다른 장소 얘기도 듣고 싶네요.
에이스 호텔을 좋아해서 거의 모든 지점에 가봤어요. 그중에서도 교토점은 충격적이었어요. 이런 공간이 브랜딩이 잘 된 공간이구나, 하고 절실히 느꼈어요. 방에 딱 들어서면 굉장히 미국인데 또 굉장히 일본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미국의 라이프스타일을 정말 일본 방식으로 풀어냈더군요. 그곳에서는 설계해 둔 대로 그저 움직이기만 해도 완벽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 file no.4 :
한눈에 보는 탭샵바
숫자로 보는 탭샵바
8mm
탭샵바에서 흘러나오는 영상 규격
탭샵바 도산대로점에는 대형 영상 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스크린에는 해외 곳곳의 풍경이 이어지는 영상이 재생되는데, 이는 스톡 영상을 쓰쿠루가 편집해 제작한 것이다. 영상의 규격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8mm 캠코더 카메라에 맞췄다. 그 외에도 박수철 쓰쿠루 대표는 탭샵바 공간 곳곳에 클래식한 요소를 더했다. 펜로즈 삼각형 형태의 탭샵바 로고에 쓰인 폰트 역시 과거 타이포그래피에 사용됐던 모노폰트다.
30분
서울 전역으로 와인을 배송하는 데 걸리는 시간 목표
탭샵바는 현재 동대문, 청계천, 도산대로점에 들어섰고 곧 여의도점을 오픈한다. 교통의 요지에 입점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서울 전역 와인 딜리버리 서비스를 계획 중이기 때문이다. 1시간 안에 배송이 이뤄지는 것이 첫 목표이고, 최종적으로는 30분 이내 배송하는 게 목표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소한 10개의 지점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한다고.
9년
나기정 탭샵바 대표와 박수철 쓰쿠루 대표의 인연
나기정 대표는 창업 초창기 박수철 대표와 연을 맺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와인을 마시지 않던 박 대표는 나 대표보다 와인을 더 자주 마시는 사람이 됐고, 와인이 주는 기쁨을 즐기게 됐다. 탭샵바의 브랜딩과 디렉팅을 박 대표가 담당하면서, 나 대표는 그가 하는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고. 나 대표는 박 대표를 “100% 믿는다”라고 말했다. 믿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 혹은 일하는 사람을 믿어주는 것이 나 대표의 방식이다.
1000여 종
탭샵바를 통해 구매할 수 있는 와인 보틀의 종류
탭샵바에서 아웃렛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와인 보틀의 종류는 1천여 종이 넘는다. 나기정 대표가 쏟은 시간에서 비롯한 노하우 덕에 가능했다. 와인 전문 큐레이터가 와인 리스트를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한다. 샵에서 산 와인 보틀을 바에 앉아 추가 요금 없이 즐길 수 있다. 탭 해 마신 와인이 마음에 든다면, 그 자리에서 보틀로 구매해 마시는 일이 가능하다.
Scrap
와인과 편히 곁들일 요리들
1. 오이스터
매일 통영에서 직배송해 공수하는 삼배체 굴은 탭샵바의 대표 메뉴다. 삼배체 굴은 다른 굴보다 통통하고 크다. 양식으로 길러지기 때문에 독성이 없다고. 탭샵바의 직원들의 첫 일과는 굴 손질로 시작한다. 하나하나 깨끗하게 껍데기를 손질하는 데만 두 시간 이상이 걸린다. 신선한 바다 향을 좋아한다면 프레쉬 오이스터를, 구운 굴의 녹진한 풍미를 좋아한다면 그릴드 오이스터를 선택할 것. 레몬과 소스가 함께 나온다.
2. 그릴드 알배추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 음식을 추구한다는 탭샵바. 그 성격을 잘 드러내는 메뉴 중 하나다. 과한 소스를 사용하지 않고 그저 실한 알배추에 그라나파다노 치즈를 올려 맛있게 구워냈다.
3. 항정살 구이와 알배추쌈
허기질 때 선택하면 좋은 푸짐한 메뉴다. 두툼하게 썰어낸 항정살과 향긋한 루꼴라의 조합이 잘 어울린다. 잘 구운 버섯과 신선한 알배추는 끊임없이 입맛을 돋군다.
4. 토마토 블루베리 부라타
나기정 대표는 부라타 치즈와 와인을 즐기는 공간인 ‘부라타랩’을 함께 운영 중이다. 높은 퀄리티의 부라타 치즈를 직접 만드는 데도 오랜 시간을 쏟았다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탭샵바에서도 훌륭한 부라타 치즈를 활용한 메뉴를 선보인다. 절인 토마토와 블루베리 콩포트, 부라타 치즈의 궁합이 산뜻하다.
5. 알감자 루꼴라 샐러드
알감자와 반숙한 달걀, 루꼴라와 베이컨, 랜치소스가 한데 어우러진 메뉴.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면, 익숙한 재료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낯선 풍미를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끝
글 김유영 기자
사진 표기식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탭샵바, 쓰쿠루
프로젝트 캐비닛은 참신한 기획과 브랜딩, 디자인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헤이팝 오리지널 시리즈 입니다. 격주 목요일, 영감을 주는 프로젝트들을 꺼내 보세요.
[Project Cabinet] 당신의 곁에 와인 한 잔을, 탭샵바
: file no.1 : 탭샵바에서 보낸 하루
: file no.2 : 와인으로 꾸는 꿈
: file no.3 : 하나쯤 비틀어 빚은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