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업 회사 현현의 손길이 닿은 장소라면 공통으로 등장하는 메시지가 있다. “오늘도 성심으로”. 긍정적인 에너지와 섬세한 시선을 지닌 직원들이 정성으로 손님을 대하는 것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장 콘셉트와 주력 메뉴에 관계없이 일관되게 추구해 온 브랜드 정체성이다. 사색과 대화의 장을 지향하는 필로소피 라운지는 현현의 10번째 직영 매장으로 지난 7월 충무로에 문을 열었다. 우아한 위스키와 디저트를 차분한 라운지 바에 담아 선보이는 이 공간 역시 세심한 배려를 통해 낯선 경험의 문턱을 낮추는 중이다.
interview 현현, 하덕현 대표
포토그래퍼로 활동하다 2012년 성균관대 앞에 칵테일 바 ‘인생의 단맛’을 오픈했다. 이후 ‘독일주택’과 ‘수도원’을 거쳐 2017년에는 주식회사 ‘현현’을 설립했다. “세상에 필요한 서비스를 만들자”를 모토로 F&B ・ 주거 ・ 문화 등 즐거움과 편리함을 제공하는 공간을 기획하고 운영하며, ‘리퀴드유니온’이라는 이름의 창업 컨설팅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다
ㅡ 그간 현현이 전개해 온 F&B 매장은 명륜동, 옥인동, 운니동 등 서울 종로 일대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번에 오픈한 필로소피 라운지는 처음으로 충무로와 을지로 지역에 진출했네요.
혜화에서 장사를 시작하면서 주거지도 이쪽으로 옮겼는데요. 살아 보니 종로 일대가 너무 좋더라고요. 제가 살던 울산보다 이곳이 더 고향처럼 느껴졌어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면 오래된 동네이면서 개성 있는 골목들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와 비슷한 분위기의 동네들로 조금씩 넓혀가고 있어요. 작년에는 ‘헌술방’으로 성북구에, 올해는 이렇게 중구로 진출한 것에 의미를 둡니다.
ㅡ 매장을 준비할 때 장소가 품은 맥락과 동네의 분위기를 중요하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내부적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할 여력이 된다 판단하면 특정한 목적과 아이디어 없이 여러 장소들을 찾아다니는 편입니다. 좋은 기운을 가진 공간을 둘러본다고 할까요. 매장을 준비할 때 언제나 출발점이 되는 건 장소성이거든요. 상권 개념 이전에 동네 ・ 골목 ・ 장소의 분위기가 어떤지, 여기에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지를 보려고 해요.
ㅡ 지금의 필로소피 라운지 자리는 어땠나요?
처음 봤을 때부터 아우라가 느껴졌어요. 좁고 낡은 골목 풍경, 오랜 시간 인쇄 공장으로 사용해 왔다는 히스토리, 널찍한 면적과 단차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나뉘는 구조 같은 것들이 인상적이었죠. 마음속에 오래 품었던 ‘사색과 대화를 위한 라운지 바’라는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ㅡ 건축 회사 ‘soje’와의 협업을 통해 공간을 완성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작업이 이뤄졌나요?
현현이 기본 콘셉트와 전반적인 아이디어를 전달한 뒤 soje와 함께 발전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작업했습니다. 저희는 인테리어 전문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매장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줄 수 있는 피드백에 신경 썼어요. 운영과 영업의 데이터를 축적해 온 팀으로서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동선, 가구 배치, 기물의 소재 등 미적으로 아무리 멋지고 근사해도 실제 사용할 때는 불편하거나 비효율적인 부분이 발생하기 마련이니까요. 이런 의견 차이를 조율하는 게 중요해서 전적으로 맡기는 대신 콜라보 형태로 진행했습니다. soje 역시 그런 특수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회사이기에 함께 잘 마무리할 수 있었죠. 내부적으로는 기획 과정에서 제 비중을 많이 줄였어요. 아이디어 정도만 제시하고 이후에는 팀원들과 치열하게 회의하며 가닥을 잡았습니다. 프로젝트 매니징부터 시그니처 위스키 개발, 플레이리스트 세팅 등 저 대신 능력 있는 팀원들이 담당자를 맡아 멋지게 완성해 줬습니다.
ㅡ 그냥 위스키 바가 아닌 ‘위스키 & 디저트 바’를 표방하는 매장입니다. 위스키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면 술을 달콤한 디저트와 먹는다는 게 잘 상상이 되지 않을 듯한데요. 또 하나의 메인 아이템으로 디저트를 고른 이유가 있을까요?
일단 둘의 궁합이 꽤 괜찮고요. 인근 상권을 고려한 전략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매장이 위치한 명보극장 먹자골목에는 이미 맛집이 많거든요. 다른 안주류보다는 디저트에 집중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무엇보다 저희가 주류를 다루는 공간을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건전함과 낮은 문턱이에요. 안국역 부근의 위스키 바 ‘법원’을 오픈하고 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위스키 바에 왔다는 손님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디저트와의 조합을 통해 위스키가 가진 고정적인 이미지(비싸다/중년/남성적)를 희석하고 싶었어요.
ㅡ 위스키 외에 다양한 주류 메뉴를 마련해 선택지를 넓힌 것 역시 위스키 바의 문턱을 낮추기 위한 방안일까요?
손님들이 현현의 공간에 왜 방문할까를 생각해 보면 식당에 가듯 특정한 무엇을 먹으러 오는 것 같진 않아요. 분위기를 즐기러 오는 거죠. 매장마다 대표 주류가 있지만 손님 중에는 독한 술을 못 마시는 분도, 술을 아예 마실 수 없는 분도 있을 거잖아요. 실제로 저희 매장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오거나 자녀와 함께 찾는 경우도 많아서 모두가 편하게 어울려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신경 쓰고 있습니다.
ㅡ 직원을 부를 수 있는 호출 벨, 사진과 설명이 쉽고 명확하게 담긴 앨범형 메뉴판, 휴대폰을 넣어두고 대화와 사색에 집중하라 권유하는 나무 보관함까지 요즘 위스키 바에서 보기 어려운 깨알 같은 요소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이런 디테일한 장치들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나 이미지는 무엇일까요?
인테리어 이상으로 신경 쓰는 게 서비스 디자인이에요. 공간의 분위기, 손님들의 편리함, 일의 효율성 등을 감안해 만들고 있죠. 해외여행 중 레스토랑을 가거나 고급 음식점에서 주문할 때 용어들이 낯설거나 주눅 들어서 가격만 대충 보고 주문해 보신 적 없었나요? 스태프들이 바빠 보이거나 뭔가를 물어보는 게 부끄러운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메뉴판만 봐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되도록 상세한 설명과 사진이 있는 메뉴판을 만들고 있습니다.
필로소피 라운지라고 이름을 정하고 나서 필로소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는데요. 저는 귀여운 유머로 지은 이름이지만 누구는 단어 그대로 철학으로 받아들여 무겁게 느끼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온 결론은 ‘우리가 지레 필로소피를 정의하지 말자’였어요. 대신 모래시계나 메모가 가능한 코스터, 휴대폰 박스, ‘담화’라는 웰컴 티, 차분한 무드의 플레이리스트 등으로 사색과 대화라는 키워드를 간접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꼭 휴대폰을 박스 안에 넣지 않더라도 이를 보고 어떤 영감을 떠올리는 것 정도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요.
ㅡ 성수동이나 한남동, 도산공원 등 요즘 핫하다는 지역에서는 현현의 직영 매장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매출과 유동 인구와 인지도 같은 요소를 고려하면 핫플레이스에 매장을 내는 것에 대한 내부적인 고민과 논의가 없지 않을 것 같은데요.
네 번째 가게를 오픈하고 나서 문득 깨달은 건 우리 맞은편에 가게가 없다는 점이었어요. 앞에서 종로를 좋아한다고 얘기한 것처럼 기본적으로 오래된 동네와 조용한 골목을 좋아해요. 그리고 새로운 공간을 찾을 때 권리금이 없고 빈 곳을 찾다 보니 핫한 지역에는 매장을 내기가 어려웠던 것도 있습니다. 부동산이 워낙 비싸잖아요.
ㅡ 매번 권리금 없는 빈 곳을 찾아 근사한 매장으로 탄생시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작업 기간을 넉넉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중요한 조건이 있거든요. 보통은 공간 도면을 그리고 렌더링 이미지를 만들어 공사를 시작하잖아요. 현현은 마치 복원 사업을 하듯이 접근하는 편입니다. 이 자리에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해서, 하나씩 확장하며 공간을 채워 나가는 식이죠. 계약하고 나서 한 달 정도는 공간에 별다른 작업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둬요. 틈틈이 오가면서 뭘 하면 좋을지 계속 그려보거든요. 낮에도 오고 밤에도 오고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살펴보다가 이런저런 그림을 얹혀보면서 이때 나오는 단서들을 가지고 퍼즐을 맞춰가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비워진 곳이나 잘 활용되지 않고 있는 곳을 보면 창작 욕구가 생기는 편이에요. ‘여기서는 뭘 하면 사람들이 찾아올까?’ 아무래도 기간을 많이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방식인데요, 이렇게 완성된 복원과 창작이 뒤섞인 공간을 보고 손님들이 종종 오래된 가게 같다고 해주세요. 그 말을 들을 때의 기쁨과 슬픔이란. (웃음)
ㅡ 흥미로운 스토리와 세련된 공간 디자인, 감각적인 굿즈, 친절하고 다정한 응대, 개성 있는 창작 메뉴… 이걸 다 갖추고도 몇 년 버티지 못한 채 사라지는 가게가 너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현현이 10년간 오픈한 다수의 매장 중 단 한 곳을 제외한 모든 매장은 여전히 성업 중이에요. 이렇게 오랜 시간 다양한 매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매장의 성공 여부는 90%가 운영이라고 생각합니다. 멋진 인테리어와 디자인은 처음에는 주목받을 수 있겠지만 결국 운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려워요. 저희가 가장 많은 실패를 하고 노하우가 있는 쪽도 운영이에요. 현현이 공간을 기획할 때는 ‘5년, 10년이 지났을 때 이 공간은 어떨까’ 생각해요. 낡지 않고 깊어지는 공간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이 재료와 디자인에 영향을 끼칩니다. 가전기기, 조명, 손님이 사용하는 물컵 같은 걸 정할 때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방법 중에 최고’를 선택하려고 해요.
ㅡ 온라인상에서 ‘인스타 카페’ 풍자 밈이 회자될 정도로 사장과 직원의 응대에 민감한 시대입니다. 접객에 있어서 매장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점이 따로 있나요?
호스트 마인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 공간의 호스트고, 여기에 초대된 사람들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는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현현 멤버들이 공유하는 문화 중 하나가 OMS(One More Service)인데요. 손님 입장에서 무엇이 좋을까를 스스로 고민하며 기분 좋은 덤을 제공하는 자발적 서비스입니다. 사내 메신저에 매일 올라오는 다양한 OMS를 보며 자주 감동하곤 해요.
ㅡ 손님에게 하나라도 더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걸 서로 나누는 문화라니 너무 멋진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궁금합니다.
최근에 ‘법원’에 한 아버지와 딸이 각자의 일행과 방문한 적이 있었대요. 아버지가 나가기 전에야 딸을 발견하고 그쪽 테이블까지 같이 계산하려고 한 거예요. “여기서 제일 예쁜 손님 테이블까지 같이 결제해 주세요.” 그랬더니 저희 팀원이 바로 “어느 테이블인지 압니다” 하고 받아치면서 계산을 마쳤다는 거죠. 너무 유쾌하고 섬세하지 않나요? (웃음) 이렇게 오늘 본인이 한 OMS를 퇴근하면서 메신저에 기록합니다. 있으면 쓰고, 못 했거나 기억이 안 나면 쓰지 않아도 돼요. 오래 일한 분들은 그게 몸에 배었는지 ‘오늘은 한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집에 갔더니 엄청 생각나더라’ 하는 경우도 흔해요.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배려와 환대가 자연스럽게 퍼지는 것 같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OMS를 보면서 영향받는 모습이 신기하죠.
ㅡ 현현은 F&B, 공간 디자인, 브랜딩 같은 표현에 앞서 ‘서비스업 회사’라는 수식어를 사용합니다. “세상에 필요한 서비스를 만들자”라는 구호를 강조하기도 하죠. 현현이 생각하는 세상에 필요한 서비스란 무엇인가요?
얼마 전에 회사會社와 사회社會의 한자를 찾아봤는데요. 순서만 다르지 같은 글자더라고요. 결국 좋은 회사나 좋은 서비스를 만드는 건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필로소피 라운지 공사 중에 화재가 난 적이 한 번 있어요. 자칫하면 큰 사고로 번질 뻔했던 상황에 처해 보니 뼈저리게 느꼈죠. ‘명분이 없는 일은 고난에 취약하다.’ 내가 뭘 해보려고 하든 이미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시도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피해들이 발생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꼭 납득할 만한 명분을 찾으려고 해요. 이게 정말 세상에 필요한 일인가. 제한적인 에너지와 재화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TPO
현현 하덕현 대표가 추구하는
‘세상에 필요한 서비스’를 선보이는 공간
경북 안동에 위치한 복주회복병원입니다. ‘존엄케어’*를 실천하기 위해 4무 無 (냄새 무, 낙상 무, 와상 무, 욕창 무) 2탈 脫 (탈 기저귀, 탈 억제대)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요양병원이에요. 작년에 저도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셔서 이런 병원의 필요성을 더 절감하기도 하는데요. 특히 환자뿐만 아니라 병원 직원들의 존엄과 업무 만족도를 두루 고려한 서비스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기술이나 감각 이전에 이런 섬세한 마음이야말로 차별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결국 서비스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겠죠.
* 존엄케어 : 어르신들의 존엄성 회복을 위하여 병원중심케어에서 환자중심케어로의 변화로 개별적 특성을 파악하고 필요한 만큼의 케어를 제공하는 것 (출처 : 복주회복병원)
프로젝트 캐비닛은 참신한 기획과 브랜딩, 디자인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헤이팝 오리지널 시리즈 입니다. 매주 목요일, 영감을 주는 프로젝트들을 꺼내 보세요.
[Project Cabinet] 사색과 대화의 거실, 필로소피라운지
: file no.1 : 오래된 골목의 위스키 & 디저트 바
: file no.2 : 세상에 필요한 서비스를 고민하는 일
글 김정현 객원 필자
사진 표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