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efing
서울 정동길은 한국 근현대사의 흔적이 촘촘히 쌓인 거리다. 19세기 말 미국·러시아 공사관을 비롯해 배재학당·이화학당이 나란히 자리하며 신문물이 가장 먼저 싹텄다. 이곳에서 국립정동극장은 1908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의 정신을 잇는다. 이는 단지 건물의 외형에 국한되지 않는다. 야외 마당의 판소리를 실내 무대로 옮겨 ‘창극’을 탄생시킨 국창 이동백의 예술적 이념을 계승하여 다양한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정동의 레퍼토리는 〈광대〉, 〈단심〉 같은 K-컬처 시리즈부터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같은 실험적인 창작극까지, 전통과 창작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든다. 상업적 기준보다 작품의 의미와 ‘정동극장다움’에 무게를 둔 시도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남겼다. 개관 30주년이었던 지난해(2025년), 역대 최다인 8만 3천 명의 관객이 이곳을 찾았고, 유료 관객 유치가 쉽지 않은 전통극을 50회 이상 장기 공연하며 내실을 다졌다. 헤리티지와 실험적 시도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국립정동극장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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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화유산 1번지’라는 정체성
국립정동극장의 정체성은 100년 전 ‘혁신’에 뿌리를 둔다. 1908년 탄생한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는 마당의 판소리를 실내 무대로 가져와 여러 배우가 배역을 나누어 맡는 ‘창극’을 선보인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관객의 시선을 한곳으로 모으고 조명과 동선을 설계했던 이동백 명창의 시도는 오늘날 국립정동극장이 지향하는 ‘전통의 현대화’로 이어진다.
이러한 철학은 근대사의 주요 장면을 모티브로 정동만의 레퍼토리로 구체화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용사이자 최초로 쌍꺼풀 수술을 했던 인물을 다룬 뮤지컬 〈아이참〉, 근대 소록도의 이야기를 담은 음악극 〈섬:1933~2019〉, 3.1 운동을 보도한 앨버트 테일러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딜쿠샤〉 등이 대표적이다. 과거의 역사를 단순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동’이라는 장소성을 바탕으로 근대의 인물과 풍경을 동시대적 감각으로 복원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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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을 줄여 확보한 무대와 몰입감
국립정동극장의 공간은 제약 속에서 최선의 관람 경험을 찾아낸 결과다. 주변 환경 특성상 무대를 뒤로 확장하거나 지하 시설을 추가할 수 없었고, 한정된 면적 안에서 충분한 무대 높이와 좌석 배치를 함께 확보해야 했다. 그 결과 객석 단차는 일반 극장보다 가파르게 설계됐다. 다만 이 단차는 앞사람의 방해 없이 무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만들며, 깊은 몰입감으로 이어진다. 개관 10주년 리노베이션 당시에는 400석이던 좌석을 326석으로 과감하게 줄여 관객 한 명이 누리는 여유도 넓혔다. 동일한 좌석 수 대비 넓게 느껴지는 무대와 관람의 밀도는 이제 국립정동극장만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중앙 홀에는 한옥의 마루와 창살 구조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배치돼, 원각사의 이념을 계승해왔다는 사실을 공간에서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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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생명력을 연장하는 창작 선순환 구조
국립정동극장은 단순히 무대를 빌려주는 대관 극장을 넘어, 작품을 직접 기획하고 제작하는 ‘제작 극장’으로 운영된다. 특히 최근에는 작품이 단발성 공연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돕는 ‘창작의 컨베이어 벨트’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세실극장에서 발굴된 실험적인 신작들이 사장되지 않고 안정적인 레퍼토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정교한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이를 통해 작품의 내실을 다지고, 시장 경쟁력을 갖춘 레퍼토리로 진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뮤지컬 〈적벽〉또한 창작ing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정통ing 사업을 통해 국립정동극장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창작뮤지컬 〈딜쿠샤〉와 연극 〈굿모닝 홍콩〉도 창작ing 사업을 통해 국립정동극장에서 장기 공연을 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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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생명력, K-컬처 시리즈
전통 예술의 시장 점유율은 공연계 전체 매출의 약 2% 내외(예술경영지원센터 조사 기준)에 불과하다. 대다수 공연이 며칠 만에 막을 내리는 현실에서, 전통극 50회 이상의 장기 공연은 시장의 한계를 넘어선 성과다.
전통을 동시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공연이 그 동력이다.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 등에서 한국의 미를 알린 〈단심(丹心)〉은 한국 춤에 LED 월과 미디어아트를 결합해 몰입감을 높였고, 전통 연희에 현대적인 서사 구조를 도입해 극적 재미를 살린 〈광대〉 등의 작품이 더해지며, 동시대적 예술로 자리매김했다. 국립정동극장의 행보는 공연계에서 가장 취약한 장르의 저변을 넓히는 동시에, 우리 전통이 세계적인 콘텐츠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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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정동극장의 미래
공간은 이제 또 다른 전환점을 앞두고 있다. 2029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인 재건축 사업은 고유한 정취를 유지하면서도 공간의 효용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가장 큰 변화는 객석 규모다. 현재의 326석에서 550석 이상의 중극장 규모로 무대와 객석을 대폭 확대하여, 더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예정이다.
외관 설계는 국립정동극장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전통 창살 문양처럼 극장의 고유한 특징은 그대로 살리면서도, 정동길의 상징인 붉은 벽돌 건물들과 어우러지도록 주변과의 조화를 고려할 계획이다. 특히 기존에는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중명전이 보일 수 있게 시야를 확보하여, 극장 내에서도 정동길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글 김지오 기자
사진 강현욱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국립정동극장
프로젝트 캐비닛은 참신한 기획과 브랜딩, 디자인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헤이팝 오리지널 시리즈 입니다.
[Project Cabinet] 국립정동극장, ‘근대문화 1번지’의 헤리티지를 이어오다
: file no.1 : 제약 속에서 만들어낸 ‘정동극장다움’
: file no.2 : 헤리티지를 넘어 창작 플랫폼으로
: file no.3 : 작품으로 읽는 국립정동극장 30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