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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0

도시인을 위한 최소한의 리트릿, 페즈 ②

경쟁하지 않는 무언의 상업 공간

정성을 들인 결과물은 기본적인 것에서 티가 난다. 이를테면 일관된 방향성이나 디테일 같은 것들. 페즈는 임종현 대표가 4년 넘게 구상하고 준비한 공간이다. 단단한 기준점을 세우고 걸어온 덕에 흔들리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 안에 쏟은 정성은 전혀 관계없는 사람도 감흥을 느낄 정도였는데, 비장하지 않고 오히려 낙천적으로 느껴진 건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웠기 때문일 거다.

페즈는 일주일에 두세 번, 건물을 구석구석 소개하는 도슨트를 연다. 주말이면 건축주인 임종현 대표가 직접 나선다. 공간을 선보인 지 100일이 채 되지 않았지만, 페즈는 그보다 많은 이야기와 가능성을 품고 있다.

Interview with

임종현 페즈 대표

ㅡ 아직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페즈를 프로젝트 캐비닛으로 섭외한 건 대표님이 브런치에 작성한 글 때문이었어요. 영감 레퍼런스와 작업 과정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더라고요.

브런치 글은 홍보를 위한 건 아니었어요. 우리가 추구하는 콘셉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명확하게 정리하는 과정이었죠. 진행하다가 빗나가려는 순간이 오면, ‘아니야, 돌아가자. 우리가 하려던 건 이런 거였잖아’하면서 돌아올 수 있는 일종의 기준점을 세운 거예요.

ㅡ 페즈에 대해 알려면 먼저 ‘디지털다임’에 대해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페즈는 마케팅 회사 디지털다임의 사옥이기도 하죠.

디지털다임은 제가 1998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회사예요. 저는 무엇이든 아이덴티티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데요. 우리 회사를 소개할 때는 ‘인터렉티브 컴퍼니’로 말하고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인터렉티브는 고객사와 관계가 될 수도 있고, 고객사와 소비자의 관계를 도와 일과 삶을 향상 시키는 방향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런 기준을 바탕으로 정말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이어왔어요. 잘 해내고 있는 메인 비즈니스를 유지하면서 해외 부동산 세일즈 마케팅도 하고, 여행 관련 앱과 모바일 게임도 제작해 봤죠.

ㅡ 페즈도 디지털다임이 해왔던 여러 작업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겠네요.

고객사를 두고 콘텐츠를 만드는 에이전시에겐 언젠가 갈증의 순간이 와요. 우리만의 브랜드나 작업을 해볼 수는 없을까 하고요. 게다가 저희는 90년대부터 디지털을 기반으로 일해왔던 곳이잖아요. 디지털 패러다임은 지나갔고 ‘온라인’이라는 단어조차 감흥이 없어진 시대가 되면서 오히려 오프라인 경험이 중요해졌어요. 사실 오프라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온라인이 등장하고 생긴 상반된 개념이긴 하지만요.

ㅡ 디지털다임을 조사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직원들이 일하는 장소를 자율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부터 재택근무제를 도입했다고요.

해외에서 에어비앤비를 운영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체크하는 게 뭔지 아세요? 인터넷 환경이에요. 디지털 노마드였던 거죠. 업무차 발리나 치앙마이 같은 도시에 갈 때마다 정말 많은 코워킹 스페이스를 봤어요. 일하는 시간과 아웃풋만 있으면 되지, 공간에 대한 제약을 줄 이유가 있나 싶더라고요. 관련 정보를 공부했고,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어요. 반응이 어땠을 것 같아요?

ㅡ 저라면 좋아했을 것 같은데요(웃음).

직급이 낮을수록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높은 사람일수록 불안함을 느꼈어요. 눈에 보여야 관리가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습관이 타성이 된 거죠. 그런데 이미 대표인 나조차 매일 해외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는데 못할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부서별로 순차적으로 적용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가 터졌어요. 덕분에 셧다운 같은 혼란 없이 평상시처럼 업무를 진행할 수 있었어요.

ㅡ 페즈를 만들 수 있던 것도 어찌 보면 직원들이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겠네요.

재택근무가 일반화되면서 사무실이 많이 비워진 상태였어요. 사옥이 낡아 리모델링이 필요한 상태였고, 어떻게 하면 공간을 추가로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죠. 기존 사옥이 가진 업무 용도는 최소화하고 공공의 기능을 늘렸어요. 그리고 그 안에서 비즈니스 영역을 찾으려고 했고요.

ㅡ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어요. 초기 설계 단계에 있던 음식점과 코워킹 스페이스가 갤러리 공간으로 대체됐잖아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음식점이나 숍이 없어서 수익이 생길까 싶었어요.

수익을 계산하면서 공간을 설계한 게 아니라, 당연히 수익이 생길 거라 생각하고 공간을 만들었어요. 식당이나 숍이 없는 건 공간을 가득 채우면 오히려 활동에 제약이 생기기 때문이에요. 두 개의 층이 연결된 갤러리는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공간이에요. 중요한 건 어떤 사람이 모이느냐, 이죠. 저희의 역할은 진정성을 갖고 좋은 프로그램과 콘텐츠를 쌓는 것이에요. 동네 주민들이 꾸준히 찾는 커뮤니티가 형성되면 이 공간에서 비즈니스를 할 브랜드는 분명 생겨요.

ⓒ페즈

ㅡ 페즈는 동네 주민들이 찾는 ‘커뮤니티 몰’을 지향하고 있어요. 커뮤니티 몰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낯선 개념이에요.

태국 방콕에 있는 ‘더 커먼스’가 대표적인 커뮤니티 몰이에요. 더 커먼스에는 맥도날드나 스타벅스 같은 글로벌 브랜드가 없어요. 대신 로컬 최고의 장인 생산자와 레스토랑이 있어요. 밤낮으로 아이와 어른을 위한 프로그램이 열리고, 동네 주민들은 반려견 산책 중에 잠시 들러 그곳에서 만난 이웃과 인사해요. 여행객도 많지만 주류는 언제나 주민들이죠. 그 분위기가 참 좋더라고요.

ㅡ ‘복합문화공간’과의 차이점은 지역 커뮤니티의 유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죠. 지속 가능한 상업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고객보다는 지역 주민들이 우선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고 봤어요. 처음부터 ‘빵’ 터뜨리는 것을 조심한 이유이기도 해요. 그럼 주민들은 자신이 방문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거든요. 개인적으로 오픈 행사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요. 처음 뵙는 중년 여성분이 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시는 거예요. 무슨 일인지 여쭤보니 동네에 이십 년을 넘게 살았는데, 주민을 위해 공간을 오픈하는 걸 처음 봤다고 하더라고요. 페즈가 가진 의미를 알아봐 주신 것 같아 뭉클했어요.

ㅡ 한남동 골목에 위치하고 있어요. 건물 외형만 보고는 대로에 있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생각보다 좁은 골목에 있어서 놀랐어요. 위치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요?

사람들은 대로변을 좋아하진 않아요. 오히려 이야기가 있는 골목을 좋아하죠. 우리 영동대로 구경하러 가자, 이러지는 않잖아요(웃음). 페즈가 있는 한남동에 대해서도 언급하자면, 굉장히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는 특성이 있어요. 청담동이나 홍대를 떠올려보세요. 지역이 가진 특유의 계급과 문화가 뚜렷하게 구분되잖아요. 이태원을 포함한 한남동 일대는 재벌, 외국인, 성소수자 등 섞이지 않을 것 같은 그룹이 오랜 시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유지해 온 포용의 도시에요. 커뮤니티가 형성된다면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재미있는 공간이 될 거예요.

ㅡ 공간 안에서도 배려와 포용의 기운이 느껴졌어요.

느끼셨을지 모르지만, 페즈 안에는 무언가를 통제하는 메시지가 없어요. 하다못해 담배를 피우지 말라거나 화장실에 무언가를 버리지 말라는 것도요. 한두 문장으로 누구를 가르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저 자연스럽게 행동을 유도하고 싶었어요. 얼마 전에는 주민분들이 갤러리에 앉아 보드게임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안 되는 건 없어요(웃음). 알아서 공간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사용 설명서를 만든다고 생각해 주세요.

(좌) 광장에 있는 한원석 작가의 Norwegian Wood(The Bird Has Flown). 철관을 통해 새 소리가 들린다.

ㅡ 뮤직 라이브러리, 리트릿 스페이스, 생태 공원… 방법은 다르지만, ‘리트릿’이라는 하나의 결을 갖고 있어요. 이유가 있나요?

넷플릭스 〈블랙 미러〉 시리즈 중에서 ‘스미더린’이라는 에피소드를 보면 많은 이들을 소셜미디어 중독으로 만든 CEO가 아이러니하게도 고립된 사막에서 묵언수행을 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도 디지털 디톡스를 위한 리트릿 공간이 필요했던 거죠. 그런데 리트릿을 하려면 저렇게 고립된 환경이 필요한 걸까요? 누구나 자연으로 떠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도심 안에서도 나만을 위한 힐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취향을 찾고, 하늘을 보고, 요가와 명상을 하는 시간이 대단한 게 아니잖아요. 하나의 커뮤니티 안에 ‘힐링’이라는 주제로 최소한 이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ㅡ 모든 공간을 브랜드 입점 없이 자체적으로 꾸린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려움은 없었나요?

브랜드 입점도 고려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우리가 하기로 결정하고 나서 막막하기도 했죠. 갤러리 큐레이터도, 티 하우스 전문가도, 바텐더도 없었으니까요. 오픈을 결정하고 배우기 시작한 거예요. 요가는 제가 직접 수강했던 선생님에게 클래스 디렉팅을 부탁했고요. 다녀본 바 중에서 가장 잘하는 선생님을 초청해서 칵테일을 배웠어요. LP 디제잉도 배웠는데, 주말이면 선생님이 디렉팅한 게스트 DJ들이 와요. 운영은 우리가 하고 있지만, 전문가적인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거예요. 준비가 완벽하지 않아도 경험이 있잖아요. 어떤 것이 좋고, 좋지 않은지 알기 때문에 가능했죠. 다만, 저희는 최고를 지향하는 건 아니에요.

요가원을 운영하는 배우 윤진서도 페즈에서 오픈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다 ⓒ페즈

ㅡ 최고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정확히 말하면 ‘경쟁하지 않는다’예요. 여기 주변만 해도 커피를 잘 만드는 카페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들이랑 경쟁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는 최고의 커피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동네 주민들이 반려견 산책시키다가 잠시 들러 커피도 마실 수 있는 그런 공간이면 되는 거예요. 요가 클래스도 비슷해요. 저희는 다른 스튜디오처럼 전문가 트레이닝 코스를 운영하지 않아요. 요가는 처음에 어떤 경험을 하느냐가 정말 중요한데, 이왕이면 우리가 공들여 만든 공간에서 양질의 경험을 하기를 바라는 거죠.

TPO

임종현 대표가 영감을 얻은 공간

여러 도시와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하나를 꼽자면 앞서 언급한 ‘더 커먼스’예요. 그들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우리의 의도는 먼저 커뮤니티를 구축한 다음, 쇼핑몰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Our intention is to build first a community, then a mall.” 공간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 말 안에는 어떤 콘텐츠를 담아야 할지 방향성까지 담겼다고 생각해요. 만약 커뮤니티가 사라지고 몰의 기능만 남는다면 여느 공간들과 차이점이 없어지겠죠. 공간을 가치 있게 만드는 건, 그 공간을 꾸준히 이용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페즈

장소 FEZH

주소 서울시 용산구 대사관로11길 41

건축면적 287.89㎡

연면적 1,195.55㎡

건축 및 인테리어 설계 (주)아이티엠유이화건축사사무소(대표 유이화)

시공 (주)더프레임종합건설(대표 최석환)

구조 황경주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진구조엔지니어링(대표 김윤진)

기계 서원이엔씨

전기 한국티이씨

토목 유진이엔지

조경 더가든(대표 김봉찬)

조명 비츠로(대표 고기영)

뮤직바 인테리어 시공 이녹스(대표 김영)

건축음향 (주)아키사운드 (대표 임우승)

*3편에서 계속됩니다.

김기수 기자

사진 황지현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페즈

 

프로젝트 캐비닛은 참신한 기획과 브랜딩, 디자인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헤이팝 오리지널 시리즈 입니다. 격주 목요일, 영감을 주는 프로젝트들을 꺼내 보세요.

 

[Project Cabinet] 도시민을 위한 최소한의 리트릿, 페즈

      : file no.1 : 한남동에 등장한 커뮤니티 몰

▶ : file no.2 : 경쟁하지 않는 무언의 상업 공간

      : file no.3 : 탐험과 발견의 기쁨

프로젝트
[Post-It] 페즈
장소
페즈
주소
서울 용산구 대사관로11길 41
크리에이터
건축 및 인테리어 설계ㅣ(주)아이티엠유이화건축사사무소(대표 유이화), 시공ㅣ(주)더프레임종합건설(대표 최석환), 구조ㅣ황경주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진구조엔지니어링(대표 김윤진), 기계ㅣ서원이엔씨, 전기ㅣ한국티이씨, 토목ㅣ유진이엔지, 조경ㅣ더가든(대표 김봉찬), 조명ㅣ(주)비츠로앤파트너스(대표 고기영), 뮤직바 인테리어 시공ㅣ이녹스(대표 김영) 건축음향ㅣ(주)아키사운드 (대표 임우승)
김기수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는 음주가무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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