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인체와 손을 그려온 김완진 작가는 우리가 ‘피부색’이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인체의 색에는 무수한 색들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작가는 다채로운 색들이 만들어낸 세계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우주를 발견했다. 2022년, 작가로서 변화의 시기를 맞이한 김완진 작가는 이제 그 우주를 더 파고들고자 한다. 이 새로운 도약을 알리는 전시가 MGFS100 갤러리에서 3월 31일까지 열린다. 손의 미묘한 뉘앙스까지 포착한 그의 신작들은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는 것처럼 환희에 차 있다.
Interview with 김완진
이번 전시를 보면서 전에 비해서 색이 많이 밝아졌고 표현은 생략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난 10년 동안 진지한 주제만을 다루다 보니까 변화를 주고 싶었어요. 한 자세로 오래 있으면 몸을 비틀고 싶은 것처럼요. 전에는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강렬한 이미지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자기만의 방식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또, 어두운 주제를 다루면서 제 삶에도 영향을 받는 듯한 느낌도 들었고요.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자세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림체도 활기찬 분위기로 바꿔볼까 해요.
지난 겨울, CDA 갤러리에서 선보인 ‘Empty Nude’는 생략과 여백이 많았어요.
‘Empty Nude’는 여백이 주인공인 시리즈예요. 캔버스에 인체의 일부분만을 배치하고 드러나지 않은 나머지 인체가 관객 안에서 완성이 되게끔 하는 컨셉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Empty Nude’는 오랫동안 작업해왔던 누드 작업의 마무리라고 볼 수 있어요.
초창기부터 인체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어요. 인체의 어떤 매력에 빠진 건가요?
루시안 프로이트의 그림에 매료되면서부터예요. 그의 작업에서 인간의 체온과 살내음 같은 걸 진하게 느꼈던 것 같아요. 그렇게 10년 넘게 인체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어요. 인체를 그리는 건 여전히 재밌고 즐겁지만 어쩌면 저 자신으로부터 시작한 건 아니라서 이제는 프로이트의 그늘에서 벗어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Empty Nude’로 지난 10년간의 누드라는 소재를 정리하고, 이제는 그 과정에서 발견한 손이라는 소재로 넘어가려 해요.
손도 전부터 꾸준히 그려온 주제인데요. 앞으로의 손은 어떻게 다를까요?
지금까지 손에 숨겨진 무수한 색들과 양감, 손만이 줄 수 있는 느낌을 중점적으로 묘사했다면 앞으로는 동세와 율동에 초점을 맞추려고 해요. 작업을 대하는 생각과 태도를 바꾸면서 이전의 색감과 묘사를 아예 버릴 생각도 했지만, 남길 건 남기고 버릴 건 버리면서 균형을 잡아가려고 해요.
다른 신체 부위도 많은데 유독 손에 집중하는 이유가 궁금해요.
전에는 일부러 의미를 찾고 설명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냥 관심이 있어서 그린다고 솔직하게 말해요. 대학교 때, 손을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색이 존재하고,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서 색들이 달라진다는 걸 발견했어요. 우리는 ‘피부색’이라고 표현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표현할 것이 아니었어요. 주황색, 흰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들이 미묘하게 겹쳐진 손을 보고 있으면 마치 우주 같아요. 또, 손은 조형적으로도 그만의 독특함이 있어요. 어떤 때는 손동작을 보고 있으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충동이 생기기도 해요.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는 손동작은 무엇인가요?
무조건 손을 그리는 건 아니고, 손에 무언가를 투영해요. 지금까지는 발레나 춤과 같은 동작에서 느껴지는 영혼을 손에 투영했는데, 최근에는 무언가가 피어나는 동세를 손에 투영하고 있어요. 지난 10년 간의 구속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켜는 마음을 손에 투영했다고 할까요. 개인적인 해방, 발산에 초점을 맞춰서 작업하고 있어요.
손 모델이 따로 있는 건가요?
아뇨. 제가 직접 포즈를 취하고 그것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찍어서 그려요.
회화가 탄생한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정말 많은 작가들이 인체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죠. 그래서 나만의 인체 표현방법을 찾는 과정이 어렵고 힘들었을 것 같아요.
모든 사람에게는 인체의 특정한 부분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DNA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DNA는 사람마다 다른데, 저에게는 색이었어요. 피부색에서 느껴지는 미묘함과 색감에서 많은 위안을 얻어요.
앞서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확실히 올해 열린 두 편의 개인전에서 변화하려는 의지가 보였어요.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그림에서 오는 쾌감이 있지만, 점점 감흥이 덜해지고 있어요. 10년 동안 단단하게 쌓아 왔으니까 그걸 해체할 시기가 된 것 같아요. 저 스스로도 해체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고요.
원래 단순화하는 작업이 더 어렵다고 하잖아요.
작년 한 해 동안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표현을 해야 할지를 많이 고민했어요. 공개하지 않았지만 1년 동안 저만의 방식을 찾기 위해 작업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거든요. 그 과정을 통해 이미지를 해체하는 방식을 터득하게 되었어요.
재료도 달라졌어요. 오일파스텔과 색연필에서 유화로요.
캔버스가 커져서 색연필과 오일 파스텔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원래 유화 작업을 했었어요. 이 역시 루시안 프로이트의 영향이 커요.
유화에서 오일파스텔, 색연필로 재료를 바꾼 계기가 있었나요?
어떤 계기로 인해서 회의감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4개월간 그림을 그리지 않고 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죠. 그동안 목적을 위한 작업을 했기 때문에 매일 싸우듯이 치열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렇다면 그림을 즐겁게 그렸던 때로 돌아가자는 마음으로 색연필과 오일파스텔을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작년에 다시 유화로 돌아왔습니다. 유화 특유의 미끄러운 감촉에 적응 중이에요. 부족한 부분은 오일 스틱으로 채우고 있고요.
캔버스 크기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캔버스를 확장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음악으로 예를 들면, 음량을 키운 거예요. 작은 캔버스는 음량이 작아서 관객이 지나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캔버스가 커지면 음량도 커지는 거라서 시선과 발길을 멈추게 해요. 지금은 캔버스 크기를 조절하면서 제 그림에 맞는 음량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또 다른 이유는 이제 서서 작업하는 게 더 편해서요. 하하.
캔버스가 커지면 작업할 때 움직임도 커지죠.
네, 사용하는 근육이 달라요. 조금씩 적응하고 있는 중입니다.
원래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이야기가 있는 콘텐츠와 영상매체에 푹 빠져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있었는데 그걸 만화 혹은 애니메이션으로 풀고 싶었고요. 그런데 졸업작품을 완성하고 나니까 충분히 했으니 이제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그만두고 회화로 전향했어요.
애니메이션과 회화는 비슷하면서도 다르잖아요. 예를 들면 전자는 움직임이 중요한데, 후자는 정지된 순간을 그려야 하죠.
처음부터 회화가 저와 잘 맞는다는 걸 알았던 것 같아요.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을 주기 위해서 프레임별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저는 그보다 하나의 그림을 밀도 있게 그리는 걸 좋아하고 잘했거든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작업할 때의 성향이 궁금해지네요. 일상과 작업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출퇴근 형인가요? 아님 일상과 작업이 하나가 되는 일체형인가요?
꿈꾸는 건 출퇴근형인데 그게 잘 안돼요. 집이 작업실이라서 일상과 작업의 경계가 없어요. 사실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라서 매일 시간을 정해두고 집중해서 작업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Empty Nude’ 전을 마치고 약 2개월 안에 이번 개인전을 준비해야 했기에 조금 힘들었어요. 시간에 쫓기면서 작업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고민도 되었고요. 작업을 성실하게, 루틴을 갖추고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도 집중을 못할 때가 많아요. 일하다가 갑자기 딴짓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고요. 하하.
시간이라는 건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에너지인데 집중을 방해하는 주변의 유혹 때문에 시간이라는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는 거죠.
이번 달 말에 개인전이 끝나는데,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연달아 개인전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예전만큼 SNS를 통해 소식을 전하지 못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 혹은 2주 한 번이라도 소식을 공유하려고 해요. 그러려면 공유할만한 소식과 작품을 꾸준히 작업해야겠죠. 한 가지 소식을 전하자면, 4월 말에 성수동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에 그룹전으로 참가할 계획이에요. 그리고 앞으로 작품을 꾸준히, 많이 그릴 예정이에요. 컨디션 조절을 하면서 천천히 작품을 준비해 두려고요.
김완진 작가의 PICK!
그의 그림을 완성하는 재료들
1. 시넬리에 오일스틱
저는 오일스틱을 효자 아이템이라고 불러요. 일반적으로 유화는 유화 물감으로 접하는 경우가 많은데, 챙겨야 할 재료로 많고 표현이 자유롭게 되지 않아서 진입 장벽이 높아요. 이와 비교하면 오일스틱은 작업을 놀이처럼 만들어주는 힘이 있어요. 가볍게 스케치 및 채색을 할 때도, 혹은 디테일한 표현을 할 때도 편하게 사용할 수 있거든요.
2. 파버카스텔 폴리크로모스 색연필
다른 색연필에 비해 폴리크로모스 색연필은 지우개로 지울 수가 있어서 수정이 편해요. 그래서 더 다양한 표현을 시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