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1

[Walk with] 2. 뉴욕의 카페와 상점 사이로, 작가 유지혜를 따라 걷기

함께이면서도 혼자가 될 수 있는 공간들
새로운 공간도 공간에 관한 이야기도 쏟아지는 시대입니다. 선택지가 무수하다면, 미더운 이를 동행으로 삼아 산책하는 것도 좋은 방법 아닐까요? 그를 따라 걷다가 매력적인 샛길을 발견할 수도, 혹은 과감하게 들어서고 싶은 공간을 만날 수도 있을 테니까요. 헤이팝은 워크 위드(Walk with) 시리즈로 패션과 미술, 문학과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는 이를 만나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내밀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좋은 공간’을 한층 다채롭게 정의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자주 들고 다니는 필름 카메라로 스스로를 찍었다. ⓒ 유지혜

워크 위드(Walk with) 시리즈로 함께 걸을 두 번째 인물은 작가 유지혜다. 그는 워크 위드라는 시리즈로 만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인터뷰이다. 유지혜는 서울을, 뉴욕을, 베를린을 종일 걷고, 걸으며 떠올린 생각과 마주친 장면을 긁어모으고 솎아내어 글을 쓰는 작가이므로. 그의 산문집 「우정 도둑」(2023), 「쉬운 천국」(2020) 등이 모두 그렇게 쓰였다. “보기보다는 겪기를 원한다”라고 깨끗하게 말하는 유지혜는 어떤 공간들을 겪어 왔을까? 올여름 내내 뉴욕에 머무르려 한다는 그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뉴욕에서 ⓒ 유지혜

Walk with 유지혜 작가

@jejebabyxx

— 안녕하세요 지혜 님. 헤이팝 독자들에게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글 쓰는 유지혜입니다. 주로 여행과 일상의 경계에 선 글들을 모아 여러 권의 책을 썼어요.

 

— 지금 미국 뉴욕에 머물고 있다고요. 뉴욕은 어때요?

5월 말부터는 뉴욕에서 지내고 있어요. 여름 내내 여기서 지낼 예정입니다. 누구에게나 이유 없이 사랑하게 되는 도시가 있고 그곳이 제겐 뉴욕입니다. 이곳만의 혼란스러움 속에 섞여 들어가는 기분이 중독적이에요. 처음에 이곳과 사랑에 빠졌을 땐 느낌표투성이인 말들로 이곳을 설명했지만 지금은 마음에서 말줄임표가 새어 나와요. 더 많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저는 그저 어리버리하게 뉴욕을 좋아하고 싶어요. 당분간은 그럴 예정이에요.

2023년의 뉴욕 맨해튼 ⓒ 유지혜

— 지혜 님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나요?

뉴욕에서와 한국에서의 일과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나름의 루틴을 세워두고 그 외 시간에는 즉흥적으로 지내는 편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우선 동네 산책을 합니다. 집으로 다시 돌아와 가방을 들고 나가서 하루 종일 걷다가, 카페에 들어가 책을 읽거나 글을 씁니다. 걸을 때는 주로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어요. 노는 것 같아 보일 수도 있는데 꽤 절박하게 이야깃거리를 찾아다닙니다. 걷지 않는 날 쓴 글은 형편없는 경우가 많아 거의 버리는 편입니다. 귀가 후에는 씻고 간단한 요가와 독서를 한 뒤 바로 기절하듯 잠에 빠져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악몽을 꾸거든요. 한국과 여행 중의 다른 점을 꼽는다면 떠난 곳에서는 훨씬 더 많이 움직여요. 최근에는 발레와 러닝을 시작했어요.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무조건 참여하는 데 의의를 둡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타입이라 운동이 꼭 필요해요.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글을 쓴다. ⓒ 유지혜
베를린 ⓒ 유지혜

— 어떤 공간에서 머물기를 좋아하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흥미진진한 공간을 많이 찾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독자분들도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매일 가는 곳을 반복해서 갑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기에 적당하면서도 혼자만의 생각에 빠질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합니다. 어쩐지 그런 곳에서 더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아요. 그 공간들의 특징은 직원들이 차가운 듯 다정하다는 것인데요, 그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는 데 능숙하기 때문에 익명성을 보장해줘요.

 

— 새로운 공간보다는 이미 가본 공간을 여러 번 찾곤 한다고요. 익숙한 공간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멋진 답을 하고 싶지만 제가 너무 게으른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도 매일 같은 사람만 만나고, 도시도 가던 곳만 갑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같은 공간과 사람에게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걸 좋아한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겠어요. 차곡차곡 쌓인 편안함 속에서 가끔 기분 좋은 배신을 당하곤 하는데, 그 귀한 순간을 늘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런던의 카페 ⓒ 유지혜

— 특히 아껴서 계속 찾게 되는 공간이 있다면 소개해 줄 수 있나요? 그 공간의 어떤 면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지도 듣고 싶어요.

뉴욕에서는 워싱턴스퀘어 근처에 있는 파티용품점을 즐겨 찾습니다. 뭘 사기 위함은 아니고요, 그냥 넓은 매장 안을 돌아다니면서 야한 코스튬 복장들과 기괴한 분장 용품들을 들춰보다 보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고민을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어요. 또, 첼시 쪽에 계절마다 들르는 작은 빈티지숍이 있어요. 아끼는 악세서리들을 모두 이곳에서 구매했습니다. 늘 똑같은 시간에 예외 없이 열려 있는 오래된 가게들을 크게 존경해요. 저를 절대 아는 척하지 않는 주인 할아버지에게 질척거리며 그가 살아왔을 인생을 상상하는 게 즐거워요. 지나가던 사람들 중 많은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를 보고 들어와 대화를 시작해요. 그들의 시대를 듣는 것은 덤이에요. 손글씨로 시대와 스타일을 적은 가격 태그를 보는 일도 특별하답니다.

 

— 서울에서는요?

한남동 파르크. 저는 해외에 있는 한식당을 그 어떤 장소보다 좋아해요. 파르크는 한남동에 있지만, 여행 중 유럽에서 먹던 한식을 떠올리게 해요. 추운 날 비엔나에서 그 동네에 딱 하나뿐인 한식당에 가서 국물로 몸을 녹이던 추억이 있거든요. 실제로 이 가게의 사장님이 오랜 유학 생활 동안 그리웠던 어머니의 집밥을 모티프 삼아 가게를 오픈하셨었다고 해요. 이곳에서는 자주 먹던 한식을 보다 낯설고 감사하게 느낄 수 있어요.

뉴욕의 극장 ⓒ 유지혜

— 정든 공간을 찾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가끔은 새로운 공간에 들르게 되죠. 만일 새로운 공간에 가야 한다면, 그 공간을 어떻게 찾아요?

언젠가 ‘우연은 언제나 나의 계획을 이긴다.’라고 쓴 적이 있어요. 제 자신의 계획을 신뢰하지 않을뿐더러 칭찬 일색인 공간에 실망했던 경험이 많았기에 이제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요. 우연에 의지하게 되면 누구도 탓할 수 없고 실수마저 과정이 되니까요. 일상을 여행처럼 살자는 다짐은 무리하게 무모해지라는 제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기존의 지켜야 할 생활의 루틴을 철저하게 지키되, 이외의 시간을 더욱 즐겁고 느슨하게 살라는 뜻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할 일을 마친 스스로에게 보상한다는 의미로 우연히 뭔가를 찾으려 애씁니다. 간혹 친구들의 추천을 받을 때도 있어요.

 

— 그저 흘러가다가 만난 공간에 들어간다면, 그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무엇 때문에 생기는지도 듣고 싶어요.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순간은 다양합니다.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든가, 간판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든가. 아니면 청개구리 심보로 손님이 바글바글한 식당 옆에 위치했지만 손님이 하나도 없는 식당에 들어갈 때도 있어요. 멋있는 사람들이 계속 들어가는 공간에 따라 들어갔던 경우도 많아요.

여행 중 들어선 카페 ⓒ 유지혜
뉴욕의 LP 가게에서 ⓒ 유지혜

— 지혜 님의 인스타그램 계정 프로필란에는 ‘Writer but mostly wanderer(작가이지만 대부분 방랑자)’라는 문구가 쓰여 있지요. 방랑과 같은 여행을 자주 하시는 걸로 압니다. 여행지에서의 집이 되는 공간, 즉 숙소를 고를 때는 어떤 걸 살펴봐요?

삼십 대가 되고 나서는 청결도와 위치를 가장 우선시합니다. 그다음으로는 큰 책상이 있는 곳을 고릅니다. 특히 뉴욕에는 책상이 아예 없거나 너무 작은 숙소들이 많아서 책상 유무를 사전에 꼭 문의합니다. 호텔이 아닌 경우 보통 워크업 빌딩*이 많아서 몇 층인지도 꼭 확인합니다. 기피하는 것은 이케아 가구로만 채워진 영혼 없는 비앤비입니다. 보통 한 달씩 머물기 때문에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집 같은 느낌이 드는 공간을 찾으려 신중을 기합니다. 호텔을 고를 때에도 비슷한 기준을 적용해요.

*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딩
뉴욕 ⓒ 유지혜

— 지혜 님이 수프림, 마르지엘라의 향수를 언급한 인스타그램의 글을 보았어요. 수 년 전 샤넬의 행사에 다녀온 후 쓰신 글도 정확히 기억 나지는 않지만, 그 브랜드에 대한 제 생각을 얼마간 바꿔주었고요. 지혜 님이 좋아하는 브랜드에 대해 듣고 싶어요.

바로 떠오르는 브랜드들이 있어요. 애플, 아디다스, 이자벨 마랑, 비비안 웨스트우드, 꼼데가르송. 운동복으로는 룰루레몬을 좋아해요. 이 브랜드들에는 대체될 수 없고 명확한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서 소비하는 사람으로서 헷갈리지 않아요. 기대했던 정확한 것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실망할 일도 없어요. 이미 디테일한 요소들에 브랜드의 정수가 깃들어 있어요. 이들은 아이코닉한 슬로건 이외에 거창한 철학을 내세우지 않아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한 우물만 파지만, 그저 파는 행위에 집중할 뿐 내가 왜 이 우물을 파는지, 이 우물이 어떤 느낌인지, 이 우물을 왜 네가 마셔줬음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굳이 하지 않는 거죠. 묵묵히 늘 그 자리에 있는 자신감에 감탄하곤 한답니다.

 

또 스킨케어 브랜드로는 이솝을 흠모해요. 즐겨 찾는 이솝의 홈페이지는 명상 공간에 가까워요. 홈페이지의 ‘Read’라는 카테고리에서 브랜드와 관련된 글과 믹스테입을 보고 들을 수 있어요. 특히 창립 25주년을 맞아 업로드되었던 25권의 추천 도서와 서점 목록에 깊은 영감을 받았어요. 한남동의 이솝 매장에서는 한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미국 문학잡지 「파리 리뷰(Paris review)」를 판매하기도 해요. 이솝은 문학을 통해 아름다움의 경계를 넓히는 영민한 브랜드라고 생각해요.

샤넬 인 제주 행사 ⓒ 유지혜
샤넬 인 제주 행사 후 인스타그램에 공유한 글(2022. 11. 25) ⓒ 유지혜

— 많은 것에 ‘브랜드’라는 말이 붙는 시대예요. 지혜 님은 브랜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도 궁금해집니다.

브랜드는 자신만의 표현 방법과 콘텐츠를 일치시킬 줄 아는 능력인 것 같아요. 겉으로 드러낼 이야기들을 선별해내고 사람들 앞에 서는 용기를 내는 일이기도 하죠. 드러나는 순간 공동의 것이 되기 때문이에요.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할지까지 심도 있게 고민하는 일. 그것이 브랜딩이라고 생각합니다.

 

— 브랜드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질문으로, 좋아하는 브랜드의 공간이 있다면 어디인가요?

뉴욕 그리니치 에비뉴 94번가에 있는 향수 가게, 프레드릭 말(Frederic Malle)의 매장을 좋아합니다. 작은 규모에 마치 갤러리 같은 분위기를 풍기죠. 향수는 가까이 다가서는 친밀감에 대한 물건이라는 점을 진하게 느낄 수 있어요. 밖에서 매장 안이 보일 듯 말 듯하게 설계했다는 점과 온몸으로 밀며 열어야 하는 철문마저 피부로 와 닿는 친밀감을 명민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섹시한 기분도 들고요. 작년 여름에 방문했을 때 푸에르토리코 출신 직원의 응대를 받았는데,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진 그가 매장의 한 부분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 수많은 공간이 사라지고 또 탄생합니다. 공간과 취향에 관한 이야기 역시 온오프라인을 가득 채우곤 하죠. 이러한 현재의 분위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갈망하는 아름다움과 취향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껴요.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적인 시대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단단한 아름다움을 찾아가야 할까요? 나의 취향은 정말 나의 취향일까요? 무인도에 살아도 이 옷을 입고 이 가방을 들까요? 인스타그램에 올리지 않아도 그 도시로 여행을 갈까요? 요즘 저는 시대를 논하기 이전에 저 자신부터 돌아보려 하고 있어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를 되새기면서 새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좋아하던 것을 좀 덜 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는 식으로요. 그 모든 것이 내가 될 수 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요. 걸음마 떼듯 처음부터 다시 연습하고 있어요.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선택하기. ‘보기’보다는 ‘겪길’ 원해요. 취향보단 경험을 원해요. 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은 누구라도 환대하는 하나의 장소가 되겠지요. 제 독자분들께 그런 장소를 제공하고 싶어요.

뉴욕에서 ⓒ 유지혜

— 남은 한 해를 어떻게 보낼 예정이에요? 미래의 바람이나 들려줄 수 있는 계획이 있다면요.

우선은 뉴욕에서의 여름을 잘 지내고 싶어요. 바라건대 연말에는 새 책으로 독자분들을 만날 준비도 하고 있어요. 미래의 제 바람은 심플해요.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을 쓰고 싶고, 그 책을 쓸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일만큼은 참 복잡하지만 두 가지는 확실히 알았어요. 사랑해야만 성장할 수 있다는 걸요. 최근 잃을 게 많다는 착각에서도 벗어났고, 어떤 때보다 후련해요. 올해 저는 그냥 사랑하며 지낼 거예요.

 

— 뉴욕에서 찾은 최근의 기쁨에 관해 물을게요.

점심 도시락 만드는 일에 푹 빠졌어요. 또, 결혼을 앞둔 친구들이 센트럴파크에서 사진을 찍는다는데, 옷 골라주는 일이 무척 즐거워요. 완벽한 갈색 드레스를 골랐고 이제 신발만 찾으면 됩니다. 그리고 또… 친구들과 낯선 세계 음식 도전하기. 자기 전 와인 두 잔에 책 읽기. 다음 날 밤 똑같은 일상 반복하기.

about heyMAP Curation

유지혜 작가가
서울에 있었다면 들렀을 여름의 전시들

— 지혜 님의 글을 아끼는 독자들, 혹은 이 인터뷰를 따라온 이들을 위해 헤이맵 큐레이션을 해 주었죠. 어떤 기준으로 큐레이션 했어요?

지금 한국에 있지 않아서 갈 수 없는 전시들이에요. 여러분이 대신 가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전시들로 뽑아봤습니다.

 

▼ 유지혜 작가가 직접 남긴 추천 코멘트를 살펴보고 전시장과 거리를 거닐며 여름을 만끽해 보세요!

유지혜 큐레이션 전시와 그의 추천사를 위 카드를 눌러 확인해 보세요.

시리즈 [Walk with]

1. 백남준아트센터부터 놀이동산까지, 일러스트레이터 김도하를 따라 걷기

▶ 2. 뉴욕의 카페와 상점 사이로, 작가 유지혜를 따라 걷기

 김유영 기자

사진 제공 유지혜

김유영
에디터.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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