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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2

[home seoul home] 9. 오래된 아파트에서 이어지는 새뜻한 일상

93년생 박은비의 남가좌동 집
서울의 집을 보여주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꿈처럼’ 아름다운 집보다는 생활감이 잔뜩 묻은 집, 사는 사람이 선명하게 보이는 집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거기 사는 사람과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눕니다. 현실과 취향이 어떻게 어긋나고 맞물리는지, 한정된 자원 안에서 무얼 취하고 단념하는지, 왜 이 브랜드가 여기 놓였는지 듣습니다. 누군가의 방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서울이라는 도시와 그 속의 삶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뮤지션 RM은 그의 곡 ‘seoul’에서 노래합니다. “빌딩과 차들만 가득해도 이젠 여기가 나의 집”이라고, “사랑과 미움이 같은 말이면 I love you Seoul”이라고요. 어쨌든 서울을 집으로 삼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홈 서울 홈(home seoul home) 취재를 위해 아홉 번째로 찾은 곳은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1993년생 박은비가 사는 아파트다. 2016년 서울에 왔다고 하니, 그가 서울에 산 시간은 8년쯤 된다. 직장에 다니는 박은비가 퇴근한 저녁에 그의 집을 찾았다. 창밖 해는 저물어 크고 작은 조명들만 빛을 발하는 공간에서, 따뜻한 차와 청포도를 앞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다.

큰방 ⓒ heyPOP

퇴근 후에 짬을 내주어 고맙다. 자신에 대해 소개해 달라.

1993년생 박은비다. 대학에서 사진을 공부했고 그 후로 쭉 사진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어떤 사진을 찍나.

학교에서는 다큐멘터리를 전공했다. 날것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게 좋았다. 그래서 졸업하자마자 기자라는 직업을 택했고, 온라인 매체에서 사진 기자로 3년쯤 일했다. 그런데 미디어 관련 규제에 따라 업무 환경이 영향을 많이 받더라. 좀 더 안정적으로 밥벌이를 하고 싶어서 광고 사진으로 전향했다. 아예 다른 분야여서, 제품 사진 찍을 수 있는 회사에 무작정 들어가 배우면서 일했다. 지금은 스킨케어 브랜드 회사에서 제품 사진을 찍고 있다.

깨끗이 씻겨 놓여 있던 청포도 ⓒheyPOP

다큐멘터리 사진과 제품 사진은 무척 다른 영역일 것 같다. 제품 사진의 매력은 무엇인가?

인물을 찍는 것도 좋지만 인물을 컨트롤하느라 기가 빨릴 때가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이니 촬영 시간이 한정돼 있는 게 당연하고. 그와 비교하면 제품 촬영은 나 자신과의 싸움 같다. 여러 조건에 비교적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매달릴 수 있어서 좋다. 또 일상 속에서 흔히 만나는 제품을 사진으로 예쁘게 찍어냈을 때 만족과 성취감을 느낀다.

서울에 산 지는 얼마나 됐나.

2016년에 왔다. 그해 2월에 대학을 졸업했는데, 졸업하자마자 거의 한 달 만에 취업을 했다. 사람인 같은 채용 사이트를 뒤져서 일자리를 구하고, 당일치기 일정으로 서울에 와서 하루 만에 집을 보고 계약까지 끝냈다. 그리고 바로 일주일 뒤에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왜 그렇게 서두른 건가?

당시 사진 기자 일을 하고 싶었기에, 예체능 계열에서 일할 거라면 서울이 훨씬 더 기회가 많으리라 생각했다. 또 방학이면 서울에 와서 일주일씩 머무르곤 할 정도로 이 도시를 좋아하기도 했다.

큰방과 베란다가 이어져 있다. ⓒheyPOP

서울에서의 첫 집을 기억하나.

하루 만에 집을 구했다고 했잖아? 친구와 같이 딱 세 군데 돌아보고 고른 집이다. 반지하의 작은 투룸이었다. 방을 구할 당시에는 도배가 새로 되어 있던 상태여서 몰랐는데, 살다 보니 곰팡이가 스멀스멀 올라오더라. 빗물도 새고. 그런데 그보다도 화장실이 정말 불편했다. 세면대가 없어서 쪼그려 앉아 씻어야 했다. 또 바닥과 변기 사이에 단차가 있어서 변기를 쓰려면 계단 몇 개를 올라가야 했다. 그 집에서 친구와 둘이 2년을 살았다.

그 후에는?

둘이 살다 보니 혼자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침 친구도 가족이 서울로 오게 되면서 가족과 살기로 했고, 자연스레 흩어졌다. 당시 다니던 회사가 강남 쪽이어서 근처를 둘러보다가 낙성대라는 동네를 찾았다. 근처의 다른 동네가 좀 북적이고 시끌벅적한 느낌이었다면 낙성대는 조용하게 느껴져 마음에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금액에 맞춰 본 원룸들은 대부분 4평 정도였는데 그곳만 5~6평이었다. 1평 차이가 정말 크게 느껴지더라. (웃음) 또 그 집이 4층이라는 점도 좋았다. 일단 지상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행복했다. 거기서 잘 살았다.

모퉁이에서 바라본 큰방 모습. 광각으로 찍었다. ⓒheyPOP
오래전부터 피아노를 쳤다. 이제 자주 치지는 않지만, 손이 완전히 굳어버리는 건 싫어서 건반을 두었다. ⓒheyPOP

낙성대에 살다가 서대문구로 왔다. 동네를 완전히 바꿨구나.

합정에 있는 회사로 이직을 했거든. 합정, 연희 근처를 찾아보니 터무니없이 비싸더라. 범위를 넓혀 2개월간 매일 부동산을 돌며 발품을 팔았다. 고생 끝에 이 집을 만났다.

이 집을 처음 봤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

보자마자 계약하겠다고 했다. (웃음) 창문이며 벽에 뽁뽁이랑 스티로폼이 붙어 있길래 방풍이 잘 되지는 않나 보다 예상하긴 했다. 집 상태를 보니 관리가 엄청 잘 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도 맘에 들었다. 오래되긴 했어도 아파트고, 직장과 가까워서 마음에 들었다. 가격도 내 예산과 잘 맞았고 중소기업대출도 가능한 집이었다.

커다란 테이블은 밥을 먹고 영상을 보거나 친구들과 대화하는 장소가 된다. ⓒheyPOP
큰방 안쪽에서 복도 쪽을 바라본 모습 ⓒheyPOP

첫 집에선 친구와 살았고 그 후엔 작은 원룸에서 살았다. 투룸에 혼자 사는 건 이 집이 처음인 셈이다. 이곳에서 어떻게 살고 싶었나.

아주 큰 침대부터 샀다. (웃음) 늘 싱글침대를 썼는데 여긴 공간이 넓으니 큰 침대에서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퀸사이즈 침대를 들인 후 커다란 테이블을 샀다. 큰 침대와 테이블을 놓자는 생각이 가장 먼저였다.

퀸사이즈 침대와 테이블을 놓은 큰방을 생활공간으로, 작은 방을 옷방으로 쓰게 되었구나.

옷이 많은 편이라 옷에 치이며 살았다. 옷방을 늘 갖고 싶었다. 작은 방을 보자마자 옷방으로 쓰자고 생각했다. 집은 온전히 쉬기만 하는 공간이기를 바랐기 때문에, 생활공간과 옷방 외에 다른 공간을 아예 떠올리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기도 했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지.

방 곳곳에 아끼는 소품을 두었다. 가장 오른쪽 사진은 주워 온 조개껍데기 ⓒheyPOP

일부러 일하기 불편한 환경을 만들었다는 뜻인가?

맞다. 편한 의자보다는 딱딱한 의자를 골랐고 테이블도 일하기엔 약간 애매한 높이로 샀다. 일은 회사에서 다 끝내고 집에서는 그냥 쉬기만 하려고.

집에 둘 물건을 본능적으로 고르는 편인가? 혹은 오랫동안 취향을 구체화해 왔나.

느낌적인 느낌이다. (웃음) 어느 날 문득 물티슈 디자인이 거슬리기 시작한다고 하자. 그러면 주구장창 물티슈 커버만 찾는다, 맘에 드는 걸 발견할 때까지. 이전 집까지는 워낙 좁았기 때문에 내 성에 찰 만큼 꾸미지 못했다. 근데 처음 집에서 두 번째 집으로 이사한 후에, 공간이 아주 조금 더 생기면서 작은 소파와 러그를 들였었거든? 조그만 소파와 러그만으로도 집 안에서 내 행동이 달라지더라. 이전엔 집이 편치 않으니 자주 외출했고 집에 있을 때도 누워만 있었는데, 소파와 러그를 둔 후로는 소파에 앉아서 책도 보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게 되더라고. 그때 공간의 작은 여지가 얼마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았다. 넓은 공간에 대한 열망이 그때 생겼다. 이 집에 살면서 한을 원 없이 풀고 있는 것 같다.

거울도 커다란 것으로 샀다. 방이 더 넓어 보인다고. (좌) 집에 들어와 향초를 피우는 시간을 좋아한다. (우) ⓒheyPOP

그럼 침대와 테이블 외에 어떤 것으로 공간을 채우려 했나?

나는 꽤 즉흥적인 편이다.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하고 하기 싫은 건 정말 하기 싫고, 하겠다는 마음이 들면 바로 해버리는 성격이다. 그 성격이 집을 꾸미는 일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듯하다. 식물에 꽂혔을 땐 바로 식물 단지에 가서 식물을 잔뜩 사 왔다. 일단 사고 키우는 법을 찾아본 것 같다. (웃음)

베란다. 식물들이 있다. 비오는 날이면 캠핑 의자에 앉아 비오는 모습을 바라본다고. ⓒheyPOP

영화 포스터가 곳곳에 있다. 포스터를 그냥 붙이지 않고 액자에 넣어둔 것도 예쁘다.

포스터만 따로 파는 상점이 몇 군데 있다.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좋았던 작품의 포스터를 산다. 포스터를 액자에 넣어두면 더 특별하게 느껴져서 액자를 해 두었다. 비싸지 않은 액자라고 해도, 일단 액자에 넣으면 포스터가 더 특별해지는 느낌이 든다. 사진 기자 일을 하면서 영화를 많이 보게 됐다. 회사에 영화 관람권이 자주 들어왔거든. 많이 보다 보니 좋아졌다.

영화 포스터를 액자에 넣어 둔다. ⓒheyPOP

일을 하면서 영화를 좋아하게 됐구나. 대학에서 다큐 사진을 전공한 이유는 뭐였나?

꾸며진 것보다는 날것을 좋아했다. 예를 들어 목포에 한 70년 된 방앗간이 있다고 하면 거기 며칠 머무르면서 방앗간 사장님과 친해지고, 얘기도 나눈다. 그래야 알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잖아? 그러한 이야기들이 사진에 담길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이 정말 좋더라. 이야기가 느껴지는 사진을 찍는 일이 정말 재미있었다. 진심과 진심이 이어질 때 나오는 결과물을 보는 게 좋아서 즐겁게 공부했다.

작은 방은 옷방으로 쓴다. 냉장고 디자인이 썩 맘에 들지는 않아서 이 방에 두었다. ⓒheyPOP
냉장고 색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직접 페인트를 칠했다. (좌) 옷방 문 뒤에는 모자를 걸어 두었다. (우) ⓒheyPOP

살다 보면 정말 모르던 방향으로 삶이 이어지기도 하잖아. 생생한 이야기가 담긴 다큐 사진을 좋아하던 당신이 제품 사진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도 그런 일이겠다.

지금 하는 일에 대해서는 또 다른 감정을 느낀다. 쉽게 말하면 이 일은 나의 생계유지 수단이다. 성취감이 없지는 않지만, 일에 너무 많은 애정을 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전의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일을 대하는 태도를 수정해 나간 것 같다. 나의 경우는 일에 너무 진심을 다하면 자책도 혹독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일은 ‘그저 내 업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다큐 사진을 좋아하던 것과 이어지는 욕구는 다큐멘터리나 예술 영화를 보거나 종종 필름 카메라로 취미 사진을 찍으면서 해소한다.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집부터 구했을 만큼 패기가 넘치던 때와는 또 다른 변화가 생긴 거구나.

처음 서울에 올 때는 ‘내가 다큐에 한 획을 긋겠다’라는 마음이었다. (웃음) 그러나 일을 하다 보면 마음처럼 흘러가지만은 않잖아. 주변 환경이 나를 지치게 할 때도 있고, 나 자신도 에너지를 쏟는 만큼 소진되고, 기대가 크면 실망은 더 크고…. 그렇게 조금씩 깎이고 깎이고, 다듬어지고 다듬어지다 보니 문득 어느 순간 ‘아, 일이라는 게 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닐 수도 있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주방 ⓒheyPOP
현관 쪽에서 집 안쪽을 바라본 모습(좌) 주방의 트롤리 옆에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통을 걸었다. (우) ⓒheyPOP

이곳은 아주 오래된 아파트라고 들었다. 찾아오면서도 현재 익숙한 아파트와는 많은 요소가 다르다고 느꼈다. 출입구 위치나 복도 동선 등이 최근 지어진 아파트와는 사뭇 다르다.

아파트가 나보다 나이가 많다. 1992년에 지어진 걸로 안다. 옛날 아파트들은 엘리베이터가 둔탁하고 큰 편이었다고 하더라. 이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도 굉장히 크다. 이웃들도 보통 여기서 오래 사신 분들이고 대부분 연세가 많으시다. 가족 단위로 거주하는 가구도 꽤 많다. 우리 집이 이 아파트에서 제일 작은 평수라고 들었다.

그래서일까? 집의 자투리 공간도 꽤 큼지막하다. 다용도실이나 베란다가 널찍해서 유용하겠다.

자투리 공간에 보기 싫은 것들을 둘 수 있어서 유용하다. (웃음) 또 베란다가 있어서 되게 좋다. 캠핑 의자를 두었는데, 거기 앉아서 책도 읽고 비 오면 빗소리를 듣는다. 빨래를 방 안에 널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정말 좋다.

주방 옆으로 다용도실로 나가는 문이! ⓒheyPOP
집 안쪽에서 바라본 현관. 좌측의 문이 옷방으로 사용하는 작은방이다. ⓒheyPOP

나이 든 아파트에 산다는 건 어떤 경험인가?

옛날 아파트를 오래 좋아했다. 그냥 산책 삼아 오래된 아파트에 가보기도 했다. 이 아파트에 살게 되어서 참 좋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따뜻함을 느낀다. 오래된 아파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있거든.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어르신들이 천천히 걷는 소리, 과일 트럭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밥 짓는 냄새…. 그런 소리와 냄새 속에서 편안하다.

가장 좋아하는 집에서의 시간 ⓒheyPOP

그렇다면 이 집은 당신의 이상향과 가깝겠다. 이 집을 만남으로써 서울이라는 도시가 좀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나?

이제는 서울에 계속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정착했구나 싶고. 서울에도 서울만의 문화가 있다고 생각하거든? 동네마다 다 특색이 있고, 구옥과 신축 건물이 나란히 서 있고, 문화재나 유적지 근처에 사람들이 살고…. 여러 요소가 서울만의 분위기를 만드는데, 내겐 그게 매력적이다.

동네 자랑을 하면서 끝낼까.

홍제천과 안산이 가깝다. 홍제천에서 30분 정도 달리면 망원 한강공원이다. 안산은 높지 않아서 산책 삼아 한 시간 정도 다녀오기에 알맞다. 시장과 오래된 가게들이 많다는 것도 좋다.

현관문에는 사진 엽서를 붙여 두었다. 어르신들이 찍은 사진을 엽서로 만드는 프로젝트로 탄생한 엽서들이라고. ⓒheyPOP

글·사진 김유영 기자

김유영
에디터.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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