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디자인이 가진 위상은 미미하지만 해외에서 활동하는 레바논 디자이너들의 활약은 대단하다. 잦은 내전으로 인해 본국을 떠나 해외에 정착한 인구가 더 많은 나라이다 보니 유럽에서 디자인 교육을 받고 훌륭한 이력을 쌓아가는 모습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유서 깊은 호텔 크리용(Hôtel de Crillon)의 레노베이션과 칼 라거펠트와의 협업으로 유명해진 알린 아스마 다만(Aline Asmar D’Amman), 카펜터스 워크샵 갤러리 소속인 듀오 디자이너 다비드(David), 니콜라(Nicola), 그리고 닐루파 갤러리에 등장한 신진 디자이너 플라비 오디(Flavie Audi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디자이너들 중 레바논 출신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영리 단체인 ‘하우스 오브 투데이(House of Today)’는 2012년 베이루트에서 셰린 마그라디 타예브(Cherine Magrabi Tayeb)에 의해 시작되었다. 저명한 사업가이자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의 무슬림 패션 자문위원회 의원장을 맡고 있는 셰린은 국경을 초월해 레바논의 지속 가능한 디자인 문화를 육성하기 위해 이 단체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10년이 넘도록 지속된 투자와 홍보활동을 통해 해외에 뿔뿔이 떨어져 활동 중인 디자이너들을 집결시켜 국제적 수준의 전시와 프로젝트를 선보이면서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디자인 생태계가 원활하게 기능하면서 창의적 표현의 지속성이 유지되려면, 이들이 모여서 더 큰 가치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누군가가 짊어져야 합니다. 디자이너는 구상하고 창조하며, 장인은 생산하고 실현합니다. 여기서 하우스 오브 투데이의 역할은 큐레이팅과 멘토링,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레바논 디자이너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역할로 존재하고 있어요.”
하우스 오브 투데이가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초대한 열 명의 레바논 디자이너들은 각자 건축, 디자인, 목공 등의 예술적 관행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왁스 창작물을 디자인했다. 제작은 베이트 체밥 병원(Center Hospitalier Beit Chebab) 내부에 위치한 양초 작업장 장인과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원래 베이트 체밥 대학이었던 이 곳은 1976년 남북전쟁 중 부상을 입은 장애인을 위한 병원으로 탈바꿈 되었다고 한다. 환자들에게 공예 활동을 통해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도록 돕기 위해 공예 워크샵을 열기 시작했고 수십년이라는 시간 동안 작품으로서의 양초를 제작하기 위해 장인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익히면서 오늘날 정교한 작업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아뜰리에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번 10명의 디자이너 – 알린 아스마 다만(Aline Asmar d’Amman), 나다 뎁스(Nada Debs), 다비드/니콜라, 카흘라 바즈(Carla Baz), 리차드 야스민(Richard Yasmine), 200Grs, 플라비 오디(Flavie Audi), 사야 & 가리베(Sayar & Garibeh), 타마라 바라주(Tamara Barrage), 림오브젝트(LimbObject) – 와 장인 루코즈 무살렘(Roukoz Moussallem)의 협업은 매우 높은 수준의 결과물을 보여준다. “각각의 작품에 필요한 세부 사항과 마감 수준을 고려하여 금형을 만들고 디자인에 생명을 불어넣는 데 약 1년이 걸렸습니다. 색상부터 질감까지 다양한 차원을 탐구하여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세심한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이었죠.”라고 루코즈 무살렘은 설명한다.
열 명의 디자이너들의 설명이 곁들어진 열 점의 유니크한 양초들은 보는 것 만으로도 눈이 즐겁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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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이어지는 마름모 패턴을 바라보다 보면 다른 영역으로 감정을 이동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형태를 양초로 제작해 보았습니다.
나무와 다르게 빛이 질감에 반사되어 훨씬 더 매혹적인 효과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나다 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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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hing is Forever는 말은 모든 것이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늘 견고할 것 같은 암석조차도 손상되고 변형됩니다.
이 작품은 두 개의 바위가 서로 소용돌이치고 나선형으로 결합되어
우주 속 모든 존재와 사물의 얽힘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죠.
자연을 향한 애정은 인류를 자연에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하고,
그렇게 사랑으로 결합된 인류가 함께 불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플라비 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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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Here는 밀랍이 녹는 방식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이 경험에서 형태의 변화에 대한 시적 담론, 즉 왁스가 녹고, 부드러운 방울이 형성되고,
굳어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과정을 통해 양초로부터 친밀감과 편안함을 불러일으키고자 합니다.
어려울 때 위로가 된 친구의 손길을 표현해 ‘너를 위해 내가 여기 있어’라고
조용히 전하는 따뜻함을 어두운 밤에 빛을 제공하는 촛불과 함께 느꼈으면 합니다.
림오브젝트
”
‘더 캔들 프로젝트’는 지난 10월 27일부터 나흘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열린 디자인 행사(We Design Beirut)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11월 20일부터 ‘하우스 오브 투데이’ 사이트를 통해 판매를 시작했다. 수익금 전부는 베이트 체밥 공방 지원, 그리고 레바논의 디자인 인재 육성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글 양윤정 객원 필자
자료 제공 및 취재 협조 하우스오브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