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경은 매달 빠짐없이 찾아오는 월간지 마감을 18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해낸 사람이다. 그는 2006년 디자인하우스에서 발행하는 매거진 월간 《디자인》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과 디렉터를 거친 후 지난해 봄 회사를 떠났다. 그동안 전은경이 만든 잡지는 200여 권, 다시 말해 그는 200번이 넘는 마감을 어떻게든 치러낸 셈이다.
기자이자 디자인 전문가, 브랜드와 콘텐츠 비즈니스 디렉터. 전은경의 이름 앞에는 여러 수식이 따라붙는데, 그는 스스로를 다만 “마감 때문에 성장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마감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꽤 많을 그가 이달 초 첫 단독 저서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을 냈다.
전은경은 잡지를 한 권 만들 때마다 “세계가 하나씩 늘어나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18년간 착실하게 넓어져 갔을 그의 세계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200번의 마감을 치르며 듣고 보고 겪고 느낀 것이 가지런히 담긴 책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에서 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디자인, 에디팅, 무엇보다 ‘18년 동안의 마감’에 대해 묻기 위해 그를 인터뷰했다.
1. 디자인 전문가의 ‘플레이리스트’ 에세이
— 디자인하우스를 떠날 때, 동료들이 건넨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있던 디렉터님의 모습이 떠올라요. 퇴사 후엔 어떻게 지냈나요.
퇴사하고 자유계약선수가 된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네요. 퇴사 직후부터 앞으로 뭐 할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웃음)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규 마감에서 벗어나 산발적 마감을 하고 있어요. 일 년가량은 아무 생각 없이 놀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몇 가지 일을 바로 하게 되었어요. 지난해에는 코오롱의 업사이클링 패션 브랜드 ‘래코드’와 함께 전시 〈래콜렉티브: 25개의 방〉을, 가구 편집숍 무브먼트랩과 전시 〈순환하는 가구의 모험〉을 기획했고요. 현재 스타트업에 일주일에 한 번씩 출근하고, 비즈니스 기업과의 디자인 관련 업무, 기업의 책을 만들어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수요일 오전에는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트렌드에 관한 수업을 하고 있어요. 이미 제가 잘하는 것으로 검증된 일, 새롭게 해보는 일의 비중이 7:3 정도입니다. 자유계약 선수가 되고 보니 너무 자유로워서 그게 좀 문제인 것도 같네요. 정규 마감직에 있을 때보다 서울 여기저기를 더 돌아다니며 전시도 더 많이 보고 음악도 더 많이 듣고 있어요.
— 이달 초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이 나왔습니다. 책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워크룸 프레스 김형진 디자이너의 제안이 시작이었습니다.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 한번 써보면 어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일단 콘셉트와 제목이 마음에 들었고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게다가 워크룸 프레스는 언제나 신뢰하고 좋아하는 디자인 스튜디오라서 책도 잘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죠. 막연히 ‘플레이리스트 책’이라고 했다면 부담스러웠을 텐데, 그래픽 디자이너 이재민이 쓴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 같은 좋은 샘플이 있었고요. 제 책은 음식 평론가 이용재의 《식탁에서 듣는 음악》에 이은 세 번째 시리즈입니다.
— 디렉터님의 단독 저서라면, 디자인이나 에디터십, 콘텐츠 관련한 책을 예상한 이가 많을 듯해요. ‘음악’이 중심 키워드인 책을 쓰기로 하는 데 망설임은 없었나요? 물론 책은 위 모든 키워드를 아우르고 있지만요.
오히려 디자인이라는 주제로 정면 대결(?)을 피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제게 주로 들어오는 기고나 강의 주제들은 디자인과 트렌드, 콘텐츠 같은 것들이 대부분인데, 왜 나에게는 디자인 맛집, 좋아하는 책이나 장소, 음악 같은 건 안 물어보는 거야! 했거든요. (웃음) 디자인이 아니라 마감과 플레이리스트에 관한 책을 제안해 준 게 좋아서, 그 자리에서 바로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 책은 음악을 고르고 50꼭지 정도만 쓰면 되는 것처럼 보여서 심리적인 부담감이 적었고, 무엇보다 ‘플레이리스트’라는 장치가 있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디자인 전문가로 일해 왔으니, 그 의미를 담은 ‘기념 북’을 한 권쯤 내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어요. 하지만 마치 회고록처럼 편집자의 글을 모아서 책을 내는 건 하고 싶지 않았고요.
— 글쓰기가 업무의 중요한 일부였잖아요. 퇴사 후 책을 위한 글을 쓰는 건 좀 달랐어요?
오래전부터 책을 함께 내보자는 좋은 제안을 주신 분들이 많았는데 이제야 책을 낸 이유가 있어요. 제가 욕심만 많고 게으른 탓도 있지만, 더 솔직하게 말하면 마음만 앞섰을 뿐 자신이 좀 없었거든요. 좀 더 실질적인 이유로는 18년 넘게 매달 글을 쓰고 책 만드는 일로 밥 먹고 살았기 때문에 글쓰기나 책에 아주 질려 있었고요. 사실 기자는 책 내기 유리한 직업이라 맘만 먹으면 책을 쉽게 쓸 수도 있었는데, 저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제게는 글쓰기가 나의 발전이나 브랜딩을 위한 일이 아니었고, 매달 잡지를 만들어 독자의 심판(?)을 받는 일이 늘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게다가 글 쓰는 일이 지금도 힘들어요. 쉬운 것은 내 인스타그램에 의식의 흐름을 따라 잡글을 쓰는 정도? (웃음)
하지만 언젠가 일하기 싫어지기 전에 《바이 디자인(by Design)》 같은 책을 한번 써보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내 경쟁 상대는 데안 수딕(Deyan Sudjic )런던 디자인 뮤지엄 관장이 되는 셈입니다. (웃음) 데안 수딕은 건축 잡지 《도무스》와 《블루포인트》의 편집장을 지낸 분이자 디자인 비평가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많은 책을 낼 수 있는지 늘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분의 책을 읽다 그 비결의 일부를 알 것 같았어요. 바로 ‘자료 정리와 리서치를 도와주는 어시스트가 있다’라고 한 대목에서였습니다. 아 역시,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그 말을 위안이자 핑곗거리로 삼았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책의 한 꼭지 제목은 이미 정해 뒀어요. ‘디자인이 너무 중요해서 디자이너에게 맡길 수 없다’. 재미있을 것 같나요?
2. 마감과 음악
— 책은 특정한 음악을 마중물 삼아 디렉터님의 사연과 문화∙디자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책에 실을 음악은 어떤 기준으로 골랐어요?
좋은 음악을 추천해 주는 분은 저 말고도 많을 테니까, 해당 음반과 관련해 제가 잘 알고 있거나 할 말이 있는 앨범을 골랐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 이재민이 책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에서 추천한 음악들은 처음 들어봤어도 정말 좋았거든요. 저는 그렇게 좋은 음악을 추천할 자신은 없었어요. (웃음) 물론 제가 평소 좋아하거나 흥미롭게 여겼거나 마감할 때 들었던 음악들 중에서 골랐지만, 곡 자체가 굉장히 아름답거나 좋다는 이유 외에 할 말이 별로 없는 음악들은 제외했어요. 독자들은 제 감정이나 감각보다는 마감 전문가 혹은 디자인 전문가로서 무슨 얘기를 할지가 더 궁금할 거라고 봤어요.
예를 들어 조이 디비전의 앨범 〈미지의 즐거움(Unknown Pleasures)〉 꼭지는 60세가 넘었지만 여전히 인디 밴드로부터 ‘디자인은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 앨범 커버를 디자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는 ‘어느 유명 디자이너(피터 새빌)의 짜증’에 대한 얘기입니다. 피터 새빌은 조이 디비전의 앨범 디자인으로 유명세를 탄 분이에요. 디자이너이자 음악가, 또 저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모임별의 곡 ‘디자이너들이 죽으러 가는 곳’은 과연 거기가 어딘데? 싶어서 골라봤고요.
시간이 좀 오래 지났지만 정말 힘들거나 즐거웠던 마감을 마치고 밤늦게 퇴근하면서 들었던 음악들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2020년 한여름에 508호 ‘100개의 숍, 100개의 디자인’을 마감할 때 벌어진 모기 대소동 속에서 이어폰 꽂고 들었던 M83의 ‘1987년 일요일 밤(Sunday Night 1987)’ 같은 곡이요. 또 한참 마감 중에 기자들에게는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고선 혼자 박지하의 공연을 몰래 본 후 회사로 돌아와 마감한 일 등 크고 작은 개인적인 에피소드와 관련한 음악 얘기도 있고요. 다시 한번 기자들에게 미안합니다. (웃음)
— 재즈부터 클래식, 국악, OST, 가요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이 등장합니다. 평소 음악을 골고루 듣는 편인가요.
정말 잡다하게 이것저것 들어요. 실험적인 음악도 좋아하고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제 음악 취향을 이 책을 쓰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취향은 거의 영화로 인해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책에 소개한 앨범 역시 영화 〈그녀에게〉, 〈아이 엠 러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피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 OST가 많네요. 심지어 마일스 데이비스도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OST 때문에 알았어요. 어렸을 때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아직 보지 않은 영화를 상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 책의 첫머리에 “나는 원고를 쓰거나 잡지 마감할 때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라고 썼습니다. 그렇다면 디렉터님에게 ‘마감’과 ‘음악’은 어떻게 연결되나요.
마감할 때 음악을 잘 안 들어요. 음악이 좋든 싫든 일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언급한 음악들은 주로 마감을 시작하기 직전이나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갈 때, 마감을 끝내고 들었던 것이 대부분입니다. ‘감히 플레이리스트 책을 낼 만큼 음악을 잘 아냐?’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마감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음악에는 좀 미안한데, 음악에 집중하기는 싫지만 마감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BGM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마감하면서도 듣기 좋은, 제가 찾던 진정한 마감 음악이죠. 보통 이런 음악들은 재생한 지 10분쯤 지나도 비슷한 음이 반복되고 있어요. 집중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죠. 브라이언 이노의 〈앰비언트 1: 공항을 위한 음악 BMG 송(Ambient 1: Music for Airports)〉 같은 앨범이 대표적입니다. 브라이언 이노 스스로도 이 앨범을 두고 “흥미로우면서도 무시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에릭 사티는 집 안의 가구처럼 필요하기는 하지만 특별한 집중을 요구하지 않는 음악을 ‘가구 음악’이라고 표현했는데, 브라이언 이노는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음악을 집 안의 가구에 비유하다니, 좋은 디자인을 ‘평소 눈에 띄지 않다가 필요할 때 나타나는 영국 집사’라고 표현한 디터 람스가 생각납니다. 게리 허스트윗이 감독한 다큐멘터리 〈디터 람스〉의 OST를 실제로 브라이언 이노가 맡았는데, 역시 그는 디터 람스의 팬이었습니다.
하여간 18년간 정기 마감직을 수행하다, 비정규 마감직으로 돌아서서 낸 책 이름이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이라니 아이러니처럼 느껴졌지만, 바꿔 생각해 보니 아마 정기 마감 중에는 절대 책을 못 냈을 거 같단 생각이 드네요. 이 책을 쓰면서부터 마침내 진정으로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을 듣는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글 김유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