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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2

당신을 기다리는 편지가 있는 곳

느린 대화와 위로가 흐르는 제주 편지 공간 ‘이립(而立)’
창밖으로 눈발이 흩날리고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겨울의 초입, 소란스러운 추위를 잠재우듯 고요한 공간 하나가 문을 열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정겨운 이야기가 열매처럼 주렁주렁 걸려 있는 곳, 제주시 한경면에 들어선 편지 공간 ‘이립(而立)’이다. 편지를 정돈하고 차를 준비하다 보면, 빈 종이에 꽉 찬 마음을 적으려 사람들이 서로의 손을 다정히 잡고 이곳을 찾는다. 한 편의 시를 닮은 고소한 음식과 함께, 차가 우려지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나둘씩 꺼내보는 이야기들... 하얀 봉투에 가지런히 접어낸 마음들이 12월의 하얀 눈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간다.
제주시 한경면에 숨은 고요한 편지 공간, 이립 ⓒ 이립

이립의 첫 겨울,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느린 대화를 나눴다. “이립의 시작이 겨울이라 다행이에요. 함께 나눌 이야기가 많은 계절이잖아요.” 처음 문을 연 12월의 초순, 시리도록 춥던 연말연초를 지나, 어느덧 겨울의 끝을 바라보는 2월의 끝자락에 이르기까지 아주 천천히, 우리는 편지 봉투를 열듯 메일창을 거듭해 열었다.

Interview with 김버금

이립 대표 겸 작가

| 첫 번째 편지

: 이립이라는 뜻을 세우기까지

ⓒ 이립

ㅡ ‘스스로 뜻을 세우다’라는 뜻이 감명 깊어요. 뚝심과 겸허함이 느껴지는 이름인데요.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 뜻을 세우기 참 좋은 계절이네요.

이립은 서른 살을 뜻하는 ‘而立’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손님들께서 종종 제가 서른이라 이렇게 지었는지 물어보시는 경우도 있는데, 그보단 스스로 뜻을 세운다는 뜻이 마음에 꼭 들어서 지었어요. 제 이름도 그렇지만 저는 영어보다 한글이나 한자를 더 좋아하거든요. 간결하되 흔하지 않은 이름이 좋고요.

ㅡ 편지를 매개로 한 공간을 만들기까지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그것도 제주에서요! 원래 어떤 일을 하셨는지 살짝 여쭤봐도 좋을까요?

본업은 사실 글을 쓰는 작가예요. 몇 년 전 감사한 기회로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아 그 해에 에세이 작가로 첫 책을 출간했어요. 작가가 된 후로 서울에서 강연과 글쓰기 모임을 활발히 진행했는데 코로나가 시작되며 일이 하나씩 끊기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이러다 망하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다르게 생각하면 서울에 있어야만 하는 물리적 이유가 없어진 것이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가볍게 한달살이를 하러 제주에 왔어요. 그 길로 운명처럼 이곳에 반해 자리를 잡게 되었죠.

나무의 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정겨운 가구들 ⓒ 이립
창밖으로 너른 귤밭이 펼쳐진다. 겨울엔 눈보라가 치며 또 다른 정취를 내기도 한다. ⓒ 이립

무턱대고 제주에 왔지만, 그동안 경험한 것들이 씨앗으로서 제 안에 늘 존재했던 것 같아요. 사람의 이야기가 깃든 공간을 준비해 보고 싶었거든요. 편지를 떠올린 건 서울에서의 경험 때문이었어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많은 분을 만날 수 있었는데, 다들 공통적으로 에세이를 쓰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계셨어요. 그래서 에세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일상의 가벼운 글쓰기로 시작하기를 제안하고는 했었죠. 편지처럼요. 공간에 편지를 접목한다면 글을 통한 느린 대화와 위로를 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ㅡ 이립은 제주 서쪽 바다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온 동네에 자리하고 있어요. 창밖으로 보이는 소담한 귤나무가 무척 정겹네요. 첫눈에 반해버린 이 마을은 어떤 동네인가요?

여러 동네를 돌아다니다 마지막으로 발견했을 때, 보자마자 바로 여기란 생각이 들었어요. 시야를 가리는 건물 없이 나무와 돌담과 너른 귤밭이 펼쳐진 곳이죠. 주위에 상가도, 상권이라 부를 만한 곳도 없지만 제가 첫눈에 반했듯, 이 풍경을 좋아해 줄 사람이 한 분이라도 와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 두 번째 편지

: 기다리는 마음이 모이는 공간

이립에서는 차, 그리고 편지가 준비된다. 둘 다 기다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 이립

ㅡ 이립에서는 커피 대신 차, 책 대신 편지를 만나볼 수 있어요. 이립이 바라보는 ‘차’와 ‘편지’라는 두 오브제는 어떤 사물일까요?

차와 편지는 공통점이 꽤 많아요. 모두 시간을 충분히 들여야 하죠. 저는 이 두 가지를 명상에 비유하곤 해요. 편지에 담기는 이야기는 나에게 오롯이 집중해야만 떠올릴 수 있는 깊은 내면의 이야기니까요. 차 역시 느긋한 기다림이 필요해요. 기다리는 동안 눈으로 빛깔을 보거나, 향으로 맛을 경험할 수도 있죠. 그 의도된 기다림이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줄 거라 생각했어요.

ㅡ 한 편의 편지 같은 메뉴에도 눈길이 가요. ‘서쪽 안개’, ‘시와 섬’ 그리고 ‘단호박 양갱’….

차보다 커피가 익숙하신 분들이 많아 어떤 차를 주문해야 할지 어려워하는 분들이 계세요. 처음에는 블렌딩된 구성 그대로 이름을 표기했는데, 그렇게 다가가는 게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죠. 이름을 바꾸면서, 그 차를 마셨을 때 감도는 향과 느낌을 반영했어요. 새로운 이름을 이렇게 붙이고 나니 차를 어렵지 않고 재밌게 느끼게 되었다는 분들도 계셨어요. 양갱은 차와 잘 어울리는 디저트를 고민하다 만들게 되었어요. 단호박과 쑥 두 가지 맛으로, 계절에 따라 종류에 변화를 주기도 한답니다.

서로 다른 곳에서 모인 사람과 이야기가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 ⓒ 이립

ㅡ 공간도 함께 둘러 보고 싶어요. 편지가 제자리를 아는 듯 고이 놓인 사서함이 돋보여요. 이곳에서 공존하고 있는 이립 다운 가구나 연출의 디테일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요.

이립의 정체성은 편지라는 물성 아닌, 그 안에 담긴 개인의 고유한 이야기예요. 그렇기에 누군가 이립에 들어왔을 때, 이곳에서라면 내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 수 있기를 바랐어요.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와 동선을 연출하는 게 중요한 숙제였지요. 입구로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곳에는 메뉴판 대신, 손님들이 두고 간 편지와 타자기, 이립의 우표와 연필을 배치했어요. 그리고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음악, 우린 차를 천천히 감상할 수 있는 다기, 고요한 사찰의 향이 나는 디퓨져 등 눈으로 보는 것뿐 아니라 감각할 수 있는 모든 요소가 하나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 이립

ㅡ 이립에서는 ‘나를 기다리는 편지’와 만날 수 있어요. 이곳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즐기면 좋을까요?

처음에는 자유롭게 쓰는 편지로 시작했지만, 그 후 매월 주제가 있는 편지를 기획해 현재 시작을 앞두고 있어요. ‘가장 행복한 여름의 기억은 무엇인가요?’처럼 계절의 특성을 담은 질문도 있지만, ‘마음속에 오래 담아둔 후회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나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은 어떤 것인가요?’와 같은 질문들도 있지요. 편지를 쓰는 동안 내 생각을 정리하고, 타인과 편지를 교환해 서로의 이야기를 읽으며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어요.

 

이립의 ‘레터서비스’에는 편지와 차가 포함되어 있어요. 편지를 쓰는 동안 천천히 차를 우릴 수 있도록 다구를 함께 준비해 드리고 있어요. 작성한 편지에 우표를 붙여 사서함에 놓고 갈 수 있고, 교환하여 가져가는 편지에는 그날의 날짜를 새긴 이립의 도장을 찍어갈 수 있답니다. 편지를 쓰고, 놓고, 교환하는 일련의 과정이 이립의 소개말처럼 느린 대화와 위로가 될 수 있게끔 가능한 천천히, 정성껏 준비하려고 하지요.

| 세 번째 편지

: 천천히 이어져 갈 이야기

ⓒ 이립

ㅡ 이립에서 지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편지와 사람을 만나게 되기도 할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나 손님이 있나요?

두 따님이 아버지를 모시고 걸음해주신 적이 있었어요. 세 가족이 나란히 앉아 고요히 편지를 쓰시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친구나 연인, 가족이 제주에 여행을 왔을 때, 모두가 함께 간직하고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드는 데 이립이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지요.

 

ㅡ 이제 또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어요. 이립도 계절을 거듭하며 더 다채로운 사연들을 품게 되겠어요. 앞으로 해 보고 싶은 것들이 있나요?

지금은 이립의 인스타그램에 미리 허락을 구한 편지의 일부를 게시하고 있어요. 편지의 전달자로서 손님들의 편지를 그대로 필사하여 옮기고 있어요. 한 글자씩 필사를 하다 보면 공감이 되고 나아가 그 편지를 쓴 분께 답장을 쓰고 싶단 마음이 들곤 하더라고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편지를 단순히 필사하여 게시하는 게 아니라 짧은 답장을 함께 써서 올리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어요. 그 외에도 편지를 묶어 책을 만들어 보고 싶기도 하고, 오프라인으로 독서 모임과 필사 모임 등 글과 관련한 작은 모임들도 준비하는 게 앞으로의 목표입니다.

딸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편지 ⓒ 이립

ㅡ Ps. 언젠가 이립을 찾을 분들께, 편지를 쓰는 분들께, 혹은 이 기사를 읽을 분들께 추신을 남겨주세요.

처음 공간을 만들 때, 저는 반대로 이립의 마지막을 생각했어요.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이곳이 사람들에게 어떤 곳으로 기억되길 바랄까, 하고요. 이곳에서만큼은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글로 연결된 느슨한 연대와 위로가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요. 이립의 부제는 ‘당신을 기다리는 편지가 있는 곳’이에요. 이 말은 ‘이제는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린다’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평범한 일상을 묵묵히 사는, 그렇기에 나만이 알 수 있고 쓸 수 있는 무언가를 마음속에 오래가지고 있는 당신과, 당신의 이야기를 이곳에서 기다릴게요. 언제나처럼 천천히요.

| 마지막 편지

: 이립’s PICK, 손편지의 정취를 더하는 이립의 물건들

ⓒ 이립

1. 이립 시그니처 우표

편지 서비스를 이용하시는 분들께 드리는 이립의 시그니처 우표 2종. 각각 나무와 소라를 모티프로 만들어졌어요. 숲을 이루는 한 그루의 나무, 귀에 대고 있으면 바다 소리를 들려주는 소라처럼 이립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매개의 공간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 이립

2. 블랙윙 연필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레논이 즐겨 쓴 팔로미노사의 블랙윙 연필. Eras 연필은 블랙윙 602 모델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연필로, 1930년대의 디자인을 복각한 2022년 에디션이에요. 편지 서비스를 이용하는 동안 이립의 각인이 새겨진 블랙윙 연필을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 이립

3. 타자기

책상 위에 자리한 빈티지 타자기. 제주에서 구할 수 없어 서울에서 어렵게 모셔왔답니다.(웃음) 자유롭게 사용해 보실 수 있도록 책상 위에 두었어요. 손님들께서 조용히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예요.

소원 객원 필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이립

장소
이립
주소
제주시 한경면 청수로 82-10, 2F
헤이팝
공간 큐레이션 플랫폼, 헤이팝은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와 브랜드에 주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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