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마다 부산의 가을을 예술로 물들이는 부산비엔날레가 돌아왔다. 지난 9월 3일부터 오는 11월 6일까지 열리는 2022 부산비엔날레는 ‘물결 위 우리(We, on the rising wave)’라는 제목 아래 네 가지 키워드 ‘이주’, ‘노동과 여성’, ‘도시 생태계’, ‘기술 변화와 공간성’을 주목한다. 26개국 64명의 작가(팀)이 참여한 이번 전시는 부산 원도심을 중심으로 한 네 개의 전시장에서 펼쳐진다. 을숙도에 자리한 부산현대미술관,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항만 부산항 제1부두, 근대조선공업의 중심지 영도, 산복도로*로 이어진 도심 지역 초량의 전시장은 각기 다른 배경과 특징을 지녔지만, 부산의 근대화 및 산업화 과정 속에서 가려진 이야기를 품은 곳이라는 공통점으로 이어진다.
* 산 중턱을 이은 도로
2022 부산비엔날레는 근현대기 부산의 역사와 도시 구조 변천 속에 발생한 사건과 상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지역성을 부각한다. 동시에 이는 단순히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동시대 전 지구에서 통용되는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2022 부산비엔날레 김해주 전시 감독은 “이제 글로벌리즘을 넘어서는 전지구적 사고(Planetary Thinking)가 필요한 물결 위의 시점, 변화의 상황에서 전시는 비엔날레가 기반하고 있는 부산이 겪는 특수한 변화와 다른 국가, 자연의 비인간 생명체, 지구 전체와 연결·형성되는 변화들을 인지하며 현재에 대한 질문의 장을 제시하고자 한다.”라며 이번 전시가 지닌 의미를 설명했다.
2018년 개관한 부산현대미술관은 아시아 최대 철새 도래지로 알려진 을숙도에 자리한다. 한때 을숙도는 쓰레기 매립지로 전락하는 등 환경 파괴로 몸살을 앓기도 했으나, 이후 부산시가 을숙도의 생태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재발견하고 지역사회와 함께 보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부산의 도시 발전 과정과 자연 및 생태 환경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인 만큼 그간 부산현대미술관에서는 ‘생태’, ‘환경’ 등을 주제로 한 전시를 중점적으로 선보여 왔다. 이웅열 디자이너와 곽이브 작가가 부산현대미술관 야외공원에 선보인 파빌리온 프로젝트 <Re: 새- 새- 정글(Re: New- Bird- Jungle)>가 대표적이다. 재생 플라스틱 모듈러를 활용해 해마다 을숙도에 찾아오는 철색 ‘쇠백로’ 모형의 공간을 만들었다. 팬데믹 이후 증가한 플라스틱 사용량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환경 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부산의 도시 발전 과정과 자연 및 생태 환경 변화를 소개해 온 부산현대미술관은 2022 부산비엔날레의 시작점 역할을 한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전관을 비엔날레 전시에 할애했다. 애초에 전시와 작품을 위한 실내 공간인 만큼 다수의 영상 작업을 만날 수 있고, 비엔날레가 주목한 네 가지 키워드를 고루 살펴볼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그중에서도 ‘도시 생태계’와 ‘여성과 노동’을 주제로 한 작품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아울러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와 개인사를 엮어 ‘이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김성환 작가의 다중 연구 연작 ‘표해록'(2017-)과 장세진(사라 반 데어 헤이드)작가의 작품 ‘사개월 사백만 광년'(2020)도 눈여겨볼 만하다. 부산현대미술관 전시장은 비엔날레 전시장 중에서 선보이는 작품의 수가 가장 많다. 또한 영상 작업도 가장 많이 설치했기 때문에 3개의 층에 자리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 여유를 두고 방문하기를 권한다.
부산현대미술관 전시장에서 주목할 작가와 작품 5
필리다 발로(Phyllida Barlow)
1층 전시장 입구에 자리한 필리다 발로의 작업 ‘무제: 블루캐처; 2022′(2022)는 압도적인 높이와 크기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철근, 콘크리트, 시멘트, 그물, 각목, 합판 등 공업 재료를 활용한 조각 설치 작업을 선보여 온 작가는 기존의 연작을 바탕으로 신작을 제작했다. 작품 제작 과정에서 바다와 항구, 어업과 조선업 등 부산의 자연 및 산업 환경을 고려해 재료를 선별한 점이 인상적이다. 예컨대 작가는 한때 조선업이 성행했던 영도에서 곳곳에 널브러진 그물을 마주하고 영감을 얻었는데, 실제로 어선에서 사용하는 그물을 수집해 작품으로 활용했다. 위태롭게 매달린 콘크리트 덩어리와 철근 구조물 그리고 그물은 부산의 해양 산업을 상징하며, 지난 세기 변화를 맞이해 온 도시의 산업 생태계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카비바우 마누미(Qavavau Manumie)
캐나다 극지방 도르셋 섬에 자리한 이누이트 마을 킨가이트 출신 작가 카바바우 마누미의 드로잉 작업은 섬세한 표현력으로 눈길을 끈다. 색연필, 종이, 잉크 등 재료는 단순하지만 그가 그려낸 이야기는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누이트의 전설과 신화 그리고 삶을 그려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 놓인 도구에 주목한다. 고래, 펭귄, 말라뮤트 등 북극 동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는 도구의 모습을 그렸다. 때로는 인간과 동물의 공존을, 때로는 적자생존이라는 자연법칙에서 인간의 손을 들어주는 도구의 의미와 위치를 표현했다. 한편 작가는 북극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는 빙하 조각을 통해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드로잉과 색채는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해양 생물과 이누이트의 위기를 극대화한다. 부산비엔날레를 통해 소개한 그의 작품은 ‘전지구적 사고’라는 전시의 결에 부합하는데, 이는 오늘날 직면한 현실 속 문제가 단순히 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구 어느 곳에서나 논의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한다.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스 클럽(Rice Brewing Sisters Club)
손혜민, 신현진, 유소윤이 2018년 결성한 콜렉티브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은 비인간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공동체를 주제로 다채로운 장르를 혼합한 작업을 선보여 왔다. 2022 부산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신작 ‘손엮어풀얽힌갯바위'(2022)를 통해서 이들은 부산의 갯바위와 이를 노동의 터전으로 삼는 여성 맨손 어업인을 주목한다. 지난 5개월 부산에 거주하며 영도와 기장의 갯바위 지형을 탐구하고, 해녀촌에서 해녀들의 맨손 어업을 경험하는 등 갯바위를 중심으로 한 여성 노동 공동체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작품을 제작했다. 신발을 벗고 작품에 올라서는 설치 구조와 구조물 틈에 자리한 해조류 모형은 갯바위 틈에서 자라는 미역, 톳 등 해초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해안 지형 연구를 반영한 공간 환경과 더불어 쭈글쭈글한 손과 다양한 손동작도 곳곳에서 눈길을 끈다. 실제로 해녀가 해초를 수확하고 가공하는 노동 과정에서의 동작으로 맨손 어업인의 체화된 지식과 산업의 그림자에 가려진 그들의 존재감을 강조한다.
피아 뢰니케(Pia Rönicke)
덴마크 출신의 작가 피아 뢰니케는 설치 및 영상 작업 ‘이름도 없이'(2004-2007)에서 덴마크 유명 조명 브랜드 ‘르 클린트(Le Klint)‘에게 자신의 이름을 빼앗긴 르 클린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종이에 주름을 잡아 만든 갓 모양 램프로 알려진 ‘르 클린트’의 독특한 디자인은 1901년 그녀의 할아버지 페데르 빌헬름 옌센 클린트(P.V. Jensen Klint)가 처음 시도했다. 당시 종이를 접어서 주름을 만든 조명 디자인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는데, 가능성을 알아차린 그녀의 아버지 타게 클린트(Tage Klint)가 1943년 클린트 가의 조명 디자인을 사업화했다. 르 클린트 조명 디자인은 종이를 접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손으로 종이를 접는 단순노동은 주로 클린트 가의 여성들에게 부여되었고, 이들은 마치 종이 접는 기계와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았다. 반면 클린트 가 여성의 노동으로 성공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온전히 남성의 몫이었다. 무엇보다 타게 클린트는 자신의 딸의 이름을 사용해 조명을 판매하기 위해 계약서 동의를 강요했고, 이후 25년이 지나서는 조명 판매의 수익금을 그녀의 형제에게 넘기다는 서류에도 서명하도록 했다. 작가는 이름을 빼앗긴 르 클린트의 이야기를 통해 눈에 드러나지 않는 여성의 노동과 평등하지 못한 대우는 개인과 국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해 산업 어느 곳에서나 나타나는 문제임을 말한다.
감민경(Kam Min Kyung)
부산에서 나고 자란 감민경 작가는 그간 부산에서의 경험과 기억 속 장면을 캔버스 위에 옮긴 신작 회화 세 점을 소개한다. 전시장 동선 상 가장 먼저 마주하는 ‘동숙의 노래'(2022)는 화면 가득 그려낸 인물의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가 살았던 시대의 여인상을 ‘동숙’이라는 인물로 설정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또렷한 눈동자, 굳게 다문 입은 당시 혼란스러웠던 시대 상황과 어렵고 가난한 환경을 버텨내는 여성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2개의 종이를 이어 붙인 ‘0시의 땅'(2022)은 전시장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르는 높이로 대형 회화 작업의 스케일감을 선사한다. 거대한 화면 위로 작가는 부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보고 들은 기억과 지난 향수를 펼쳐 보인다. 아울러 ‘파도'(2022)에서는 어린 시절 살았던 집에서 본 곰팡이에 대한 인상을 물감으로 재현했다. 도시의 발전 과정 속에 사라진 자신의 기억과 추억 그리고 도시에 담긴 개인의 서사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글 이정훈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2022 부산비엔날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