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공립디자인미술관으로 등록한 우리나라 유일의 공립디자인미술관 DDP에서 열리는 첫 기획전이 자하 하디드 건축사사무소(Zaha Hadid Architects, ZHA) 전시라는 것이 흥미롭다. DDP 박무호 전시기획자는 건축을 통한 다른 분야를 살펴보길 원한다면 ZHA가 단연코 최고의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VR, 게임, 패션 등 건축이 아닌 다른 장르와의 협업이 다채롭고,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전시를 보여주기에 가장 탐구할 만한 건축사사무소라는 것. 전시를 통해 ZHA가 겉보기에만 멋진 비정형 디자인의 건축사사무소가 아니라, 첨단 기술을 활용한 데이터 분석에서 그 멋진 디자인들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 DDP 현상 설계 과정에서도 동대문 상권을 분석한 데이터 베이스를 디자인에 접목해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전시는 <혁신적인 프로세스와 연구>, <상상하는 디자인과 가상 세계>, <실감형 기술과 융합> 등 3개 섹션으로 구성된다. 건축이 이렇게 다양한 영역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첨단 기술의 발전을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다. 단지 눈으로만 보는 전시가 아니라, 게임·이머시브 룸과 같은 참여 프로그램도 있어서 관람이 흥미롭다. 특히 문화 융합에 관심이 높은 이들과 새로운 분야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청소년이라면 기대 이상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 메타버스, 블록 체인, AI, 친환경, VR과 같은 최신 소재를 반영해 선두적으로 미래를 연구하는 ZHA의 역량에 흠뻑 빠져보자.
자하 하디드 비정형 디자인의 비밀
건축과 미디어 아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시작된 미래>는 첨단 기술을 가장 빨리 적용하는 매체인 건축과 미디어 아트의 관계도 조망할 수 있는 전시다. 자하 하디드(Zaha Hadid)와 레픽 아나돌(Refik Anadol)은 DDP 역사에 중요한 방점을 찍은 작가이다. 첫 기획전이 자하 하디드 건축사사무소 전시이며, 세 번째 전시 섹션에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의 협업 작품을 포함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하 하디드는 2016년 세상을 떠났지만, 자하 하디드 스튜디오는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공동대표 패트릭 슈마허(Patrik Schumacher)가 있다. 이번 전시는 자하 하디드 스튜디오의 첨단 프로젝트뿐 아니라, 미디어 아티스트 래픽 아나돌이 자하 하디드 스튜디오의 대표 건축물을 영상으로 만든 작품도 선보인다는 것이 특징이다.
자하 하디드는 2014년 DDP의 개관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자신의 건축물을 선보였다. 막대한 제작비와 흔치 않은 디자인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DDP는 서울의 랜드마크로 우뚝 섰다. 동대문운동장 부지 형태를 디자인에 도입해 건축물 자체를 새로운 지형으로 만든 것. DDP 개관을 기념해 건축에서부터 가구와 패션 디자인까지 아우른 전시 <자하 하디드 360도(ZAHA HADID_360°)>도 열어 서울을 축제로 물들였다. 그녀는 2004년 여성미술가로서는 최초로 프리츠커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으나, 2016년 건강 이상으로 짧은 인생을 마쳤다.
레픽 아나돌은 DDP의 대표 축제인 서울라이트(Seoulight)가 처음 개최되었던 2019년부터 2021년까지 DDP 외관을 캔버스로 삼아 미디어 작품을 전시해왔다.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Refik Anadol Studio, RAS) 역시 DDP 전시로 우리나라에 첫 선을 보였으며, 첨단 기술을 활용해 자신만의 독창적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 ZHA와의 공통점이다. 두 스튜디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DDP디자인뮤지엄 기획전 <시작된 미래(Meta-Horizons: The Future Now)>는 ZHA의 가장 특별한 전시이다.
그간 ZHA의 전시는 세계적으로 꾸준히 선보여왔다.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2021년 상하이현대미술관(Modern Art Museum in Shanghai)의 <ZHA 클로즈업-워크&리서치(Close Up – Work&Research)>, 2022년 홍콩 디자인 인스티튜트(Hong Kong Design Institute, HKDI)의 <ZHA: 버티컬 어바니즘(Zaha Hadid Architects: Vertical Urbanism)> 전시가 열렸다.
하지만 <시작된 미래>는 레픽 아나돌과의 협업 작품을 포함하고 있으며, 전시 주제가 코로나19 시대의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상하이와 홍콩 전시가 ZHA의 지속 가능한 공동체 생활을 위한 제안을 보여주는 전시였다면, <시작된 미래>는 ZHA가 그리는 미래를 보여준다는 것이 특징이다.
DDP는 전시 주체로서 두 스튜디오 최초의 협업을 제안했으며, RAS는 ZHA가 지금까지 디자인한 모든 작업의 데이터를 AI가 해석한 내용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는 2019년 RAS의 DDP 첫 전시에서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담기 위해 수백만 개의 SNS 이미지와 과거 이미지를 모아서 머신러닝(Machine learning)을 통해 재해석했던 방식과 연결된다.
ZHA의 건축물들을 실제로 모두 보기는 어렵다. 물론 운이 좋은 사람이라면 세계를 누비며 모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레픽 아나돌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상징적 건물 중 하나인 DDP에서 관람객이 AI와 함께 그녀의 작품에 관한 꿈을 꾸도록 만든 것.
특히 디지털 기술에 바탕을 둔 두 스튜디오가 대중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작품을 추구한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레픽 아나돌은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예술이 가진 치유의 힘을 믿는다. 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미디어 아트가 대중에게 명상과 회복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자연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겠지만, 진심을 담은 아름다움은 매체에 상관없이 모두를 감동시킬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이 창출하는 아날로그 감동은 전시 제목과 같이 ‘시작된 미래’에 우리가 이미 들어섰음을 실감하게 한다.
미래는 선구자만이 꿈꾸는 것
과거와 현재도 물론 중요하지만, 미래를 먼저 시작하는 것은 선구자만의 특권이다. 자하 하디드와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가 몰두하고 있는 미래는 범우주적이고, 다학제간이고, 다감각적인 융합의 용광로이다. 자하 하디드와 레픽 아나돌은 태생에서부터 비슷한 면이 있다. 이라크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자하 하디드와 터키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레픽 아나돌은 어린 시절에서부터 범세계적 자아를 확립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고향 이라크와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 지역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기까지 보이지 않는 인종과 종교, 국가와 장르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 그들은 큰 노력을 했을 수밖에 없다.
‘융합’은 이들의 최근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화두다. 이들은 메타버스, 블록 체인, AI, 친환경, VR과 같은 소재를 일찍이 반영해 선두적으로 미래를 연구해왔다. ZHA가 2015년 첫 선을 보인 리버랜드(LIBERLAND)와 RAS가 2012년 시작한 데이터랜드(DATALAND)를 비교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이번 전시 두 번째 섹션 에서 관람할 수 있는 리버랜드는 웹 3.0을 바탕으로 메타버스에 새로운 국가 모델을 선보인 것인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분쟁지역에도 리버랜드를 구축할 예정이라니 놀랍다. 전시장에서 리버랜드의 영상과 모형을 만날 수 있다.
데이터랜드는 RAS가 진행하는 건축, 데이터, 뇌신경과학을 아우르는 스토리텔링 실험이다. 인식, 존재, 감각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한 여러 분야의 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 최초의 다감각적 메타버스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몰입을 중시하는 RAS의 이번 작품에서도 데이터랜드의 연구 결과를 미리 예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시작된 미래>는 범우주적 협업의 장이기도 하다. ZHA는 미래에 대한 영감을 받기 위해 다채로운 팀과 손을 잡았다. 첫 번째 섹션의 메인 작품인 ‘스트리아터스(Striatus)’ 다리와 ‘비야부(Beyabu)’는 각각 스위스 취리히연방공과대학(ETH Zurich), 컴퓨터 엔지니어링회사 ZHACODE·AKT II와 함께 연구한 작품이다. ‘스트라이터스’는 지난해 베니스에서 선보인 친환경 다리이다. 3D 프린터로 콘크리트를 출력해 내부 철근과 같은 보강제 없이 제작된 최초의 다리로 알려졌다.
‘비야부’는 온두라스에 만들어질 친환경 주거시설인데,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디지털 공간에서의 재산권도 부여된다는 것이 재미있다. 두 작품은 영상과 모형을 통한 생생한 감상이 가능하다. ZHA는 게임 회사 PUBG가 제작한 ‘배틀 그라운드’의 새로운 버전에서 게임 속 건축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ZHA의 이러한 도전은 메타버스가 미래의 혁신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건축사사무소 중 하나이지만 이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과 가상에서 동시에 도시 개발에 나서고 있는 ZHA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대상이 건축이든 액세서리이든지 간에, 건축가는 최종적으로 사용자를 위해 디자인을 합니다. 건축의 원리와 아이디어는 다른 분야의 디자인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는 상호 협업을 통해 가능하며, 실행 과정을 통해 서로 다른 분야에 공헌할 수 있습니다.” 자하 하디드는 건축뿐 아니라 가구, 주얼리, 상들리에, 구두, 미디어 아트 등 다채로운 분야에 몰두했으며, 이러한 다학제간의 소통을 즐겼다.
21세기 전시를 감상하는 새로운 방법
특히 이번 전시는 관람 방식에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건축 전시는 비교적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왔지만, 전시장에서 건축물 실물을 그대로 보여주기 어렵기 때문에 생동감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런 점에서 세계 최고의 건축사사무소 작품을 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에서는 새로운 관람 형식의 진화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어, ZHA가 선보이는 ‘프로젝트 코렐(Project Correl)’은 관람객이 참여해 디지털 공간에 건축물을 설계할 수 있는 VR 작품이다. 최대 4명의 관람객이 동시 접속해 전시 기간 동안 건물 디자인을 설계하게 된다고 하니, 인기를 모을 것으로 보인다. 콘텐츠를 바라보는 것에서 만족해야 했던 전통 건축 전시 관람에서 벗어난 방법이다.
더불어, RAS의 미디어 작품은 단순한 시청각 경험을 넘어 디지털 기술을 건축 디자인에 적용한다. 이러한 장소 특정적 설치 작품은 관람객의 몰입의 극대화할 수 있기에, 조만간 후각적 요소도 작품에 포함할 예정이라고 한다. 레픽 아나돌은 메타버스가 현실과 결합해 새로운 미래를 만들 것이라는 확신을 작품에 반영한다. 이번 협업 작품에서도 디지털 기술은 단순히 비인간적 존재가 아니며, 기계 알고리즘은 인간과 상호작용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두 선구자에 의해 이미 시작된 미래를 DDP 디자인뮤지엄에서 경험해 보자. 미래는 준비된 사람에게 먼저 찾아오는 법이다.
글 이소영 객원 필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DD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