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가을, 단풍은 멀리 떠나야만 볼 수 있는 풍경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도심 내에서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서울시는 2025년 가을을 맞아 ‘서울 단풍길 110선’을 발표했다. 총 167km에 이르는 단풍길에는 약 7만 2천 그루의 나무가 있다. 지난해까지 선정된 103곳에 안양천제방길, 목동13단지사잇길, 올림픽로 등 7곳이 새롭게 추가되며, 도심 생활권에서 가을을 마주할 수 있는 선택지가 한층 확장됐다.
‘서울 단풍길 110선’은 도심 속 걷기 좋은 단풍길, 물을 따라 걷는 단풍길, 공원과 함께 만나는 단풍길, 산책길에 만나는 단풍길까지 총 4개의 테마로 나뉜다. 테마별 추천 단풍길과 가을의 정취를 누릴 수 있는 카페를 함께 추천한다.
정동길
도심 따라 단풍길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정동사거리로 이어지는 정동길은 덕수궁 돌담과 근대 건축물이 나란히 놓인 산책로로 도시가 감내한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 개신교회인 정동교회, 한국 최초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를 복원한 정동극장, 을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 등이 있으며 러시아, 캐나다, 뉴질랜드 등 각국 대사관 건물들도 모여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길을 따라 심어진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가을이면 부드러운 황금빛으로 거리가 물들인다.
르풀(Le Pul)
르풀 테라스 자리는 늘 인기다 출처: 르풀 인스타그램
정동길의 결을 그대로 닮은 샌드위치바 르풀. 독특한 비주얼을 내세운 음식과 공간에 피로감을 느끼던 찰나에 발견한, 모처럼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공간이었다. 유기농 재료로 만든 샐러드, 식사 대용으로도 훌륭한 파니니 샌드위치는 비주얼부터 맛까지 기교가 없어 오히려 단단하다. 2011년부터 거리를 지킨 르풀은 이제 정동길을 찾는 이들의 추억까지 담은, 반가운 공간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 상업 신문인 신아일보 사옥으로 사용되던 건물 1층에 자리하고 있으니 근현대 건축이 궁금하다면 식사 후에 천천히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안감내길
걸음 따라 단풍길
출처: 푸에블로 인스타그램
성북구청에서 대광중학교로 이어지는 길로 안암천(성북천)의 옛 이름인 안감내에서 유래했다. 분위기 좋은 카페와 빈티지 숍을 찾을 수 있는 스폿으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보문역 인근 성북천 길이다. 어느 계절에 가도 평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지만, 성북천 옆 보도를 따라 자라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이 계절에는 특히나 아름답다. 특별한 뷰포인트를 찾기보다는 천천히 걷고 쉬며 산책하기에 좋다.
푸에블로(Pueblo)
구석구석 둘러보는 재미가 있는 푸에블로 출처: 푸에블로 인스타그램
취향으로 채워진 공간은 대단치 않아도 오래도록 흥미롭다. 나와의 접점을 찾기도 하고, 전혀 다른 결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맨체스터시티 굿즈와 사랑에 관한 방명록, 김승일 시집과 쳇 베이커 LP까지 푸에블로는 툭툭 튀는 결이 자연스럽게 섞여있다. 카페라기보다는 막 친해진 친구의 집에 들른 듯한 느낌이랄까. 예능 프로그램 〈피지컬 100〉에 출연하기도 했던 사장님은 피트니스 모델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카페 곳곳에는 그가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어, 공간의 정체성을 완성한다. 당고 페르페와 모나카 등 일본 디저트류가 인기다.
중랑천 제방길
물 따라 단풍길
군자교부터 이문수변공원까지 길게 이어지는 중랑천 제방길은 하천을 따라 걸으며 계절의 청량감을 느낄 수 있는 코스다. 중랑천 양방향으로 벚나무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봄이면 흐드러진 벚꽃을, 가을이면 차분한 단풍 풍경을 볼 수 있다. 전체 길이는 약 5.6km로 속도를 조절하며 오래 걷기 좋은 완만한 구간이다. 최근 환경 정비를 통해 황톳길이 조성되면서 맨발 산책이 가능한 구간도 마련되었다.
탐석과 사랑(findourlovelovelove)
영화, 책, 음악 등 취향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출처: 탐석과 사랑 인스타그램
혼자 방문하고 싶은 곳이 있다. 적당히 고요한 소음으로 덮인, 그리고 진득한 이야기가 담긴 공간. 올해 서울 휘경동에 문을 연 ‘탐석과 사랑’이 그렇다. 중랑천을 걷다가 회기역 방면으로 방향을 살짝 틀면 건물 2층에 탐석과 사랑이 있다. 어린 시절, 마음에 드는 돌을 이리저리 찾아 헤매던 기억에서 출발해 좋아하는 것을 함께 나누는 공간을 만들었다. 핸드드립 커피와 교토 우지산 말차를 이용한 말차 티라미수가 시그니처이며 커피 외에 진토닉, 하이볼 등 간단한 주류도 즐길 수 있다. 주인장이 선곡한 음악 소리를 배경으로 한껏 미뤄둔 독서가 하고 싶어지는 곳이다.
남산 북측순환로
공원 따라 단풍길
남산 북측 사면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다. 1991년 기존 차도를 장애물이 없는 보행길로 정비해 노약자도 무리 없이 이용하도록 했다. 제갈공명을 모신 사당인 와룡묘, 단풍이 절경을 이루는 남산골한옥마을 등 역사·문화 지점과 연결되어 있어, 산책과 감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코스다. 무엇보다도 차량 통행이 없는 보행자 도로라 도심의 소란을 잊은 채로 산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멜리(MELLY)
사장님의 밝은 에너지가 공간을 채운다 출처: 멜리 인스타그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계절은 종종 감정을 가라앉히기도 한다. 단풍놀이의 여운을 밝고 기운차게 가져가고 싶다면 멜리가 어울린다. 남산 산책 후 후암동 방면으로 내려오면 은행잎을 닮은 노란빛의 카페 멜리가 보인다. 멜리는 호주식 커피 문화를 지향하는 스페셜티 카페다. 사장님은 호주 멜버른에서 바리스타로 근무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곳에서 익힌 커피 맛과 스몰토크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친근한 서비스를 구현하고 싶었다고. 공간 전체를 채우는 밝은 에너지 덕분에 머무는 동안 절로 표정이 부드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