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지 몰랐던 것과 제대로 만나는 순간, 누군가의 삶은 영영 바뀌기도 한다. 나기정 탭샵바 대표의 인생도 그러했다. 20여 년 전 영국에서 와인이 일상에 어떤 윤기를 더하는지 경험한 그는, 한국에서도 와인을 일상적으로 마시는 문화가 퍼지길 바라며 쉴 새 없이 달려왔다. 오랜 세월 쌓아온 경험 끝에 내린 결론이 탭샵바라고 말하는 나기정 대표. 그는 탭샵바를 통해 어떤 꿈을 꿀까.
Interview with 나기정 탭샵바 대표
— 20년 동안 와인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와인에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와인 자체에 힘이 있어요. <신의 물방울>이라는 와인 만화가 유명하잖아요. 정말 신의 물방울이라는 표현이 맞다고 생각하곤 해요. 와인의 종류는 수십만 가지예요. 한국에 들어온 것만 7만여 종이고요. 토양, 기후, 포도 품종, 생산자… 와인 맛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정말 다양해요. 모든 와인이 저마다 이야기를 다 품고 있죠.
— 탭샵바는 대표님의 아홉 번째 F&B 브랜드예요. 와인주막차차, 한잔차차 등 이제까지 걸어온 길에서 와인을 편히 즐기는 문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언제부터 와인 대중화라는 꿈을 품게 됐나요?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영국의 와인 문화에 강한 인상을 받았어요. 홈스테이를 했는데, 저녁식사를 할 때면 호스트 할아버지가 와인을 꼭 한 잔씩 곁들여 내주셨어요. 딱 한 잔인데 일상이 특별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20년 전 기억인데도 여전히 생생해요. 어느 날엔 런던에 갔어요. 런던 금융가의 퇴근 시간이었죠. 정장을 입은 여성이 일을 마쳤는지 구두를 운동화로 갈아신더군요. 그리고 펍에서 로제 와인 한 잔을 주문하고 마신 후 곧바로 떠났어요. 그 모습이 놀라우면서도 신선했어요. 영국에 가기 전까진 와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서였을까요? 그때 경험한 와인의 맛과 문화가 제 혀, 코, 귀는 물론이고 머리와 가슴까지 고스란히 흘러들어왔어요. 자연스레 한국 시장에 와인을 대중화하는 방법에 관한 논문을 쓰게 됐죠. 환경만 마련되면 한국인들이 이런 문화를 무척 반길 거라는 확신도 있었고요.
—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부터 했나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와인 수입사에서 MD로 일하면서 유통을 배웠어요. 이탈리아와 미국을 담당하며 해외 파트너와 관계를 만들고, 수입한 와인을 국내 시장에 퍼뜨리면서 유통 과정과 와인 업계에 대한 이해도를 쌓았죠. 그 후 창업을 했어요. 와인을 대중화하려면 무엇이 필요할지를 생각해 봤어요. 와인이 저렴해져야 할 뿐 아니라 와인을 마시러 편히 들어갈 공간도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죠. 그래서 한식과 와인을 페어링하는 와인차차를 론칭했어요. 와인을 과감할 정도로 싸게 팔아보려고 와인도깨비를 론칭했고, 부라타랩에서는 처음 탭을 시도해 봤고요. 전부 와인 대중화라는 꿈을 품고 시도한 일들이에요. 다만 경험을 쌓는 동안에는 서툴렀던 것뿐이죠. 언제나 그때 내가 만들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만들어 왔어요.
— 그렇다면 탭샵바는 수많은 시도와 경험 끝에 론칭한 브랜드군요. 어떤 점을 보강했나요?
탭 사업이 쉽지 않아요. 영국에서도 탭 사업이 망하는 걸 수없이 봤어요. 우선 탭 관리가 어렵죠. 탭은 술의 맛과 직결돼 있기에 제대로 관리해야 하는데, 관리법을 매뉴얼화하고 교육하기도 어렵고요. 무엇보다 탭의 본질은 테이스팅이니까 술의 종류가 다양해야 해요. 다양하게 갖추려면 집객이 되어야 하고요. 탭에 사용하는 와인은 아무리 잘 관리하더라도 2주 후에는 버려야 해요. 손실이 날 수밖에 없어요. 탭만으로 수익을 내기는 쉽지 않아요. 그래서 탭과 샵, 바를 한데 모은 브랜드여야만 했어요. 탭샵바는 이전의 시도와 실패를 통해 도달한 결론이에요. 정말 온갖 시도를 다 해봤으니까요. 제 모든 경험의 총체랄까요.
— 음식 메뉴를 중요하게 여기는 건 페어링이 와인 대중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믿기 때문인가요?
물론 그 이유도 있지만, 탭샵바의 경쟁력이 되리라고 생각해요. 국내 와인 시장이 커지면 와인 가격 면에서 경쟁력을 갖는 업체는 계속 늘어날 거예요. 그런데 음식 잘하기는 쉽지 않거든요. 특히 단일 점포가 아니라 확장하려는 프랜차이즈 F&B 브랜드로서는 더더욱 그렇죠. 전 매장에 좋은 재료로 균일한 퀄리티의 음식을 내는 일에는 노하우가 필요해요. 탭샵바에 구축한 주방 오퍼레이션이 제겐 큰 경쟁력이에요. 무엇보다 신선한 음식을 내놓으려 해요. 독특하고 개성 있는 메뉴가 끊임없이 나오는 시장이지만, 결국 사람들이 질리지 않고 오래 찾는 음식은 재료가 신선한 음식이더군요.
— 탭샵바 메뉴 중에선 굴이 특히 인상적이에요. 오이스터 바를 전면에 드러내고 있고요. 왜 굴이었어요?
클래식한 걸 좋아해요. 클래식이란 정말 오래 이어져 왔기 때문에 클래식이죠. 탭샵바도 그렇게 만들려고 했어요. 튀는 인테리어보다는 아늑한 인테리어를 지향하고, 소음을 잘 차단해서 편안히 대화하는 공간으로 만든 이유죠. 화이트와인을 다루는 공간으로서, 어떤 메뉴를 선보이는 것이 클래식일지 생각했어요. 명료하더군요. 굴, 캐비어, 스테이크. 그래서 굴이었어요. 통영에서 삼배체 굴이 생산된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통영에 가서 생산자들을 직접 만났고 파트너를 찾았어요. 덕분에 일 년 내내 굴을 수급하게 됐죠.
— 탭샵바의 시스템에서는 웹 애플리케이션의 역할이 중요해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금액 충전과 결제가 이뤄지죠. 또 내가 어떤 와인을 탭 해 마셨는지, 현재 각 지점의 탭으로는 어떤 와인을 마실 수 있는지 정보도 다 나오고요. 고객 맞춤 와인 추천이나 큐레이션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당연하죠. 맞춤 큐레이션은 웹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한 이유이자 탭샵바 비즈니스의 주요 영역이에요. 줄곧 오프라인 사업을 해왔기에 오프라인 영역에는 자신이 있어요. 상대적으로 온라인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고요. 그런데 코로나19 시기에는 오프라인 사업이 맥을 못 췄어요. 온라인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죠.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해 데이터를 쌓고 큐레이션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려봤어요.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결합하면 시장을 뒤흔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어떤 그림을 그렸죠?
영국에 베리 브라더스 & 러드(Berry Bros. & Rudd)라는 수백 년 된 와인 샵이 있어요. 전 세계 재벌들이 다 거기서 와인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예요. 고객 리스트와 그들의 취향 큐레이션 데이터가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부터 이어져 온 거예요. 그들은 여전히 단골의 취향에 맞춰 와인을 추천해 준대요. 그런 곳은 사라질 수가 없거든요. 데이터와 큐레이션은 정말 중요해요. 저는 오래전 명함을 받으면 그분 특징과 취향을 손으로 기록한 후 엑셀로 정리하곤 했어요. (웃음) 일을 확장하려면 메모와 엑셀만으로는 더 이상 안 되는 거예요. 온라인은 제가 뛰어들어야만 하는 영역이었어요.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좋은 와인을 저렴하게 선보이는 가격 경쟁력을 갖추려면 온라인은 필수예요. 배송과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커머스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자연스러운 수순이고요.
— 와인 배송 커머스에서 어떤 가능성을 봤나요?
해외에서는 이미 주류 배달 서비스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어요. 전 세계적인 흐름이에요. 한국에서도 가능성이 증명됐죠. 온라인에서 주류를 구매하고, 특정한 장소에 들러 직접 픽업하는 서비스가 성공했잖아요. 탭샵바는 수많은 와인을 보관하고 배송이 시작되는 플랫폼으로 기능할 거예요. 좋은 와인을 다양하게, 합리적인 가격에, 빠르게 들여놓는 플랫폼이죠. 지금은 차근차근 준비하는 시기예요. 많은 와인을 수급·관리하고 재고를 파악하며, 온오프라인 재고를 연동하는 시스템을 세팅하는 시기죠.
— 일본 도쿄로 진출을 염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도쿄와 영국 런던, 미국 뉴욕과 LA를 같이 살피고 있어요. 어디가 먼저 이뤄질지는 모르겠지만요. 탭샵바의 웹 애플리케이션 시스템은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기에 해외에도 쉽게 적용할 수 있어요. 또 해외의 주류샵 겸 바 사례를 살펴보면 음식을 매우 간소화한 곳이 많아요. 보틀 판매에 주력하는 거죠. 탭샵바는 음식 메뉴 오퍼레이션도 탄탄히 갖추고 있으니 그런 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어요. 애초에 와인주막차차를 론칭했던 이유도 런던에 가져가기 위해서였어요. 당시 영국에서 맛본 한식 레스토랑의 요리들이 실망스러웠거든요. 와인과 한식을 엮어서 영국에서 비스트로를 하자는 게 제 첫 사업 아이디어였어요. (웃음) 언제나 해외 진출을 꿈꾸고 있었죠.
— 인터뷰를 하면서, 대표님의 비전뿐 아니라 단호하고 명징한 어조에도 깊은 인상을 받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확신하는 자의 말이라고 느껴져요. 만에 하나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언어요.
끊임없이 최선을 다해봤으니까요. 망하기도 했지만요. 끝없이 시도하고 과정을 거치면서 확신이 생겼어요. 그 시간들이 저를 스스로 믿게 했어요. 확신이 생기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편인데요, 일단 내 안에 확신이 생기면 잘 믿고, 오랫동안 믿어요. 의심하지 않죠.
— 탭샵바를 통해 꾸는 꿈의 구체적인 장면이 있나요.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가 보세요. 지금까지 탭샵바에서 내가 몇 잔을 마셨는지 숫자가 떠요. 그 숫자가 1000이 되는 사람을 보는 날을 상상해요. 또 탭샵바가 해외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날을 그려보죠. 애플리케이션으로 각 지점의 탭 와인 리스트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다른 나라 지점의 탭 리스트를 확인하는 날을 그려보고요.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꿈에는 퍽 가까워진 것 같아요. 어느 일요일에 어떤 커플이 와서 안주도 없이 리슬링 한 병만 시켰어요. 한 분은 뜨개질을 하고 한 분은 책을 읽으면서 네 시간을 보내고 떠났죠. 휴일에 네 시간, 일상적인 행위를 하러 들른 거예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요. 탭샵바를 거실처럼 이용한 거죠. 또 언젠가는 80대쯤 되어 보이는 어르신이 오셨어요. 저 스탠드 자리 꼭대기에 앉아서 잔 와인을 두 잔 마시며 책을 읽으시더군요. 어르신들이 아예 발걸음을 들이기 어려운 분위기의 공간이 많잖아요. 탭샵바는 나이에 상관없이 편안하게 들어서서 머무를 수 있는 곳이구나, 싶어서 기뻤어요.
TPO
나기정 대표의 추억 속 와인 공간
— 와인업계에 몸담으면서 수많은 와인 바나 와이너리를 경험했을 거예요.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인가요?
와인 수입사에서 일할 때 이탈리아에 자주 갔어요. 피렌체와 키안티를 오가면서 회의도 하고 프로모션을 진행했죠. 그 근처에 볼게리Bolgheri라는 지역이 있는데, 그곳에서 자고 일어났을 때의 개운함을 잊지 못해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기운이 나더군요. 와인 생산지의 좋은 공기와 습도 속에 있으면 건강해진다고 생각하게 됐죠. (웃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기분이 너무나 생생한데 그 후 한 번도 그렇게 일어나본 적이 없어요. 피렌체, 키안티, 피에몬테…. 이탈리아가 참 좋아요. 유적도 건축물도 많고 시골 풍경은 정말이지 아름답고, 훌륭한 와이너리가 곳곳에 있죠. 심지어 맛있는 와인이 정말 저렴하고요. (웃음)
*3편에서 계속됩니다.
글 김유영 기자
사진 표기식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탭샵바, 쓰쿠루
프로젝트 캐비닛은 참신한 기획과 브랜딩, 디자인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헤이팝 오리지널 시리즈 입니다. 격주 목요일, 영감을 주는 프로젝트들을 꺼내 보세요.
[Project Cabinet] 당신의 곁에 와인 한 잔을, 탭샵바
: file no.2 : 와인으로 꾸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