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1

‘눕독’ 권하는 도서관,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②

: file no.2 : 취향을 제안하는 박물관 큐레이터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천년서고는 큐레이터와 건축가, 그리고 사서의 협업으로 탄생한 결과물이다. 그중에서 이번 프로젝트를 견인한 건 바로 김대환 큐레이터. 대게 박물관 큐레이터를 떠올리면 유물을 관리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가 정의하는 오늘의 큐레이터 역할은 우리가 알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유물이 아닌 관객이 중심인 박물관. 취향을 고려한 공간과 전시. 이것이야말로 동시대의 박물관 사람들이 지향해야 하는 지점임을 말한다. 신라천년서고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

interview with 김대환 국립경주박물관 큐레이터

고향 경주로 돌아온 그는 경주국립박물관과 연이 깊다. 초등학교 재학 시절 내내 어린이 박물관 학교에서 수업을 들었다. 일명 ‘뮤지엄 키드’.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 대학교에서 고고학과 박사를 마쳤다. 귀국 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재직했으며 2016년에는 문화재청 파견으로 경주 금관총 전시관 설계를 추진했다. 이후 2021년부터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재직하며 신라천년서고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된 도서관을 갖춘 곳이 바로 국립경주박물관입니다. 신라천년서고 프로젝트에 임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먼저 국립경주박물관이 보관 중인 귀한 장서가 많았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부터 경주가 신라 유적의 도시를 대표하는 만큼 관련한 모든 자료가 이곳에 있었죠. 다만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았고 연구자들에게만 부분적으로 공개되어 왔어요. 그래서인지 내외부적으로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자료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있었어요. 연구자들의 경우 학회에서 제가 발표한 자료의 출처를 궁금해서 물어보시는 분들도 많았고요. 관객에게는 전시 도록을 보고 싶은데 어디서 구할 수 있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습니다.

 

ⓒTexture on Texture

결과적으로는 타이밍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관내에서도 우리가 지닌 자료를 비롯해 박물관 건축 도면, 유물 실측 기록물 등 관사에 관한 아카이브 자료를 모두가 편하게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거든요. 활용할 수 있는 예산도 확보했었고요. 즉, 아카이빙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신라천년서고’라는 도서관으로 프로젝트가 확장된 셈이죠.

경주국립박물관 관내 지도

— 과거 수장고로 사용된 ‘서별관’을 ‘신라천년서고’로 탈바꿈시켰어요. 서별관은 박물관 부지 내에서도 소외되다시피 해 온 건물이었다고요.

월지관 뒤에 자리한 서별관은 사실 처음부터 수장고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은 아닙니다. 원래는 일반 사무실이었던 곳이었어요. 말씀처럼 박물관 부지 내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공간이었고요. 사무실로 사용되던 건물에 수장고 기능이 겹쳐진 거죠. 물론 공사는 새로 했습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수장고를 목적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아니다 보니 유물 보존을 위한 컨디션이 아쉬웠죠. 그래서 온도와 습도에 민감한 유물은 보관하지 못했어요. 대신 돌, 석등, 토기 파편 등 환경에 가장 영향을 적게 받는 재질의 유물이나 혹은 부지 내에 애매하게 보관되어 있는 유물을 이곳에 모아 보관했어요.

신라천년서고로 향하는 길. 국립경주박물관 부지 내에서도 다소 외진 곳에 자리한다.

그러던 중 2019년 박물관 부지 남측에 ‘신라천년보고’라는 수장고가 문을 열면서 모든 유물을 옮기게 됐어요. 그 이후로는 줄곧 비워진 채로 방치되다시피 존재해 온 곳이 바로 서별관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공간의 활용안에 대한 고민은 꽤 오래전부터 계속 있었더라고요. 당시 상황으로는 일반에게 공개된 도서관을 새로 지을 수는 없으니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 하는 방안이 최선이었고, 그때 떠오른 공간이 바로 서별관이었습니다.

— 무엇보다 큐레이터가 전시가 아닌 공간 프로젝트를 기획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는데요. 공간은 물론이고 디자인과 브랜딩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시다고 들었습니다.

교토 유학 시절 한 번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특강을 온 적이 있어요. 그가 전한 말 중에서 “처음 소설을 썼을 때 마케팅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이제는 나 스스로가 브랜드가 됐다. 브랜딩은 하루키를 만들어가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브랜딩의 중요성을 그때 처음 진지하게 접했죠. 그뿐만 아니라 오사카에서 시작한 ‘츠타야 서점’의 대표 마스다 무네아키가 쓴 책 <지적 자본론>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세상 모든 사람은 디자이너가 되어야 하고, 디자이너의 역할은 바로 제안에 있다”라는 그의 말에도 크게 공감했는데요.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라는 직함으로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된 계기에요. 일방적으로 유물에 대한 정보를 관객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큐레이터가 관객의 취향을 제안하는 사람 또는 그러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일본 유학 시절의 경험이 오늘날 큐레이터님의 일하는 방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요.

맞아요. 특히 제가 지냈던 교토는 일보의 문화 수도로 불리는 곳이에요. 그만큼 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고, 현재의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하는 곳이기도 해요. 일본에서 국립 박물관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는데요. 어느 순간 사용자 친화적인 공간으로 공간의 목적이 변해있더라고요. 과거에는 박물관의 공간 기준은 유물이었거든요. 유물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곳. 그리고 관람객이 유물을 공부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죠. 하지만 이제는 박물관은 휴식 공간이라는 인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러한 공간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했을 때, 결국 답은 건축, 디자인, 그리고 브랜딩이더라고요. 건축가가 하드웨어를 만들고, 디자이너와 큐레이터가 협업해 관람객의 취향을 반영한 콘텐츠를 제안하는 것이죠. 한국에도 이러한 어젠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디자이너와 건축가와 함께 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듯싶은데요. 서로 사용하는 용어도 너무 다르잖아요.

막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디자이너와 함께 일해보니 쉽지 않더라고요. 그럼에도 이렇게 일하는 방향이 저는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점차 디자이너와 호흡이 맞아가더라고요. 예술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걸 표현하지만 이와 달리 디자이너는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을 만든다는 점에서 디자이너의 위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편 2016년부터 2017년까지 문화재청 파견으로 경주시 금관총 전시관 설계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는 건축가와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었어요. 이 두 가지 경험을 통해서 디자이너와 건축가와 함께 일하는 방법을 터득한 셈이죠.

 

 

— 그런 점에서 건축가, 사서와 함께한 신라천년서고 프로젝트는 의미가 분명 남달랐겠어요. 서로 간의 협업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수장고로 사용했던 서별관을 도서관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이들이 그 누구보다 중요한 주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산에 따라 외관을 바꾸기보다는 내부 리모델링을 진행하는 방향으로 결정됐기 때문에 국립경주박물관 부지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건축가의 식견이 필요했고, 신라천년서고의 공간 정체성은 결국 도서관이기에 이곳을 관리하는 사서의 현실적인 의견도 필수였습니다.

처음에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김현대 건축가님이 몇 가지 안을 가져오셨어요. 하나는 과거 수장고 내부의 흔적을 살리는 방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편적인 도서관 건축 레퍼런스 자료였는데요. 건축가와 큐레이터인 제 입장에서는 수장고 내부는 일반인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만큼 그 흔적을 살려보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모았죠. 하지만 사서의 입장에서는 도서관의 기본 기능인 도서 배가와 열람, 자료 보존이 어려운 환경이라고 반대해 무산되었죠. 그럼에도 누군가의 직권으로 협업자의 의견을 누르는 건 실망스러운 결과물을 불러올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부딪히면 협의를 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 과정이 협업에는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래도 결국 세 분이 합의점을 찾으셨으니 신라천년서고가 탄생했겠죠?

오히려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신라천년서고는 도서관이라는 정체성이 명확하니 도서관의 기능이 제일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큐레이터의 일, 사서의 일, 건축가의 일에서 겹치는 건 조율하되, 공간 내에서 각자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은 자유도를 부여했어요. 마치 진료는 의사가 하고, 약은 약사가 하듯이 확실하게 전문 분야를 나눴죠. 벽면 고정용 서가는 사서의 의견이, 한옥의 목조구조를 재해석한 천장 건축은 건축가의 의지가 100% 반영된 포인트입니다.

— 신라천년서고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이용 규칙입니다. 음료 섭취와 대화가 가능한 도서관이라는 점은 분명 기존 도서관의 성격과는 달라 보이는데요.

사실 그래서 민원도 많이 들어와요. (웃음) 하지만 휴식과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유연성은 최대한 보장하고자 합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아직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없기도 하니까요. 휴식과 함께 큐레이터와 사서의 제안을 감상하고, 몰입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공간 정체성은 일본에서 경험한 츠타야 서점의 영향력도 분명 있어요. 다만 다른 점이라면 경주는 몇 십분 안에 책에서 본 유물이나 유적지의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이죠. 그야말로 살아있는 영감의 실제를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신라천년서고만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TPO

신라천년서고를 기획한 김대환 큐레이터가 영감을 얻은 장소

일본 도쿄 긴자 식스(GINZA SIX)에 있는 츠타야 서점(TSUTAYA BOOKS). 교토 유학 시절, 한 번은 츠타야 서점을 갔더니 와인 책을 팔면서 와인과 와인잔을 가져다 놓고, 그 옆에는 세계 와인 지도를 펼쳐 놓았더라고요. 단순히 책만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닌 거죠. 취향을 제안하는 거예요. 그때 깨달았어요. 이제는 박물관도, 큐레이터도 관객의 니즈에 맞춰서 유물을 선별하고 제안해야 한다는 걸요. 전시를 준비하는 큐레이터는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먼저 내세우기보다는 관람객이 무엇을 좋아할지를 먼저 파악해야 해요. 그들이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를 선별하고 제안하는 것이 오늘날 큐레이터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로젝트 캐비닛은 참신한 기획과 브랜딩, 디자인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헤이팝 오리지널 시리즈입니다. 매주 목요일, 영감을 주는 프로젝트들을 꺼내 보세요.

[Project Cabinet] ‘눕독’ 권하는 도서관,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 : file no.1 : 건축가 미상의 낡은 수장고가 도서관으로?

▶ : file no.2 : 취향을 제안하는 박물관 큐레이터

▶ : file no.3 : 천년의 고도를 압축한 공간들

이정훈 기자

사진 공정현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국립경주박물관

프로젝트
[Post-It]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장소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오픈 시기: 2022년 12월 15일)
주소
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시간
10:00 - 18:00
(주말 및 공휴일 휴관)
기획자/디렉터
김대환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크리에이터
도서관 관리 및 운영 | 황다니, 황희승 (국립경주박물관 사서), 설계 및 건축 | 김현대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김수경 건축가 (텍토닉스랩 건축사무소), 구조 설계 | (주)밀레니엄 구조, 기계 및 전기 설계 | (주)대광엔지니어링, 시공 | (주)씨원에스, 건축주 | 국립경주박물관
링크
홈페이지
이정훈
독일 베를린에서 20대를 보냈다. 낯선 것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며 쉽게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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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눕독’ 권하는 도서관,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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