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회색 머리의 신사가 성큼 성큼 걸어왔다. 폴 스미스였다. 키가 크고 곧은 체격 덕분일까, 아니면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유쾌한 기운 덕분일까 여럿이 오는 데도 유독 눈에 띄었다. 런던 자택에 머무를 때면 회원제 수영장 로얄 오토모빌 클럽에서 단 10분이라도 매일 수영을 한다는 얘길 들은 기억이 났다. 우리는 거의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이 앉았다. 까렌다쉬의 폴 스미스 한정판 볼펜을 수첩 위에 올려 두고 인터뷰를 시작하려고 하자 그가 자신의 재킷 안 주머니에서 다른 색의 동일한 볼펜을 꺼내 장난스레 흔들었다. “형제를 만났네요. 안녕!”
거의 매일 사진을 찍으신다고 들었습니다. 항상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다가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촬영하신다고요.
맞아요. 아버지가 아마추어 사진가였는데 제가 11살 때 첫 카메라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사진 찍는 걸 좋아했어요. (폴스미스의 아버지는 포목상이었지만 해비스턴 카메라 클럽의 창립 멤버이자 직접 찍은 사진들로 전시를 열 만큼 사진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몇년 전부터는 카메라 대신에 스마트폰으로 찍고 있고요.
폴스미스 계정에 올라오는 사진들이 꽤 멋져요. 인스타그램은 전적으로 직접 운영하시는 건가요?
그럼요. 테이큰 바이 폴Taken by paul이라는 태그(#)가 달려 있는 사진은 전부 제가 찍고 올린 것들이에요. 회사 계정이 있고, 개인 계정이 있어요. 회사 계정은 우리 스태프가 운영하고 개인 계정에는 제가 찍은 사진들을 올립니다.
사람들과 찍은 사진들은 드물고 대부분 풍경이나 사물 사진이 많던데요. 어떤 장면에서 촬영 버튼을 누르나요? 완전히 즉흥적입니다. 어떤 고민도 하지 않아요. 나무, 들판, 자동차… 어릴 적부터 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주변을 관찰하고 사진으로 남기는 습관을 갖게 됐어요. 이렇게 찍은 사진들은 색감이나 분위기 등 디자인을 할 때 도움을 주죠.
테이큰 바이 폴 사진들을 구경하면서 덩달아 기분이 즐거워졌어요. 예를 들어 여행 가방에 담긴 누군가의 인형이나 우체통을 지나가는 다람쥐는 순간적으로 찍은 것일 텐데요. 당신의 옷도 ‘위트가 가미된 클래식’이잖아요. 매사에 위트를 녹여내는 당신의 감각은 본능적인 건가요? 어린 시절부터 키치하고 재미있는 요소가 주위에 많았어요. 아버지가 정말 유쾌하셨습니다. 자연스럽게 저도 유머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죠. 최근에 같이 일하는 직원 한 명이 불만을 말하더군요. 저와 일하면서 웃느라고 복통이 있대요. 좋은 불평인 것 같아요.
가장 영국스러운 디자이너라는 호칭이 늘 따라다니는데요. 폴 스미스에게 가장 영국다운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25년 동안 패션 분야에서 일해오면서 ‘진정으로 영국적인 디자이너가 과연 존재할까’ 자문했습니다. 글로벌한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세계는 훨씬 좁아졌고, 모든 디자이너들이 국제적인 취향을 따르고 있어요. 저 역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트위드나 컨트리풍 천 같은 영국의 전통 직물을 즐겨 썼지만 지금은 다른 종류의 직물을 많이 사용합니다. 폴 스미스는 73개국에 제품을 판매하고 있어요. 다양한 나라의 취향을 고려한 디자인을 추구합니다.
폴 스미스는 독립 사업체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1990년대부터 많은 유럽 디자이너 브랜드가 대기업에 합병되고 인수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디자이너로서 창의력이 오염되거나 통제되어서 결국 디자인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많습니다. 폴 스미스는 독립 브랜드죠. 저는 아침에 거울을 보며 수염을 깎으면서 생각합니다. “보스가 없군. 아무도 없어.” 폴 스미스가 곧 폴 스미스입니다. 요즘 세상에선 정말 드문 일이예요.
CURATED BY 유제이
디자인 중심의 라이프스타일 분야를 취재한다. 농담처럼 쓴 필명으로 글을 쓴지 수년 째. 자연을 동경하지만 매번 도시에서 휴가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