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컬처 유튜버의 전성시대다. 영화, 음악, 책, 미술 등 다양한 문화예술에 대한 수요가 높아진 만큼, 많은 사람이 유튜브 등 영상 콘텐츠 제작에 뛰어들었다.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드로잉 유튜브 시장에서 ‘이연’이 쌓아 올린 아카이브는 독보적이다. 첫 크로키 영상을 시작으로 3년의 기간을 꾸준히 갈고닦은 결과 55만 구독자를 앞두고 있다. 올해 모나미와의 협업 제품을 출시하며 화제를 모았다. 대기업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일하는 안정적인 생활을 내려놓고 작가, 강연가, 디자이너, 크리에이터 등 전방위에 걸쳐 활동 중이다. 관심을 두는 다양한 영역을 활보하며 가장 마음을 쏟는 분야는 미술. “드로잉은 근본이고, 그림은 하나의 언어입니다” 국내 드로잉 유튜브 시장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룬 이연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Interview 이연(이연수)
그림 유튜버, 강연가, 작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작 활동을 펼치고 있어요.
유튜브 채널 ‘이연’을 운영하고 있어요. 채널명을 ‘그림 유튜버 이연’이 아니라 ‘이연’이라고 지은 이유는 한 가지의 활동에만 집중하기보다, 제가 살아가며 관심을 두는 여러 가지 분야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유튜버기도 해요. 자전거를 아주 열심히 타는 생활 체육인이기도 하고 혼자서 열심히 살아가는 청년이기도 하죠. 그렇게 하고 싶은 일들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형예술과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고요. 졸업 후 어떤 일을 했나요?
조형예술을 공부하다가 시각디자인을 복수 전공했어요. 당연히 졸업 후엔 편집디자이너가 될 줄 알았죠. 제 디자인이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 납품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디자인의 여러 형태 중에 편집디자인이 가장 유용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저와 잘 맞지 않더라고요. 이를테면 편집디자인은 작은 것 하나도 꼼꼼하게 캐치할 줄 알아야 하는데, 정해진 규격 같은 것이 너무 피곤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러다가 지인의 권유로 디자인 회사에 인턴으로 입사하게 됐어요. 패키지 디자인을 담당했죠. 가벼운 마음으로 입사했는데 3년 동안이나 그곳에 몸담게 됐어요. 돌이켜보면 꽤 재밌는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유튜버나 프리랜서로서 활동을 이어갈 때 회사에서 쌓은 경험이 크게 도움 되기도 했고요.
그 이후에는 스타벅스에 입사했죠. MD 상품에 들어갈 일러스트 그리기부터 패키지 디자인, 사진 촬영 등 프로젝트 전반의 일을 도맡았다고 들었어요.
첫 회사를 퇴사하고 유튜브를 시작했다가 프리랜서를 준비할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알아보던 시기였어요. 헤드헌팅을 통해 스타벅스로부터 입사 제의를 받아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일하게 됐죠. 큰 프로젝트를 맡을 때는 제품 디자인부터 보도 자료, 사진 촬영 및 보정, 촬영 현장에 쓰이는 종이 등의 디자인까지 담당했어요. 2020년 벚꽃과 삼일절 기념 무궁화 MD가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무궁화 MD가 출시됐을 때는 코로나19 때문에 사람들의 외출이 무척 뜸할 때였는데도 하루 만에 제품이 완판되어 놀라웠어요. 벚꽃 MD 같은 경우 매우 큰 프로젝트인데 제가 전체 작업에서 큰 비중을 담당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고요.
저 같은 MZ 세대에게는 이 일이 나만 할 수 있는 일인지, 혹은 이 일을 여기에서만 경험해볼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스타벅스에서만 가능한 일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대중적인 브랜드다 보니, 직접 만든 작업물에 대한 피드백을 전 국민에게 받을 수 있잖아요.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면서 제 디자인을 실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죠.
채널 2년 반 만에 구독자 54만 명을 달성했어요. 초반엔 회사에 다니면서 유튜브를 병행했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업무 외 시간을 내야 하는 일이잖아요. 꾸준히 그림 콘텐츠를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멋진 동기는 없었고 회사 다니면서 느낀 그림에 대한 갈증을 유튜브로 해소했어요. 평일에는 업무로 바쁘니 주말에 영상을 업로드했고, 월요일 아침에 받는 영상 피드백이 한 주를 살아갈 힘이 됐어요. 또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회사도 다녀야 했죠. 이 두 가지가 저에게 필요한 일이니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고 하지 않고 모두 잘하려고 애쓰다 보니 조금 벅차더라고요. 결국 하나에 좀 더 무게를 두자고 생각했고, 크리에이터로서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매번 드로잉이라는 큰 주제 안에서 콘텐츠를 풀어내고 있어요. 드로잉과 함께 이야기를 건네는 포맷이 인상적인데,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요?
제가 처음 유튜브를 시작할 때만 해도 드로잉 유튜버가 별로 없어서 참고할 만한 모델이 없었어요. 애니메이션 영상이 대부분이었는데, 취미 미술을 하고 싶은 사람은 그보다 드로잉에 더 관심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배우고 싶은 건 좀 더 대중적인 그림일 거라는 생각에 드로잉 영상을 시작하게 됐죠. 콘텐츠를 처음부터 기획했던 건 아니었어요. 많은 일이 그렇게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잘 하려고 한다고 잘 되는 게 아니라, ‘한 번 해볼까?’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잘 다듬어가며 모양을 만드는 거죠. 대화 형식도 번뜩 떠오른 건 아니었어요. 녹음을 먼저 한 다음 어떤 영상에 소리를 입혀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림과 함께 구성하게 된 거죠. 콘텐츠 기획이나 대본은 최대한 덜어내고 있어요. 제 영상을 찾아주시는 분들이 탄탄한 기획과 대본을 기대하시진 않을 것 같거든요. 편하게 드로잉 영상을 시청하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제 영상을 보신다고 생각해요. 다른 유튜버 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생각보다 기획에 투자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그럴 때는 제가 너무 힘을 들이지 않는 걸까 싶기도 하지만, 저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모나미와의 ‘모나미 프러스펜 한정판 세트(프러스펜 이연 에디션)‘ 협업이 화제를 모았어요. 해당 제품을 활용한 그림 콘텐츠도 올렸죠.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사실 모나미와 작업하는 내내 부끄러운 마음이 컸어요. 제가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제 이름을 단 미술 용품이 나와도 되는 건지 자신이 없었어요. 부끄럽지 않으려면 제품이 좋아야 한다는 생각에 기획에 집중했어요. 케이스에 넣을 그림을 그리고, 케이스를 디자인하고, 제품을 알렸죠. 더 나아가 해당 펜을 이용해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영상을 만들기도 했어요.
영상의 조회 수가 높게 나오면서 굉장히 반응이 좋았어요. 모나미 홈페이지 서버가 다운됐고, 펜 4,300개가 순식간에 매진됐죠. 판매 수익은 미술 교육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학생이나, 독거노인,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을 위해 전액 기부했습니다. 제품 교환용으로 마련해 두었던 펜 재고품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기증했고요. 구매자들이 좋은 물건과 함께 기부자가 되는 경험도 맛보길 바랐어요. 제게도 소중한 추억이자 잊지 못할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3월, 첫 그림 에세이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을 출간했어요. 1년 넘게 정성을 들인 책이라고 들었는데, 소개를 부탁드려요.
정말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 제의가 왔어요. 열 곳에 달하는 출판사와 미팅을 진행하는데 모두 그림 기법서를 내자고 하시더라고요. 저보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많을 거고, 이미 좋은 책도 나와 있는데 제가 비슷한 결의 책을 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출판사의 규모나 마케팅보다는 저와 방향이 비슷한 출판사를 선택하고자 했어요. 책을 많이 파는 것보다 제가 마음에 드는 책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중 출판사 미술문화에서 그림 그리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제안을 주셨는데, 이건 제가 꼭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1년간 아쉬움 하나 남지 않는 작업을 했어요. 전반적인 기획은 물론 표지, 내지 색감, 프로필 부분까지 책 제작 과정 전반에 걸쳐 제 의견이 반영됐죠. 파란 색지에 은박으로 연필 느낌을 준 것까지 만족스러웠어요. 디자이너로서 이 책의 만듦새가 무척 마음에 들고, 디테일이 살아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에 뿌듯해요.
‘내가 겪은 바에 의하면 멋진 일은 대개 두려움을 동반한다(24p)‘라는 말이 인상적이더라고요. 이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또 내 자서전의 에피소드가 풍부해지고 있구나(25p)‘라고 생각한다고 했는데요. 그동안 창작 활동을 하면서 두려운 순간을 맞닥뜨릴 때면, 어떻게 극복했는지 궁금하네요.
극복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창작에 대한 두려움은 그냥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하는 일이더라고요. 그냥 덜덜 떨면서 하는 거예요. 모나미와의 협업이 가져다주는 기쁨도 잠시이듯, 두려움도 시간이 지나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하죠. 영상을 올리면서 가끔 무섭기도 해요. 그런데도 내가 이 짓을 백 번 넘게 했구나, 생각하면 또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두려운지 생각해 보니 조회 수가 낮거나 평가가 좋지 않을까 봐 그렇더라고요. 근데 조회 수가 본질은 아니잖아요. 두려워하는 면이 중요한 일이 아닌 경우가 많더라고요.
드로잉이란 근본이라고 생각해요. 운동의 근본은 스트레칭이고 글쓰기의 근본은 일기라고 생각하거든요. 추상화를 그리건, 행위예술을 하건, 먼저 드로잉을 해야 해요. 남들은 왜 대단한 그림을 그리지 않냐고 하기도 하는데, 저는 이 심플함이 좋아요. 드로잉은 그림의 뿌리, 근본 같은 것이라 생각해요. 나아가 그림은 하나의 언어 같은 거죠. 영어나 프랑스어처럼, 그림이라는 언어를 익히고 사용하는 거예요. 제게 그림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언어이고, 저 스스로를 그림으로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언어마다 뉘앙스가 다르기도 하잖아요. 국경을 넘기도 하고요. 그림에도 그런 지점이 있다고 봐요.
당분간 광고, 강연보다는 창작에 치중하려고 해요.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는 휴식기를 갖고 싶어요. 준비하고 있는 책도 있는데요. 위고 출판사의 ‘아무튼’ 시리즈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애호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책인데 저는 <아무튼, 혼자>를 맡게 됐어요. 출간 예정 목록에도 이미 나와있답니다. 책을 집필하기 전에 편집장님께서 ‘혼자’라는 단어는 아무에게나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놓치고 싶지 않았죠(웃음). 앞으로 유튜브 드로잉 콘텐츠도 꾸준히 올리면서 다음 책을 준비하게 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