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18

국립정동극장, ‘근대문화 1번지’의 헤리티지를 이어오다 ②

헤리티지를 넘어 창작 플랫폼으로

올해로 31주년을 맞이한 국립정동극장. 실제 운영 기간보다 긴 세월이 느껴지는 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3.1운동을 알린 인물을 바탕으로 한 〈딜쿠샤〉, 〈광대〉처럼 역사를 모티브로 한 작품과 실험적인 창작극도 꾸준히 선보인다. 공연계에서 가장 좁은 시장인 ‘전통 공연’이라는 분야에서 50회 이상 장기공연을 진행하며 성과도 쌓아왔다. 헤리티지, 작품성, 대중성 이 3가지의 균형점을 찾는 길은 쉽지 않다. 국립정동극장은 그 접점을 어떻게 만들고 있을까? 박진완 홍보팀장과 임성우 조명감독을 만나 들었다. 

Interview with

박진완 홍보팀장, 임성우 조명감독

박진완 홍보팀장과 임성우 조명감독. 둘 다 국립정동극장에 입사한 지 20년 차가 넘은 베테랑이다.

국립정동극장이라는 정체성

― 선보이는 극의 스펙트럼이 예상보다 훨씬 넓어요. ‘국립정동극장’ 하면 전통극이 먼저 떠오르는데, 지금은 〈살아있는자를 수선하기〉라는 현대극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박진완 팀장: 작품을 선택할 때는 크게 두 가지를 고민해요. 하나는 정동이 가진 ‘근대 문화의 중심지’라는 정체성을 잇는 작품인가 하는 점이고요. 두 번째는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의 진중함을 고려해서 선택해요. 3.1운동을 알린 앨버트 테일러의 실화를 다룬 〈딜쿠샤〉나, 최초로 쌍꺼풀 수술을 했던 오엽주의 이야기를 담은 〈아이참〉이 정동이라는 배경을 잘 살린 작품이죠.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같은 작품의 경우,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는 순문학 같은 느낌을 준다는 면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죠.

 

정동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대학로를 찾는 관객들과는 좀 달라요. 화려하거나 웃기지 않아도, 묵직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오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저희도 정동극장다운 색깔을 유지하기 위해, 대관 대신 자체 제작이나 공동 제작으로 작품을 선보이고 있어요.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무대. © 프로젝트그룹 일다

― 모든 작품을 직접 제작하는 게 쉬운 선택은 아닐 텐데요. 그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박진완 팀장: 시작은 생존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정동 주변 공연장들이 저희보다 규모가 훨씬 컸거든요. 그 사이에서 한정된 예산으로 어떻게 차별화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정동극장의 색깔’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죠. 직접 제작은, 우리만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어요. 직접 제작하지 않고 대관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지금은 여기서 나아가, 좋은 작품이 사장되지 않도록 돕는 ‘플랫폼’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창작 ing’라는 사업이 있고요. 보통 지원 사업을 통해 1차로 개발된 공연들이 한 번 무대에 오른 뒤 사라지는 경우가 참 많은데요. 작품이 완성도를 갖추고 큰 무대로 나가기 위해서는 충분히 다듬어질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가능성 있는 작품을 선별해 후속 개발을 지원하고 있어요. 세실극장을 일종의 ‘창작 기지’로 활용하는 셈이죠. 여기서 좋은 반응을 얻은 작품은 정동극장의 기획 공연으로 연결하기도 하고요. 창작ing 뮤지컬  〈딜쿠샤〉와 연극 〈굿모닝 홍콩〉이 장기 공연된 사례 중 하나인데요. 

창작ing 사업을 통해 발굴한〈굿모닝 홍콩〉. 특히 홍콩 관객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 국립정동극장

〈굿모닝 홍콩〉은 장국영을 사랑하는 팬클럽 멤버들이 추모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인데, 자연스럽게 홍콩의 민주화운동인 노란 우산 시위에 대한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어요. 홍콩에서 이런 이야기를 직접 하기 어렵다보니, 오히려 홍콩 분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 공연을 많이 찾아주셨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셨어요. 이렇게 좋은 작품을 지원해 관객층을 넓히는 게 뜻깊죠. 

제약이 만든 공간, 높은 몰입감을 선사하다

좌석 수 대비 넓은 무대와 높은 단차가 특징이다.

― 작품만큼 공간이 주는 힘도 큽니다.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국립정동극장의 특징도 궁금합니다.

박진완 팀장: 저희 극장이 객석 수에 비해 무대 사이즈가 상당히 큰 편이에요. 개관 10주년 때 리모델링을 하면서 원래 400석이었던 좌석을 326석으로 줄였거든요. 수익성보다는 관객 한 명이 누릴 수 있는 여백을 더 만들고, 무대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자는 취지였죠.

 

임성우 조명감독: 정동극장의 또 다른 특징은 아주 가파른 객석 단차입니다. 한정된 부지 안에서 전 좌석의 시야를 확보하려다 보니, 객석 경사를 일반적인 극장보다 훨씬 가파르게 설계한 거죠. 보통 무대 입구(프로시니엄) 높이가 5.3m 정도인데, 저희는 맨 뒷좌석의 높이가 이 무대 높이와 거의 맞먹을 정도니까요.

임성우 조명감독.

처음엔 이게 ‘어쩔 수 없는 제약’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정동극장만의 색깔이 됐어요.  단차가 크다 보니 앞사람에게 시야가 가려지는 일이 없고, 객석 후미에서도 무대가 생생하게 느껴지거든요. 지금 공연 중인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같은 1인극에서 그 장점이 더 확연히 드러나는데, 객석 규모에 비해 무대가 꽉 차 보여서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죠. 대극장이었다면 멀게만 느껴졌을 배우의 에너지가 이곳에서는 가깝게 전달되는 셈이죠.

 

―  그 특성을 활용한, 조명이나 무대 연출도 있을까요? 

임성우 조명감독:  제가 입사한 20003년과 비교하면, 무대 기술이 정말 많이 발전했어요. 예전에는 고정된 조명기를 사용했다면, 요즘은 무대 벽면과 바닥을 전부 LED 월로 채워 영상을 띄우기도 하고요. 기술의 발전 주기가 워낙 빠르다보니, 조명이 필수적인 부분을 잡아주고 나머지를 새로운 기술로 메워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 됐습니다.

2% 시장에서 낸 성과, K-컬처 시리즈

― 사실 ‘전통 공연’은 진입장벽이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박진완 팀장: 수치만 놓고 보면 정말 좁은 시장인 건 맞아요. 전체 공연 시장에서 전통 예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2% 내외에 불과하거든요. 대다수 전통 공연이 3일에서 5일 정도 단기로 끝나는 게 업계의 현실이죠. 이런 환경에서 저희가 작년에 〈단심〉을 50회, 〈광대〉를 30회 올린 건 사실 쉬운 과제는 아니었어요. 과거 〈미소〉처럼 관광 상품용 상설 공연이 아니라, 일반 기획 작품으로 전통 분야에서 이 정도 회차를 소화한 사례가 거의 없으니까요.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저희는 한국 관객뿐 아니라 외국인까지 타깃으로 설정하면서 오히려 한국적인 색채를 공연 곳곳에 더하는 방식을 선택했어요. 최근 K-컬처 열풍 등으로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대중의 안목이 높아졌고, 이를 제대로 살리는 게 지금의 관객들에게 더 맞겠다는 판단이었죠. 한국 춤이나 전통 의상 같은 요소를 예술단원들이 무대 위에서 밀도 있게 구현해냈습니다.

단심 공연 사진 © 국립정동극장

이런 시도가 실제 장기 공연으로 이어지니까, 나중에는 다른 분야에 계신 분들이 놀라워하며 찾아오시더라고요. 사실 전통 예술이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기보다는 같은 분야에서만 향유하는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기 쉽거든요. 그런데 이번 공연을 통해 전통이 장르의 문턱을 넘어 매력적인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 같아 의미가 컸습니다.

 

― 요즘에는 K컬처가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있지만, 처음에는 맨땅에 헤딩이었을 것 같아요. 

전통 공연 상설 작품인 〈미소〉를 2008년 처음 론칭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전까지 전통 공연은 어디를 가나 비슷한 ‘갈라쇼’ 형태였는데, 그걸 깨고 싶어서 스토리라인을 넣고 뮤지컬 양식을 도입했어요. 당시 연주만 하던 단원들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며 반발도 컸죠. 2010년 연간 제작비와 마케팅비 등 전통공연 사업비를 총 30억 가까이 투입하다 보니 압박감이 정말 심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죠. 그래서 절박한 마음으로 해외 마케팅에 뛰어들었어요.

 

해외 관객을 잡기 위해 여행사부터 설득했습니다. 처음 찾아갔을 때는 한 달 동안 만나주지도 않았고, “외국인은 공연 안 본다”는 말만 돌아왔죠.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외국인 관객 동선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공연 정보를 노출했습니다. 항공권 예약 사이트부터 공항 리무진 버스, 호텔까지요.

처음 해외 관객을 타깃으로 전통 공연을 론칭하고 마케팅하던 때를 얘기 중인 박진완 팀장.

― 효과가 있었나요.

박진완 팀장: 쉽지 않았죠. 공연은 오늘 홍보한다고 내일 바로 반응이 오는 게 아니잖아요. 알리고 자리 잡기까지 최소 1년을 시간을 들여야 결과가 나오더라고요. 그게 맞다는 걸 증명하기까지 버텼던 10개월이 참 괴로웠죠.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유료 점유율 90%라는 성과를 냈고, 나중에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상도 받았어요.

 

―  작년에 최다 관람객을 기록했는데요. 요즘 관객층에서 달라졌다고 느끼는 지점이 있나요?

박진완 팀장: 정동 하면 예스럽고 고즈넉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공연에 따라 젊은 관객 비중이 높은 경우도 있어요. 〈쇼맨_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같은 작품은 20~30대 관객 비중이 70%를 넘더라고요.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자기 취향이 확고한 ‘혼공(혼자 관람)’ 관객과, 한 작품을 여러 번 보는 ‘회전문 관객’이 자리를 잡았다는 점입니다

〈쇼맨_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국립정동극장

그 변화를 실감한 작품이 뮤지컬 〈쇼맨_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2022)였어요.〈레드북〉·〈여신님이 보고 계셔〉로 호흡을 맞춘 한정석(극본)·이선영(작곡)·박소영(연출) 창작진과 협업한 작품인데요. 독재자의 대역으로 살았던 노인의 삶을 따라가며 역사 속 개인의 책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라, 주제가 꽤 묵직해요. 아마 상업적인 흥행만 따졌다면, 선뜻 개발하기 어려웠겠지만, 이런 시도도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선보였어요. 

다행히 관객분들이 그 진심을 알아봐 주셨고, 제7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대상·극본상·남자주연상까지 3관왕을 받았죠. 창작진분들도 “정동극장이었기에 가능했던 작업”이라고 말씀해 주셔서 뿌듯했습니다.

 

젊은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마케팅에서 다른 시도도 해보셨을 것 같은데요.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나요?
NFC 키링이었어요. 키링을 태그하면 배우들의 대사 ASMR이나 미공개 사진과 음원 같은 독점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했거든요. 단순히 굿즈를 파는 게 아니라, 공연의 여운을 일상으로 가져가고 싶어 하는 팬들의 마음을 읽으려 했어요. 실제로 NFC 키링을 구하려고 ‘오픈런’처럼 줄 서는 관객도 생길 만큼 반응이 뜨거웠어요.
사실 정동이 참 차분하고 조용한 동네잖아요. 관객분들이 남겨주신 “공연을 보고 나갔을 때 그 여운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극장”이라는 리뷰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뮤지컬쇼맨 NFC키링과 이를 받기 위해 줄서있는 관람객의 모습. 출처: 국립정동극장

― 두 분 모두 20년 넘게 정동길을 오갔는데요. 추천하고 싶은 장소나 비하인드가 있을까요? 올해의 목표도 함께 듣고 싶습니다.

임성우 조명감독: 덕수궁 돌담길 쪽 분수대에 꽃이 있는데요. 많은 분들이 벚꽃으로 생각하시는데, 사실 살구꽃이에요. 여름이면 노란 열매가 열리죠(웃음).
요즘 제가 고민하는 건 ‘따뜻한 효율성’인데요. 각자 맡은 일을 빠르게 해내는 만큼, 예전처럼 서로 챙기고 부딪치며 만드는 분위기는 조금 옅어진 것 같아 아쉽기도 해요. 그래서 더더욱 다른 파트와 잘 융합해서 공연의 여운이 끝까지 남게 만드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박진완 팀장: 저도 정동길 자체를 추천하고 싶어요. 공연이 끝나고 나서 잠깐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동네가 흔치 않거든요.

고민은 늘 관객 개발이예요. 26년째 하고 있지만, 여전히 어려워요. 특히 전통 공연을 장기 공연으로 이어가며 관객층을 넓히는 일은 늘 큰 숙제예요. 국내 대중은 물론 해외 관객까지 만나야 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현장에서 부딪치며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들과 더 잘 나누는 게 지금의 목표입니다.

국립정동극장

 

장소 국립정동극장

주소 서울 중구 정동길 43

홈페이지 

*3편에서 계속됩니다.

김지오 기자

사진 강현욱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국립정동극장

 

프로젝트 캐비닛은 참신한 기획과 브랜딩, 디자인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헤이팝 오리지널 시리즈 입니다. 

 

[Project Cabinet] 국립정동극장, ‘근대문화 1번지’의 헤리티지를 이어오다

       :file no.1 : 제약 속에서 만들어낸 ‘정동극장다움’

▶  : file no.2 : 헤리티지를 넘어 창작 플랫폼으로

       : file no.3 :  작품으로 읽는 국립정동극장 30년

프로젝트
[Post-It] 국립정동극장
장소
국립정동극장
주소
서울 중구 정동길 43
주관
리사르
링크
홈페이지
김지오
자기만의 길을 걷는 브랜드와 사람이 궁금합니다

콘텐츠가 유용하셨나요?

0.0

국립정동극장, ‘근대문화 1번지’의 헤리티지를 이어오다 ②

SHARE

공유 창 닫기
주소 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