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03

美 버클리에서 대규모 회고전 열린 한국계 아티스트

잊혀지지 않을 이름 차학경 그리고 『딕테』
뉴욕타임스 ‘OVERLOOKED’는 백인 남성 위주로 부고가 실리던 시절,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이들을 조명하는 연재 시리즈다. 『제인에어』 작가 샬럿 브론테 등이 해당 지면을 통해 소개됐다. 캡처: 뉴욕타임스

2022년 1월, 뉴욕타임스에 차학경의 부고가 실렸다. 생전에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했거나, 기록에서 누락된 이들의 삶을 다시 호명하는 ‘간과된 인물들(Overlooked)’ 시리즈다. 유관순 열사와 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 역시 해당 지면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뉴욕타임스는 왜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지난 예술가의 이름을 다시 불렀을까.

작품에 아로새긴 이민자 여성의 삶

차학경의 남동생 차학신이 촬영한 사진(1979)

차학경은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피난민 가족에게서 태어났다. 만주와 서울을 지나 부산에 정착한 가족은 그가 열한 살이 되던 해에 미국 하와이로 이주했다. 언어의 장벽에 부딪힌 차학경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어린아이들과 함께 유아 학교에 다녀야 했지만, 불과 2년 만에 영문 시로 백일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학풍이 자유로운 UC버클리에 입학했다. 1969년부터 약 10년 동안 예술과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프랑스 파리에서는 영화 이론과 구조주의 언어학을 익혔다. 그의 작업은 특정 장르에 머물지 않았다. 자신을 ‘프로듀서, 감독, 연기자, 비디오·영화 작가, 공간설치예술가, 공연·출판 문학가’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글쓰기와 영상, 퍼포먼스와 설치를 오가며 이주와 망명이 남긴 복합적인 정서를 자신만의 화법으로 표현했다.

〈Other Things Seen, Other Things Heard〉, 1978
〈White Dust from Mongolia〉, 1977

차학경의 예술 생활은 짧았다. 첫 저서인 『딕테』를 출간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의 한 빌딩에서 경비원 조지프 산자에게 강간 후 살해당했다. 1982년,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대학 시절 작업을 포함해 50여 점 남짓의 작품만이 그의 세계를 증언한다.

여전히 유효한 딕테

국내에서 절판됐던 『딕테』는 2024년 재출간했다 출처: 문학사상

『딕테』는 차학경이 남긴 유일한 책이자 사진·영상·퍼포먼스 등 다면적인 작업이 응축된 결과물이다. 장르는 문학으로 분류되지만, 역사와 사유, 신화와 편지, 이미지와 인용이 뒤섞이며 하나의 형식에 머물지 않는다. 문학 작품보다는 작가의 손길이 고스란히 녹아든 아트북에 가깝게 느껴진다. 다만, 단 한 점으로 존재하는 오브제가 아니라, 대량 생산과 유통을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다르다. 차학경은 『딕테』가 더 많은 사람에게 닿길 바랐다. 

 

제목 ‘딕테dictée’는 프랑스어로 ‘받아쓰기’를 뜻한다. 차학경은 그리스 신화 속 아홉 뮤즈 이름을 각 장의 제목으로 삼고 유관순, 잔 다르크, 성 테라사,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인 허형순 등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를 살아간 여성들의 목소리를 불러왔다. 차학경은 이들의 위대한 업적과 말하지 못했던 경험을 겹겹이 쌓아 여성 발언권의 필요성을 환기한다. 책에는 영어뿐 아니라 한국어, 중국어, 불어, 라틴어 등이 번역 없이 등장한다. 차학경이 활동하던 시기, 미국 사회에서는 모국어를 벗어나 문맹의 상태에 놓이는 경험, 즉 ‘엑소포니(exophony)’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언어적 난해함을 더해 독자를 익숙한 독해의 자리에서 밀어낸다. 읽히지 않는 문장과 이해되지 않는 단어 앞에서 독자는 언어의 위계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1992년 12월 23일부터 1993년 1월 31일까지 휘트니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캡처: 휘트니미술관
2004년 버클리 미술관에서 열린 〈The Dream of the Audience: Theresa Hak Kyung Cha 〉 ⓒGenerali Foundation

출간 당시 『딕테』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차학경의 작품을 처음 본격적으로 조명한 이는 버클리미술관 큐레이터 로렌스 린더다. 석사 논문에서 차학경을 다룬 그는 유족에게 작품을 대여해 소규모 유작전을 열었고, 이는 1992년 뉴욕 휘트니미술관 회고전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당시 영어 신문이나 잡지 어디에도 전시 리뷰가 실리지 않았다고 로렌스 린더는 회상하기도 했다. 이후 『딕테』는 연구와 교육의 장에서 꾸준히 읽혀왔다. 현재 미국 내 다수 대학에서는 페미니즘과 아시아계 연구 수업 주요 교재로 이 책을 사용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속적인 관심 속에 절판 20년 만에 재출간되었고, 발매 당일 종합 판매 1위에 올랐다.

차학경을 회고하는 이유

2026년 1월 28일, 뉴욕타임스에 이번 회고전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캡처: 뉴욕타임스

차학경의 작업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회고전 〈Theresa Hak Kyung Cha: Multiple Offerings〉가 미국 버클리미술관·퍼시픽필름아카이브(BAMPFA)에서 열린다. 20여 년 만에 개최되는 대규모 회고전이자, 그의 작업을 가장 폭넓게 소개하는 자리다. 텍스트 작업을 비롯해 비디오, 퍼포먼스, 설치, 아카이브 자료 등 100여 점에 이르는 기록을 통해 그의 다층적인 작품 세계를 살핀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초기 섬유 작업과 도자 작품도 함께 소개되어 의미를 더한다.

〈Theresa Hak Kyung Cha: Multiple Offerings〉 전시장 전경

전시 제목인 ‘Multiple Offerings’는 차학경이 스스로 자신의 작업 방식을 설명하며 사용했던 ‘Multiple Telling with Multiple Offering’이라는 개념에서 가져왔다. 특정한 해석이나 동선을 제시하기보다, 관객 각자가 의미를 찾도록 구성된 방식이다. 1992년부터 차학경의 작품과 아카이브를 관리해 온 BAMPFA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외부 대여작과 동시대·후대 작가들의 작업도 함께 배치해 차학경이 현대 미술에 미친 영향력을 드러낸다. BAMPFA 수석 큐레이터 마고 노턴은 그에게 영향을 받은 현대 작가들과의 대화에서 이번 전시를 출발했다고 밝혔다.

아티스트 제시 천(Jesse Chun)이 즉흥 연주와 낭독을 겸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전시와 연계해 『딕테』 낭독회, 심포지엄, 작품 상영 프로그램 등이 진행되며, 차학경의 삶과 연구 성과를 다룬 전시 도록도 함께 출간한다. 2001년 『관객의 꿈』 이후 25년 만이다. 2026년 6월 출간 예정으로, 현재 알라딘을 통해 사전 예약을 받고 있다. 차학경의 작업을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이번 회고전은 추후 국제 순회도 예정되어 있다.

김기수 기자

자료 및 사진 출처 BAMPFA, 휘트니뮤지엄, 문학사상, 뉴욕타임스

프로젝트
〈Theresa Hak Kyung Cha: Multiple Offerings〉
장소
BAMPFA
일자
2026.01.24 - 2026.04.19
기획자/디렉터
Victoria Sung, Phyllis C. Wattis, Tausif Noor
링크
홈페이지
김기수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는 음주가무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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