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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영은
2022-03-04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수집하는 삶, 재영책수선

책 수선가가 옆에 두는 물건 3

 

서울 마포구 조용한 골목길에 위치한 ‘재영책수선’은 이름 그대로 책을 ‘수선’해주는 곳이다. 어릴 적 추억이 담긴 동화책,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 받은 외국서적, 세상을 떠난 엄마를 기억하기 위한 도안집, 자식에게 선물로 주고 싶은 성경책 등…. 재영책수선이 수선하는 책에는 한계란 없다. 게다가 책에 담긴 사연은 각양각색, 책 보다 더 극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재영책수선은 이 이야기를 한 데 모아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이라는 책을 냈다. 낡고 헤진 책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도 신기하지만 무엇보다 책 수선가라는 몰랐던 직업에 대해서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책 보존가’가 맞는 표현이지만, 재영책수선의 재영 작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하여 수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저렴하고 품질까지 좋은 물건이 넘쳐나 오래되고 낡은 물건은 금세 새것으로 교체되는 세상. 그렇기에 책 한 장, 한 장을 소중히 다루는 재영책수선의 섬세한 작업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아직 찬 바람이 불던 2월의 어느 날, 재영 작가와 만나 책 수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Interview with 재영

재영책수선 대표 & 책 수선가

 

 

책 수선가(책 보존가)는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생소한 직업이에요. 이 직업을 어떻게 아셨고, 언제 내 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나요?

저도 유학을 가서 책 수선을 전문적으로 하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시작은 약간 운이었어요. 대학원에서 세부 전공을 북아트와 제지(papermaking)를 선택했는데 전혀 해보지 않은 공부라서 기술이 부족했어요. 지도교수님이 책 보존 일을 하면 필요한 기술을 빨리 배울 수 있을 거라면서 추천해 주셨어요. 그래서 학교 도서관 내 책 보존 연구실에 취직을 했죠.

 

 

처음에는 기술을 배우려고 한 거였군요.

기술만 배우자는 마음으로 갔는데 하면 할수록 재미있고 적성에 잘 맞았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어느 부분에서 재미를 느꼈나요?

많은 부분에서 재미를 느꼈지만, 망가진 책을 다룬다는 점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책이 망가졌다는 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보통 종이가 조금 찢어지거나, 모서리나 표지가 어디에 찍혔다 정도만 겪어보죠. 하지만 책 보존 연구실의 책은 파손의 정도가 달라요. 그런 생소한 모습에서 재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책의 모습이 매력적이었고, 책의 물성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거든요. 일반적으로 책이라고 하면 ‘지식을 전달하는 매체’와 같이 추상적인 의미로 설명하잖아요. 하지만 책 수선은 온전히 책을 있는 그대로의 물성으로 이해하고 구조와 종이의 특성을 분석해요. 그런 점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게다가 손으로 직접 만지면서 무언가를 해결한다는 점도 적성에 잘 맞았고요.

 

오래 전, 지인에게 선물 받았던 책을 수선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이런 경우, 책이 출판되었을 당시의 정보를 찾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될수록 정보를 찾기가 힘들 때가 많다. 특히 이 책은 제목에 사용된 서체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재영 작가는 제목을 스캔한 후, 직접 그리기까지 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도서관에서 책 수선을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도서관에 책 수선을 담당하는 분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저도 한국에서 조직에 소속되어 책 수선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어요. 책 수선을 배웠던 미국과 비교하면 한국은 환경이 열악하고 선택지가 거의 없었거든요.

 

 

지금은 재영책수선이라는 이름 아래, 독립적으로 책 수선을 하고 있죠. 주로 어떤 분들이 의뢰를 하나요?

책 수선에 대해 모르는 분이 많기 때문에 초반에는 파손이 심해서 수선 전, 후가 극적으로 비교되는 책을 소개하면서 이 일을 알리고자 했어요. 변화가 도드라지게 보이면 책 수선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 그처럼 파손이 심하거나 사연이 깊은 책만 수선을 맡길 거라고 생각하더라고요. 실제로는 일반 책부터 사연이 깊은 책까지 다양해요. 선물하기 위해 수선을 맡기는 경우, 자주 읽는 전공 서적이 망가져서 수선을 맡기는 경우, 종이를 수선하는 경우도 있어요. 모았던 편지들을 가지고 와서 책으로 만들어 달라는 의뢰도 있고 훼손된 사진 혹은 포스터를 수선해달라는 의뢰도 있죠.

 

 

종이도 수선해 주나요?

책 수선가라고 표현하지만 제 직업의 정확한 명칭은 ‘지류 보존가’예요. 책의 주요 소재는 종이(지류)이기에 파손된 지류를 수선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죠.

 

찢어진 성경의 한 페이지를 수선한 모습. 종이의 미세한 결 하나, 하나를 이어 붙이는 섬세하면서도 어려운 작업이다.

 

책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을 읽고 나서 책 수선가는 정교한 기술 외에도 상상력과 창의력도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는 걸 알았어요. 파손 때문에 안 보이는 부분을 최대한 원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들기도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새롭게 디자인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만약 책 수선가에게 제일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람마다 답이 다를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일 어렵고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능력으로 책을 수선하면서 느끼는 긴장감과 부담감을 조절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애초에 부담감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라면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하죠. 생각보다 엄청 중요해요.

 

 

책 수선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이 높나요?

돌이킬 수가 없으니 실수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커요. 작업 중에는 집중력과 예민함이 최고조로 올라오죠. 그래서 이런 자신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해요. 저도 제 성격의 예민한 부분을 일을 하면서 마음껏 풀어요. 그래서 책 수선이 적성에 잘 맞는 것 같아요(웃음).

 

 

책을 수선하는 과정 중에서 제일 중요한 과정은 언제인가요?

책마다 과정이 달라서 하나만 꼽기가 어려워요. 대신 제 스스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정은 수선 전, 책의 상태를 점검하는 과정이에요. 의뢰자는 단순히 표지나 종이가 찢어져서 가져왔지만 살펴보면 파손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는 경우가 있어요. 때로는 의뢰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파손이 있기도 해요. 책의 상태를 얼마나 꼼꼼히 점검하느냐에 따라 수선 방향이 달라질 때도 있어요. 그래서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모든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살펴봐요.

 

 

그렇다면 책 파손 흔적으로 그 책을 읽은 사람의 성격이 보이기도 하겠어요.

책이 파손된 부분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의뢰자가 책을 읽을 때의 습관이 보여요. 그래서 전 책 수선가란, 책을 수선하는 사람인 동시에 책을 관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할머니의 유품인 일기장을 수선하고 표지를 새롭게 디자인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사례. 수선한 책은 누군가를 기리고, 추억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책을 수선하기 위해서는 의뢰자가 원하는 바를 읽어내는 기술도 필요하죠. 그래서 의뢰자와 대화도 많이 나눈다고 들었어요. 책 수선가는 알면 알수록 ‘책을 수선하는 사람’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항상 ‘책 수선이란 파손된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수집하는 일이다.’라고 말해요. 책을 세밀하게 관찰해야 얼핏 보면 지나칠 수 있는 작은 파손까지 발견할 수 있거든요. 책을 얼마나 꼼꼼히 관찰했는가에 따라 수선의 가능성이 넓어지고 방향성이 정해져요.

 

 

혹시 책 수선이라는 업이 일상에 영향을 끼쳐서 달라진 부분도 있나요?

책 수선이라는 작업은 제책이 안착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길거든요. 또, 차분히 집중해야 하는 과정도 길고요. 선천적으로 성격이 급한데 책 수선을 하면서 인내심도 생기고 차분해졌어요.

 

땡스북스에서 열린 출판 기념 전시회. 재영 작가의 작업실을 옮겨 놓은 듯한 컨셉으로 구성되었다. 아래는 책에서 발견한 벌레를 보관한 유골함.

 

책을 수선하다가 나온 벌레를 작은 유골함에 넣어서 보관한다고 들었어요.

책 파손의 요인을 모으는 걸 좋아하는데, 벌레는 책을 파손시키는 대표적인 원인 중 하나예요.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벌레는 책 안이 따뜻하고 아늑해서 살려고 들어갔는데 책 무게에 눌려서 그만 죽음을 맞이한 거죠. 그래서 죽은 벌레를 모으는 건 책 파손의 원인을 레퍼런스로 수집하는 이유도 있지만, 안타깝게 죽은 벌레들에게 예쁜 유골함을 만들어서 위로해주고 싶다는 감정적인 이유도 있어요.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에서 책을 아껴서 있는 것보다 접고 험하게 다뤄도 편하게 읽는 것이 책을 더 사랑하는 방법일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오랫동안 잘 보관하는 비법을 알려주신다면?

일단 찢어진 책을 스카치테이프로 붙이는 건 안 좋은 방법이에요. 이외에 평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면 자외선을 피해야 해요. 햇빛을 쐬면 책이 변색되니까요. 요즘은 종이와 잉크의 질이 발전해서 변색률이 낮긴 하지만 최대한 햇빛을 피해서 책장을 두는 것이 좋아요. 통풍도 매우 중요해요. 통풍이 잘 돼야 벌레가 안 꼬이고 먼지도 안 쌓이거든요. 식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요.

 

 

정말 그렇네요! 책에서 이야기하길, 코로나 전에는 일 년에 한 번씩은 프랑스 헌책방에 가서 헌책을 샀다고요. 책 수선가만의 헌책을 사는 기준이 있나요?

주로 파손된 책을 사지만, 특정 시대의 양식으로 만든 책도 사요. 그 시대의 종이와 제본 방식을 모으기 위해서요.

 

전시에서 만난 재영책수선의 도구와 재영 작가가 모으는 헌책들

 

지금까지 수선한 책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은 어떤 책인가요?

모두 기억에 남아서 딱 한 권만 꼽기가 힘들어요. 대신 ‘앞으로 책 수선가로서 이런 일을 하게 되는구나 또는 이런 일도 할 수 있구나’를 깨닫게 해준 책이 있어요. 중고서점에서 절판된 책을 구매한 후, 그를 수선해서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준 의뢰인이 있었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책 수선이 선물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어요. 보통 자신이 아끼는 책을 수선하고 싶어서 찾아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좋은 선물 아이디어인데요.

덕분에 책 수선이라는 분야도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날 이후로 꽤 다양한 사례를 만났어요. 어렸을 때 제일 좋아하던 책을 수선해서 자신의 아이의 생일선물로 주고 싶어 하는 부모님도 있었고요.

 

이 책의 주인은 이탈리아 로마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여행 기념품으로 가지고 왔다. 재영 작가는 수선의 방향을 더 넓게 해석하여 의뢰인의 추억이 오랫동안 아름답게 유지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책 수선은 단순한 유지, 보수를 벗어나는, 창의적인 영역이다.

heyPOP Question

 

재영 작가의 PICK!

책 수선가가 옆에 두는 물건 3

 

O’Keeffe’s Working Hands

책 수선가는 손에 오염물질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손을 자주 씻어요. 그래서 손이 엄청 건조하지만 작업 중에는 핸드크림을 바르면 안 돼요. 크림의 유분기가 작업에 방해가 되거든요. 그래서 퇴근할 때, 오키프 핸드크림을 듬뿍 발라요. 질감은 독특하지만 유분기가 없고 바로 스며들어서 보습력이 좋아요.

 

 

모나미 수성펜

책을 읽을 때, 항상 옆에 두는 것이 모나미 수성펜 빨간색과 BIC 볼펜이에요. 사용할 때 부담이 없어서 기본 아이템을 좋아하는 편인데요. 특히 모나미 수성펜은 특유의 뾰족하고 거친 필기감이 마음에 들어요.

 

 

트레이너 가위

가위의 형태, 움직이는 구조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도구 중에서 특별히 가위는 모으는 편이에요. 제가 수집한 가위 중 ‘트레이너 가위’라고 있는데요. 손잡이에 구멍이 4개가 붙어있는 가위예요. 아이들에게 가위 사용을 가르쳐 주기 위한 가위로, 안쪽 구멍 두 개는 아이의 손가락을, 바깥쪽 구멍 두 개는 어른의 손가락을 넣어서 같이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가위예요. 이제는 출시가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허영은

취재 협조 재영책수선

이미지 제공 위즈덤하우스

에디터
CURATED BY 허영은
다양성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믿는다. 그래서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내서 보고, 듣고,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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