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에토레 소트사스가 1969년에 올리베티사 의뢰로 디자인한 휴대용 타자기다. 인터넷에서 사진으로 처음 이 물건을 보았을 때 휴대용 컴퓨터 또는 전동 워드프로세서인 줄 알았다. 군더더기 없는 본체의 선과 선명한 붉은색, 재질감 등은 전 시대의 유물이라 생각할 수 없는 경지였다.
군입대 전, 군복무에 유용할것이라는 생각에 상경대 건물에 있던 타자실에서 타자기 연습을 했었다. 그 곳에서 올리베티 타자기를 처음 만져봤다. 군대에서는 클로버라는 국산 타자기에 먹지를 몇장씩 끼워 문서를 복제하는 작업을 했었다. 제대 후 복학해서야 대우의 워드프로세서 르모를 거쳐 삼보트라이젬 XT 퍼스널 컴퓨터를 썼다. 이후 애플의 매킨토시를 사용하며 제품 디자인에 안목이 높아졌지만 올리베티 타자기가 주는 감동은 여전히 크다. 흔히 말하는 시대를 뛰어넘는 디자인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컴퓨터를 쓰는 지금도 키보드를 고르는데 까다로운 편이다. 타자기를 썼던 감각 때문일 것이다. 키가 눌리는 느낌과 깊이감, 그리고 롤러에 감긴 종이를 타격하는 충격음과 행을 바꿔주는 레버의 소리는 일반 기계와는 다른 물체라는 것을 매번 느끼게 한다.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서 주인공 숀 코넬리는 재능있는 흑인 소년에게 자신의 글을 타자기로 따라치게 하며 글의 리듬을 익히게 한다. 타자기는 글자를 생산하는 기계지만 영감을 끌어내는 악기, 피아노와 같은 사물이기도 하다.
내방 한쪽에 놓인 이 빨간 사물의 용도를 단번에 알아맞힌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이 타자기가 내 작업에서 직접적인 생산 도구는 아니지만 글을 쓰고 싶어하는 내 안의 욕망을 꺼지지 않게 지켜봐주는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