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신이 디자인한 엄유정 작가의 화집 “FEUILLES”는 2020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혔다. 이어 올해에는 30개국에서 참여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공모전에서 최고 상인 골든레터까지 수상했다.
심사위원들은 ‘섬세하고 고운 종이 위에 연필 드로잉으로 시작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선과 종이 두께가 두꺼워지면서 디테일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리고 엄선된 소재로 독자에게 작가의 작품을 촉감을 통해 경험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라고 평가했다. 이를 다시 해석하면 작가의 그림을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 청각 등 다른 감각으로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냈다는 뜻이다.
사실, 이제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닌 ‘경험’하는 시대에 서 있다. 책장을 넘길 때의 부드러운 감촉과 손에 딱 쥐어지는 그립감, 눈이 피로하지 않는 적당한 글자의 크기… 디자이너는 이 모든 걸 통제하고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디자이너에게 책이란, 일반인과는 다른 존재로 다가온다. 그래서 궁금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을 만든 신신은 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또, 어떤 책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
책 ‘FEUILLES”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공모전에서 골든레터를 받으셨죠. 축하드려요.
신해옥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을 때부터 이 공모전에서 수상한 책들을 유심히 지켜봐 오면서 간간이 직접 구매하기도 했었는데, 우리가 그중 하나가 되다니 믿기지가 않았어요. 브론즈 메달이었어도 대단했을텐데 최고상이라니… 믿을 수 없어서 동혁 씨에게 ‘진짜일까? 오해가 있는 거 아닐까?’하고 계속 물어봤죠.
신동혁 원래대로라면 프랑크푸르트 북페어에서 시상식과 전시를 하는 거였는데, 올해는 팬데믹 때문에 행사가 취소되었어요. 아쉽긴 하지만 라이프치히 책 박물관에 영구 소장이 된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고 있어요. 아마 저희보다 이 책이 오래 살지 않을까 싶어요.
박물관에서 디자이너보다 오래 살아남는 책이라니… 정말 멋진 일 아닌가요!
신동혁 디자이너는 자신의 활동을 증명받을 기회가 많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작업이 객관적으로도 좋은 성과인지 자문했을 때, 답을 얻기가 쉽지 않았어요. 이번 기회를 통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것 같아요.
신해옥 디자인 분야에서 평론을 듣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두 공모전을 통해 우리 작업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읽히는지를 들을 수 있었어요. 특히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공모전에서 문장현 이사님의 평론은 많은 도움이 되었죠.
심사평을 보니까 놀랍게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모두 동일한 부분에 주목했더라고요.
신해옥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 출품했을 때는 심사위원들이 디자인 의도를 어느 정도는 읽어 줄 거라 생각했어요. 신신의 디자인을 봐왔던 분들이니까요. 그런데 우리 작업을 처음 본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의 심사위원들도 같은 반응을 보여줘서 신기했어요.
어떤 태도로 책을 대해야 아름다운 책을 디자인할 수 있나요?
신동혁 역설적으로 우리는 책을 공산품이라고 봐요. 튼튼하고 읽기 편하게 내구성, 펼침성, 제본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공산품이라는 틀 안에서 어떻게 남다른 지점을 확보하고, 게으르지 않는 디자인을 보여줄지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신해옥 책이 수공예품처럼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요. 주로 아티스트 책을 디자인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디자이너의 자아가 반영된 작품처럼 보일 수 있거든요. 그래서 항상 공산품과 아트북의 중간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해요. 책이란 우리의 아름다운 선택이 잘 반영된 물건이니까요.
“FEUILLES”는 그림 재료에 따라 종이를 다르게 하는 ‘아름다운 선택’을 했죠.
신동혁 작가님의 그림을 보고 ‘이와 잘 어울리는 종이와 인쇄 기법을 매칭하는 것만으로도 디자인은 완성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FEUILLES” 시리즈는 그림 기법과 재료에 따라 가벼운 색연필·펜 드로잉, 매트한 질감부터 두텁고 광택이 도는 대형 과슈·아크릴화로 구분할 수 있어요. 이렇게 재료와 매체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의 느낌을 종이 무게로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책의 흐름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신해옥 얇고 가벼운 종이로 시작해서 점점 두께가 두꺼워지도록 종이를 배치했어요. 그래서 독자는 책의 순서를 종이 두께로도 알 수 있죠. 한편, 페이지 번호나 캡션 같은 텍스트는 앞표지에 따로 배치함으로써 최대한 그림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했어요. “FEUILLES”는 화집이기 때문에 그림이 중요한 책이니까요. 그리고 ‘각 페이지를 잘라서 액자에 넣어도 된다’는 메시지를 책의 형식으로 전달하고 싶기도 했어요.
작년 겨울, 해옥 씨가 집필한 책 “개별꽃 Gathering Flowers”를 출간했어요. 다른 아티스트의 책을 디자인하다가 직접 자신의 책을 디자인했는데 어땠나요?
신해옥 디자인은 동혁 씨에게 부탁했어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이미지를 동혁 씨의 눈을 빌려서 객관화하고 싶었거든요. <개별꽃>의 원형이 되는 글은 메모하듯이 쓴 글이라서 책 디자인 역시 메모를 적는 노트처럼 가볍고, 잘 펼쳐지고, 한 손에 잡혔으면 했어요. 그리고 하얀 종이에 진한 글자로 읽기 쉬웠으면 했고요.
굉장히 어려운 주문인데요. (웃음)
신동혁 그런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어요. 오랫동안 일을 같이 하면서 해옥 씨가 어떤 책을 추구하는지 알고 있었고, 또 이 책을 써온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저절로 스터디를 한 셈이라 작업은 빨리 끝났어요. 하지만 스스로 만드는 책이라서 그런지 자기검열을 더 하게 되더라고요.
책을 만드는 디자이너로서 두 사람은 어떤 책을 좋아하나요?
신해옥 책을 만드는 사람이자 수집가로서 책을 항상 주변에 두고 만져보고 읽어보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다시 펼쳐보고요. 그래서 처음에 완전히 마음을 뺏기는 책보다 계속 옆에 두고 만지면서 봐도 부담 없는 책을 좋아하고 가까이 둬요.
신동혁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시간을 이기는 책’을 좋아하죠.
신해옥 그리고 기본적으로 잘 만들어진 책과 만드는 사람의 자아가 과하게 담겨 있지 않는 책도 좋아해요. 간혹 콘텐츠도 좋고 잘 만들기도 했지만 지루한 책이 있어요.
신동혁 전 디자이너보다 미술가가 만든 책을 좋아해요. 예를 들면 솔 르윗의 아트북이요. 솔 르윗은 책의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작가라 웬만한 디자이너보다 책 디자인을 더 잘 해요. 표지와 내지의 관계, 인쇄 기법 등… 잘 짜인 다이어그램 같아서 볼 때마다 새로운 걸 배워요.
책의 위상이 점점 변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이런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신동혁 전시 도록을 디자인하면서 드는 생각은, 이제 더 이상 단순 기록용으로 책을 만드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사진, 영상같이 시공간을 책보다 더 생생하게 기록하는 매체가 등장했으니까요. 만약 도록을 만들어야 한다면, 기획 단계부터 전시와 동등한 위계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은 움직이는 전시장’이라는 말처럼, 책은 전시가 끝나거나, 작가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돌아다니거든요. 그러므로 이제는 책이 가진 ‘공간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해옥 웹사이트나 영상을 작업하다 보면 끝이 없다는 느낌에 허무함이 밀려올 때가 있어요. 끊임없이 업데이트를 해줘야 하고, 플러그인이나 서버가 없어지면 열심히 만들었던 작업물이 사라지기도 하니까요. 반대로 책은 제작 시 한계가 많지만 귀결점이 있어요. 뭔가 끝이 있다는 사실에 편안해질 때가 있어요.
작업 시간, 방법 같은 물리적인 부분 외에 작업자로서 느끼는 감정에서도 책과 다른 매체의 차이점이 크게 다가올 때가 있죠?
신동혁 열심히 작업한 결과물이 일시적으로 사용되고 사라지는 걸 10년 넘게 경험하다 보니 오랫동안 남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어요. 의외로 그 순간만 사용되고 사라지는 디자인이 많거든요. 상대적으로 책은 오래 남기 때문에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디자인을 하려고 하죠.
신해옥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경을 쓰고 잘 만들어야 해요. 흑역사가 남지 않게. (웃음) 요즘처럼 비슷한 정보를 공유하고, 몰취향의 시대에서는 오래 유지되는 것의 가치가 높아질 테니까요.
맞아요. 무엇이 되었든 지속 시간이 짧아지는 것 같아요. 요즘에는.
신동혁 출강을 나가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볼 게 많아서 힘들다고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정신을 놓치면 알고리즘에 의해 남들과 같은 것을 보고 있죠. 결국, 취향이 다양해지기 힘든 시대가 된 거예요.
신해옥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처음에는 시작이 달랐는데 어느새 같은 이미지를 공유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돼요. 이런 시대에서는 애를 부단히 써야 시류에서 겨우 조금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볼 건 많으나 막상 취향은 동일해지는 시대에서 책은 자신만의 장점을 지니며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신동혁 지금처럼 책이 당연하게 소비되는 물건이 아닌 시대에서는 특별한 마음으로 종이책을 만들어야 해요. 재미있는 경험을 만들어 주거나, 물리적인 변수를 통해 다른 활로를 열어줄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야 하죠.
신해옥 그러다 보면 귀족이나 부르주아 등 사회 고위층만 책을 읽던 시대가 돌아올지도 몰라요. 실제로 많은 인쇄소들이 문을 닫고, 고품질의 인쇄가 가능한 인쇄소만 남게 되면서 책의 제작 단가가 올라가기 시작했거든요.
신동혁 책을 만드는 게 품이 많이 드는 일이 된다면 언젠가 책은 사치품이 될 거예요. 책은 해지기도 하면서 사람들과 늙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매체인데 유리장에 모셔 두는 존재가 된다면 슬픈 일이죠.
신해옥 사치품이 되어도 책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디스플레이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책은 여전히 종이라는 인터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잖아요. 사람 손으로 보기에 적합한 이 형태가 최선이자 완결된 형태인 거죠. 먼 미래에도 책은 지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거예요.
개념미술가 솔 르윗이 만든 책이에요. 오른쪽 페이지에는 선이 그려져 있고, 왼쪽 페이지에는 그 선을 지시하는 문장이 쓰여있어요. 페이지를 넘길수록 추가되는 선의 위치와 길이는 애매해지고, 왼쪽 페이지의 설명문은 길어져요.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며 점점 늘어나는 선과 문장을 보면서 끝을 가늠하게 되죠. 시각 데이터를 언어화하는 과정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해옥 씨는 이 책을 바탕으로 웹페이지도 만들고, 복각판을 구매하기도 했어요.
스위스 디자이너 율리아 보른 Julia Born이 디자인한 책이에요. 지난 60년 동안 ‘스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공모전에서 수상한 책에 대한 설명을 한 가지 사이즈·두께의 폰트로만 기재해서 시각적으로는 지루하게 보여요. 그런데 디자이너는 책 사이, 사이에 있는 장 표지를 과감하게 45도로 접어 분위기를 환기시키죠. 작은 제스처 하나만으로도 책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에요.
이 책의 원형이 되는 글을 쓸 때는 마음에 드는 글귀를 받아 적거나, 떠오르는 생각을 적는 등 가벼운 메모처럼 썼어요. 그래서 읽는 사람이 제 노트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면 해서 동혁 씨에게 노트처럼 디자인해달라고 부탁했죠. 디자인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잘’ 만들어진 책이었으면 했거든요. 또, 저에게는 의미가 큰 책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