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30

자동차 디자이너가 연 문화 공간

라운지와 서가, 미니 갤러리까지.
자동차를 취재하면서 국내 SNS에서 멋진 차 사진을 마주칠 때마다 안타까운 것이 있다. 아름답고 오래된 자동차를 촬영한 배경이 고속도로 휴게소나 지하 주차장이라는 점이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공간과 계기가 부족한 탓이다. 때 빼고 광낸 소중한 애장품을 흙먼지 날리는 곳에 세워 두어야만 했던 쓰라린 마음이 전해지고 만다.

지난 6월 강남구 신사동에 문을 연 ‘에레보'는 이런 고민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다. 자동차 디자이너와 기자를 거친 정영철 대표, 자동차 기자 출신의 김송은 PD와 현직 자동차 디자이너인 김태형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만드는 자동차 문화 공간이다. 자동차를 갖고 있거나 그렇지 않은 이들도 함께 자동차와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다.
© 에레보

 

공간은 외관에서부터 고정관념을 깬다. 카센터나 튜닝숍 같은 기존의 자동차 공간이 지닌 묵직한 분위기를 따르지 않는다. 트렌디한 카페에서 볼 법한 유리블록과 푸른색 사이니지, 선인장이 가세한 건물 전면이 여유로운 인상을 풍긴다. 좌측으로 난 주차장에 세워진 강렬한 차의 얼굴들이 공간의 성격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 design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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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레보

 

안으로 들어서면 라운지와 서가, 미니 갤러리가 있다. 라운지에선 커피와 에이드 등 간단한 식음료를 즐길 수 있다. 메뉴 가짓수는 많지 않지만 하나하나에 공을 들였다. 원두는 호주의 듁스 커피를 쓴다. 서가에서는 굵직한 자동차 브랜드와 카로체리아의 디자인 도록과 사진집을 자유롭게 볼 수 있다. 정영철 대표가 10여 년간 모은 것에 최근 기증받은 것을 더했다.

 

영국 플레이포에버 사의 아트 토이를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만나볼 수 있다. 방문객들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컬러링한 포르쉐 911.© designpress

스탠딩 방식의 테이블에선 시즌마다 새롭게 준비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취재 당일에는 클래식 포르쉐 911 도안을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컬러링 한 결과물이 펼쳐져 있었다. “각자의 개성과 차에 대한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이 흥미로워요.” 김송은 PD가 덧붙였다.

가장 안쪽의 미니 갤러리는 조명부터 신경을 썼다. 실제 자동차 디자인 과정에서 사용하는 면발광 조명이다. 공간에서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주차 공간에도 같은 방식의 조명을 썼다. 자동차 디자인 과정에서 시안을 살필 때 직광으로 인해 생기는 불필요한 그림자를 없애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자동차 디자이너로 일했던 정영철 대표의 아이디어다. “실제 디자인 과정에선 면의 비례까지 정확히 보기 위해 그리드를 그린 조명을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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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전시로는 국민대 자동차 디자인 전공생의 졸업 작품을 선보였고 현재는 이현무 디자이너의 자동차 디자인 아트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자동차 디자인에 기반한 아트워크를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Interview 에레보 정영철 대표, 김송은 PD

 

‘에레보’란 이름의 의미는.

차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학교에 가면 연습장을 펼치고 끊임없이 차 그림을 그립니다. 저도 그렇게 그림을 그리면서 미래에 제가 만들 자동차 브랜드를 상상했어요. 중학교 때 만든 상상 속의 슈퍼카 브랜드가 있었는데 그게 에레보였어요. 에볼루션(진화)에 레볼루션(혁명)을 더해서 에레보. (웃음)

‘공간’을 만든 이유는.

미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할 때 방문했던 데우스 카페*와 피리어드 코렉트**의 공간에서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영향으로 모터사이클 면허를 따고 76년식 바이크를 사기까지 했죠. 공간에는 총체적인 경험을 전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에레보 역시 그런 공간으로 꾸려가고자 하고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china의 쇼룸 겸 카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모터사이클 커스터마이징으로 시작해 서핑, 스케이트 보드 등의 서브컬쳐를 기반으로 한 호주의 패션 브랜드다. 이탈리아 밀라노, 미국 LA, 인도네시아 발리, 일본 도쿄 등에 매장이 있으며 2020년 말 서울점이 개점하기도 했다.
**Period Correct. 자동차 문화를 기반으로 LA에서 전개된 컬쳐 브랜드. 포르쉐 파츠 스토어를 개조한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는 패션 아이템부터 잡지, 빈티지 차까지 폭넓은 아이템을 취급했다.

 

© 에레보
© designpress

 

차에 대해 없던 관심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에요. 차에 대한 두 분의 관심은 언제 시작됐어요.

어릴 때부터 자동차 애호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자동차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JDM*이라 불리는 일본 기반의 계열을 좋아하셨고 저는 유럽 디자인을 더 선호했지만요. (웃음) 자연스럽게 자동차 디자인을 전공(아트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하게 됐고 이후 디지털 모델러로 일하다 자동차 기자가 됐어요.

질문을 던지는 직업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껴 기자가 되었고, 자동차 분야에 출입하게 되면서 자동차의 매력을 깨닫게 된 케이스예요. 지금도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일본 버블경제 시기 내수용(Japanese Domestic Market)으로 출시된 다양한 스타일의 스포츠카를 이른다.
 
일요일 모닝 커피를 즐기는 롤링 선데이 현장. © 에레보

 

일요일마다 ‘롤링 선데이’란 밋업 행사가 있지요. 추후 운영 방향도 궁금합니다.

자동차와 모터사이클을 포함해 바퀴가 달린 어떤 것이든 포용하는 의미로 ‘롤링’이란 말을 만들었어요. 누구나 와서 자동차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코로나 시기로 조심스럽지만, 자동차를 매개로 한 프로그램의 폭을 넓혀 보고자 해요. 자동차가 등장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방문객들과 릴레이 소설을 쓰거나, 자동차가 중요한 장치로 쓰인 문학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에레보만의 에디토리얼이나 영상 콘텐츠가 나올 수도 있고요. 무엇이든 기대해 주셔도 좋아요.

 

글, 사진 유미진

장소
에레보 (서울시 강남구 논현로809 1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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