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0

가장 한국적인 궁궐에 들어선 의자

창덕궁 국빈 의전 가구 디자인.
창덕궁 국빈 의전을 위해 가구 실험가들이 모였다. 전통을 모티프로 동시대적 미감을 절묘하게 표현한 입식 가구들이 잔잔한 공간에 한 점의 작품처럼 놓였다. 이제 국빈 행사에서 중요한 것은 만찬 메뉴와 공연 무대뿐만이 아니다. 음식을 담아내는 그릇부터 의자 등받이까지, 환대가 이루어지는 장소의 크고 작은 시각 요소들은 곧 국가 브랜딩이자 문화적 자긍심의 발현이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어떠한 기능과 미학적 맵시로 디자인을 제안했을까?
창덕궁 국빈 의전용 가구 디자인. 좌식이 익숙지 않은 외국 손님을 위한 입식 가구이면서 한국 문화를 담고 있다.

 

Interview 곽철안 디자이너

 

창덕궁은 ‘가장 한국적인 궁궐’로 꼽히는 궁이다. 이곳의 가구를 만든 배경이 궁금하다.

외국 정상 환영식은 통상 청와대 대정원에서 열렸다. 국빈 방한이 창덕궁에서 이루어진 것은 2018년 9월이 처음이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내외가 방문하는 친교 행사였다. 당시 영화당에 개인 소반과 방석을 놓고 차담을 나누었는데, 이후 좌식이 불편한 외국 귀빈들을 위한 입식 가구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되었다. 우리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되 입식 생활에 맞는 새로운 가구를 제안해달라는 창덕궁관리소의 요청이 있어 본 프로젝트의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하게 됐다.

 

다양한 체형을 고려하여 의자에 넓은 좌판 형태를 적용했다. 다리 3개로 이루어진 의자는 나무 바닥의 불규칙한 평활도를 보완하기 위한 구조다.

 

창덕궁관리소가 강조한 사항은 무엇이었나?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창덕궁의 역사와 정취를 담은 디자인, 다양한 체형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형태, 그리고 오래된 나무 바닥의 불규칙한 평활도를 보완하는 것이었다.

 

행사가 열린 영화당은 창덕궁 첫 번째 후원의 연못 ‘부용지’와 면해 있다. 이곳의 공간적 맥락을 어떻게 반영했나?

영화당은 조선시대 과거 시험장이자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베풀고 활을 쏘던 장소였다. 여기서 내려다보이는 부용지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따라 지은 연못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고대 동양 우주관이다. 네모난 연못 안에 둥근 섬을 만들고 그 안에 커다란 소나무를 심었다. 연못이 땅이라면 섬은 하늘인 셈이다. 간혹 술에 취한 왕은 농담처럼 신하들을 ‘섬’으로 유배 보내기도 했단다. 이러한 창덕궁 후원의 특수성을 반영하기 위해 ‘천원지방’을 디자인 기본 개념으로 설정했다. 삼각형의 넓은 좌판으로 이루어진 의자 4개가 중심을 바라보도록 배치하고 가운데 원형 차탁을 두었다. 창덕궁 후원의 특수성을 반영하여 부용지 형상을 차용한 것이다.

 

 

넓은 좌판을 다리 3개로 지탱하면 불안감은 없는지?

영화당 마룻바닥의 평활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리 3개인 구조가 안정적이었다. 4개일 경우 바닥 위로 뜨는 다리가 하나씩 생기며 의자가 까딱까딱 흔들렸는데 3개가 되니 모든 다리가 지면에 닿았다. 동시에 넓은 좌판으로 다양한 체형을 아우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천원지방’의 형태적 구성을 고려한 디자인이 초기 계획 단계에서 충족하고자 했던 여러 요건을 연쇄적으로 해결해준 셈이다. 등받이는 고정형으로 하여 착석감을 높였다. 아주 느슨하게 기대어 앉기보다는 적당히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기에 좋은 의자다.

 

 

‘국빈 의전’을 위한 가구 디자인은 어떠한 필요충분조건을 지니는가?

대화에 소외되는 인물이 생기면 안 된다. 대통령과 대통령, 영부인과 영부인만 마주 앉는 방식은 대화의 흐름을 단조롭게 만든다. 4인이 둘러앉는 배치를 통해 대화 주체들 간 원활한 의사소통이 오갈 수 있도록 공간적 상황을 제시했다. 또한, 차경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가급적 배제했다. 영화당에서 부용지를 내려다보는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350㎜의 비교적 낮은 좌판을 택한 이유다. 후원의 정자 문화를 반영하고 주변 경관 요소들을 최대한 살핀 것이다. 의자를 자세히 보면 팔걸이와 등받이, 기둥의 조각 등이 영화당 난간을 모티프로 디자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외국에서 온 귀빈들이 비록 좌식 문화를 경험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선조들이 난간에 기대앉아 멀리 풍경을 내다보았던 그 정서는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의자의 높이는 의도적으로 낮춘 것이다. 주변 경관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시야를 고려했다.

 

사이드 테이블은 전통 소반의 형태를 차용했다.

한 개의 기둥이 중심을 받치는 ‘일주반’을 재해석한 개인 찻상이다. 전통 일주반과는 달리 다리를 3개로 디자인하였다. 이 또한 불규칙한 영화당 바닥의 평활도를 보완하기 위함이다. 손님에게 드리는 찻상을 일일이 따로 제작한 것은 한국의 각상 문화를 의전 행사에 녹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다과를 차린 소반 그대로 착석한 이에게 대접하는 전통 방식을 반영하되 보다 가벼운 형태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디자인, 제작, 옻칠 과정에 함께 참여한 작가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선별한 것인가?

전통 기술 분야에서 완성도와 숙련도를 갖춘 작가들. 하지만 전통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들였던 젊은 작가들과 함께했다. 궁궐의 격을 갖춘 가구이기를 의도했지만, 조선 왕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디자인은 가급적 지양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해 아쉽게도 국빈 행사에서 실제로 쓰인 적은 한 번도 없다. 향후 가구의 쓰임에 대한 또 다른 고민은 없는지?

좌식 문화에 익숙지 않은 외국 손님들에 대한 배려로 시작한 프로젝트지만, 국빈 의전이 아닌 창덕궁 내 다양한 행사에 활용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물론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한계는 있겠지만 최근에는 메인 의자, 원반 탁자, 개인 찻상, 통역 의자 외에 추가 의자를 새롭게 디자인하기도 했다. 이는 4인이 아닌 8인까지 모일 경우를 상정하여 제작한 것이다.

 

 
기획 창덕궁
운영 상명대학교 산학협력단
디자인 곽철안, 이삼웅
백골 제작 권원덕, 배세웅
옻칠 박강용, 유남권
사진 선민수

 

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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