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선 박물관을 ‘쿤스트캄머(KunstKammer)’라는 말로도 부른다. 16~17세기 진귀한 물건과 수집품을 모아둔 방을 일컫는 말이 현대로 오면서 박물관이라는 의미로 발전한 것이다. 그 뜻대로 박물관(미술관)은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곳이다. 하지만 예술의 개념이 확장되면서 예술품을 수집하고 진열하는 공간만으로는 가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박물관(미술관)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기준에 따라 분류하고, 특별한 스토리를 지어 선별한 작품을 전시하고,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장소가 되었다.
디자인 미술관도 마찬가지다. 일상생활에서 가깝게 사용하는 제품들이 전시되는 디자인 미술관은 시대를 반영한 큐레이션 주제와 폭 넓고 유연한 시각으로 디자인 작품을 전시하고자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저 생활용품을 진열한 공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2021년 9월에 시작한 상설 전시 <X-D-E-P-O-T>는 현 디자인 미술관과 전시가 나아갈 방향을 보여준다. 미술, 디자인, 건축을 아우르는 독일 뮌헨 현대 미술관 ‘피어코덱 데어 모데르네(Pinakothek der Moderne)’에 위치한 ‘디 노이에 잠룽(Die Neue Samlung), 뮌헨 디자인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X-D-E-P-O-T>는 350여 명의 디자이너의 600여 개 디자인 작품을 여러 주제와 분류로 진열하여 새로운 영감과 담론을 제공한다.
<X-D-E-P-O-T> 전시장은 피어코덱 데어 모데르네와 디 노이에 잠룽을 연결하는 지하에 위치하여 미술관 창고로 사용되던 곳이다. 2021년, 독일의 유명 건축 사무소 ‘퀸 말베치(Kuehn Malvezzi)’가 리모델링하여 전시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창고로 이용하던 공간이라 600평이라는 넓은 평수와 높은 층고를 자랑한다. 퀸 말베치는 이 공간에 경사로를 설치하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높은 선반을 3개의 벽에 설치했다. 또한, 경사로를 따라서 유리 전시장이 설치되어 관람객은 층을 내려가면서 전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유리 전시장에는 도자기, 주방용품과 같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활용품은 물론 게임기, 사진기, 장난감과 같이 취미 용품 등 크기가 작은 디자인 작품이 진열되어 있다. 층을 내려가면 그보다 더 큰 디자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구와 조명, 심지어 자전거와 보트 같은 탈 것까지 다양한 디자인 작품들이 천장까지 닿는 높은 선반을 가득 채운 광경에 놀라게 된다. 또한, 많은 수는 아니지만 패키지 및 포스터 등 그래픽 디자인 작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X-D-E-P-O-T>에 전시된 디자인 작품들은 지금까지 전시된 적이 없는 것들로, 30가지 테마에 맞춰 진열되어 있다.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를 연대, 지리, 계층구조 등 뻔한 기준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재료, 색, 형태, 분야, 담론 등 디자인을 논할 때 나오는 다양한 기준을 바탕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지속가능성, 의료 디자인 등 현 디자인 업계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도 포함하여 기존보다 더 다양한 시각을 전달한다.
이러한 분류 기준의 다양성은 전시 방법에도 나타난다. 딱딱 맞아떨어진 선반에 진열된 디자인 작품들은 명확하게 구분되어 보이지만, 수평/수직 방향에 따라 새로운 관계들이 맺어진다. 어떤 전시 작품들은 수평 방향으로 같은 주제끼리 진열되어 있다면, 또 다른 작품들은 수직 방향으로 묶어진다. 이처럼 전시 <X-D-E-P-O-T>는 분류 기준을 제시하지만, 동시에 관람객의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재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 덕분에 전시 <X-D-E-P-O-T>는 디자인에 관한 새로운 시각과 담론을 제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디 노이에 잠룽(뮌헨 디자인 미술관)은 <X-D-E-P-O-T>가 폭넓은 시각을 제공하는 전시가 되기를 바란다. 이 바람을 전시 제목에도 담았다. ‘X-D-E-P-O-T’라는 이름은 X와 창고(Depot)라는 두 단어를 결합한 것으로, X는 접두사 ex-를 줄인 표현이다. 그래서 X는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미술관은 탐구하다(X-plore), 경험하다(X-perience), 설명하다(X-plain), 확장하다(X-tend), 전시하다(X-hibit), 실험하다(X-periment), 표현하다(X-press), 확장하다(X-pand) 등의 단어를 예로 들며 <X-D-E-P-O-T>가 앞으로 할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설명했다.
상설 전시로 언제든지 볼 수 있는 <X-D-E-P-O-T>는 전시를 넘어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미술관은 디자이너, 교육기관과 함께 정기 프로젝트와 워크숍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디자인을 새롭게 바라보고 담론을 논하기 위하여 디지털 도구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전시장에서도 비디오와 오디오 등의 시청각 자료를 제공하지만, 웹사이트를 통해서도 전시 정보를 전달하기 때문에 관람객은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미술관 사이트 내 전시 페이지를 가면 전시장의 정보는 물론,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와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아쉽게도 독일어로만 제공된다). 또한, 전시장 버추얼 투어도 가능하다. 덕분에 독일 뮌헨까지 가지 않아도 어디에서든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인스타그램 필터와 앱 등을 제공하여 온라인 안에서도 전시를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미술관은 예술품을 전시하고 사람들에게 예술적 감성을 높여주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한 시대의 가치관을 보여줄 수 있는 예술품을 소장함으로써 시공간을 저장하고, 미래에 현재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전달한다. 그렇기에 현재의 미술관은 정말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그 수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 소장품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중요한 작품이라도 그 빛을 잃을 것이다. 또, 작품들을 단순히 나열만 한다면 우리에게 그 어떠한 영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미술관은 소장품을 보다 더 새로운 시각과 방법으로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이런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X-D-E-P-O-T>는 이러한 디자인 미술관의 변화와 발전을 보여주는 전시다. 전시가 추구하는 방향이 무겁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전시 <X-D-E-P-O-T>는 색색의 컬러와 아름다운 형태를 지닌 디자인 작품들을 보며 시각적 즐거움만을 느껴도 충분하다.
글 허영은 객원 필자
자료 제공 Die Neue Samlung(https://dnstdm.d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