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29

삼각지를 안내하는 디자이너의 가이드북

숙대입구부터 한강대교까지, 파르품삼각 가이드
삼각지의 가이드가 된 디자이너, 바로 황인권 디자이너이다. 그에게 삼각지는 일상의 공간이다. 집도, 디자인 스튜디오도, 브랜드 쇼룸도 모두 삼각지에 자리한다. 생활권과 일터 모두 삼각지와 그 일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삼각지 로컬 피플인 셈이다. 삼각지역 13번 출구에서 도보 3분 거리에는 그가 운영하는 '파르품삼각'의 쇼룸도 자리한다. 삼각지의 로컬 퍼퓨머리인 이곳이 최근 주목 받기 시작한 건 바로 삼각지 일대의 트렌디한 공간을 소개하는 가이드북 '파르품삼각 가이드' 때문이다. 오는 9월 중순 발행을 앞둔 5호에서는 무려 400여 개의 공간을 소개할 예정이라고. 삼각지의 가이드가 된 디자이너의 사연을 들어봤다.

향을 만드는 삼각지의 디자이너

파르품삼각 로고 디자인 (이미지 제공. 파르품삼각)

2020년 12월, 로컬 퍼퓨머리 ‘파르품삼각’을 론칭했어요. 브랜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 삼각지에 쇼룸이 자리하는데요. 삼각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것 같아요.

 

삼각지에서만 15년을 살았어요. 집도, 디자인 스튜디오도 모두 삼각지 안에 있고요. 근처 숙명여대 문헌정보학과 겸임 교수로 오랜 시간 출강한 이유도 있죠. 일터와 생활권이 모두 이곳에 자리하는 셈이죠. 저와 아내 그리고 반려견 콩이와 빠짐 없이 매일 6.5km를 걷는데요. 남산 밑 해방촌, 한강진역, 서울역, 공덕역, 그리고 이촌동까지를 매일 걸어요. 일년에 약 2,000km 정도 걷더라고요. 이렇게 매일 걸으면 뭐가 보이는지 아세요? 바로 새롭게 생겨나는 가게와 사라지는 가게가 보여요. 트렌드의 흐름이 보이는 거죠.

그렇다면 이제는 그 트렌드의 중심이 삼각지 차례인건가요? 삼각지가 아닌 곳 중에서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곳이 분명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글쎄요… 성수동? 저는 브랜딩 및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주로 해오다보니 트렌드 투어를 자주 다녔어요. 10년 전에는 홍대와 합정을, 5년 전에는 성수동을 많이 갔죠. 처음에 로컬 퍼퓨머리 브랜드의 오프라인 공간으로 성수동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소규모 스튜디오부터 대형 브랜드까지 각축을 벌이는 성수동에서 애매한 포지셔닝으로 있기 보다 삼각지에서 오랜 시간 터를 다지는 편이 좋겠다 싶었어요.

알기로는 디지털미디어디자인을 전공하셨다고요. 향이라는 감각을 다루는 브랜드를 운영하고 계신 건 좀 의외인데요?

 

맞아요. 이전에는 로고와 아이덴티티 디자인처럼 평면을 다루는 작업을 해왔죠. 하지만 어느 순간 센소리 브랜딩Sensonry Branding 이슈가 점차 늘어나더라고요. 이러한 흐름에 맞춰 ‘후각’이라는 감각을 보다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어요. 마침 홍익대학교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아이다스IDAS‘에서 함께 공부한 동료들이 선행 디자인 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터라 관련해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던 이유도 있죠.

향을 만드는 일과 디자인은 다를 게 없다는 황인권 디자이너. 그는 다채로운 향수 브랜드를 소개하는 클래스도 진행 중이다. ⓒheyPOP

디자인과 향을 만드는 일은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해요.

 

디자인도 시대에 따라서 특정 기조가 있는 것처럼 향수도 마찬가지에요. 정(正), 반(反), 합(合)의 구조로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발전해 나가는 디자인의 발전 구조와 다를게 없죠.

파르품삼각의 시그니처 향수는 한강, 남산, 이태원까지 세 가지잖아요. 처음 제작했던 향수의 향도 기억하세요?

 

많이 무난한 향이었어요. 남산은 ‘플로럴’, 한강은 ‘시트러스’, 이태원은 ‘우디’라는 방향성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20-40대에게 모두 접근할 수 있는 향이 나왔어요. 너무 무난한 탓에 더 날렵하게 향을 조율하는 일에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20-30대를 타켓으로 보다 더 심플한 느낌을 냈지만 요즘의 니치 향수들과 비교하면 어디선가 시향해 본 느낌이 들더라고요. 최종 단계에 이르러서 20대 초반을 타겟팅으로 한 향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디자이너, 삼각지 가이드가 되다!

파르품삼각 가이드. 로컬 퍼퓨머리 '파르품삼각'이 제작하는 가이드 북이다. (이미지 제공. 파르품삼각)

최근 파르품삼각이 돋보이는 건 무엇보다 <파르품삼각 가이드>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를 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우리가 ‘로컬 퍼퓨머리’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저희는 여행지의 추억에 관련된 향을 만들고 있기에 자연스레 ‘서울’과 ‘여행’이라는 단어가 머릿 속에 있었어요. 또한 앞서 이야기한대로 매일 산책을 다니면서 삼각지 일대에 좋은 매장들이 생기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고요. 평소 ‘미슐랭 가이드’와 ‘루이비통 시티 가이드’를 재미있게 봤던 터라 그와 같은 것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매체인 ‘종이’를 선택한 이유도 있나요?

파르품삼각이라는 브랜드가 스스로 로컬 퍼퓨머리의 오리진(origin)을 갖추기 위해서는 오프라인 쇼룸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브랜드 메테리얼이 필수라고 생각했어요. 특히 후각은 물리적인 형태가 아니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감각이잖아요. 다행히 종이책으로 제작하니 쉽게 버리진 못하시더라고요.

에 적용한 서체 종류 (이미지 제공. 파르품삼각)
파르품삼각 가이드에 사용 중인 영문 서체 'Cako' (이미지 제공. 파르품삼각)

<파르품삼각 가이드>는 1호부터 4호까지 적용한 서체가 다른 점도 눈길을 끌어요.각 호마다 서체를 다르게 사용한 이유가 있다면요?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Sandoll 설야’를 사용했습니다. 약간 깍쟁이 같지만 센스와 절도가 느껴졌거든요. 비주얼 아이덴티티의 룩look을 맞춰야 하는 작업에 꼭 써보고 싶었어요. 또, 저희가 사용 중인 영문 서체 ‘Cako’와도 잘 어울렸고요. 반면, 3호에서는 콘텐츠 내용이 2배 이상 늘어나면서 가독성 이슈를 고려해야 했어요. 고딕체를 사용했죠. 완성도가 높으면서 무료 서체인 ‘프리텐다드’를 선택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뛰어난 서체라고 생각해요.

 

4호에서는 커버색을 형광 연두로 바꾸면서 보다 힙한 느낌을 내고 싶었어요. ‘Sandoll 칠성조선소’가 어울리겠더라고요. 호불호가 갈리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시도였고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오는 9월에는 5호 발행을 앞두고 있는데요. 최근에는 브랜드 타겟층을 23-27로 설정해 이들의 취향을 만족할 서체가 무엇일지 아직 고민 중입니다.

2021년 가을/겨울부터 2023년 봄/여름까지 적용된 컬러 시스템 (이미지 제공. 파르품삼각)

서체와 함께 매 호마다 ‘키 컬러(key color)’가 달라지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주황색부터 형광색까지. <파르품삼각 가이드>에 적용한 컬러의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파르품삼각의 아이덴티티 컬러는 ‘네온 주황’이에요. 저희 공간의 벽돌색과도 잘 어울리고, 새로운 서울의 중심을 어떤 색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어요. 최종 단계에서 ‘네온 연두’와 ‘네온 주황’이 나왔는데요. 주황색을 택했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럭셔리 브랜드인 ‘에르메스’에 대한 경외감을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해 파르품삼각이 에르메스보다 ‘New’라는 의미에서 밝음을 넣고 싶었어요. 가이드북의 컬러는 이보다는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다양한 네온 컬러를 실험해 볼 계획입니다. 오는 9월에 나올 2023 가을호는 프립(FRIP)과의 협업으로 제작했는데요. 프립의 아이덴티티 컬러를 적용할 예정입니다.

내지 디자인 (이미지 제공. 파르품삼각)
내지 디자인 (이미지 제공. 파르품삼각)

한편 <파르품삼각 가이드>에서 소개하는 공간은 어떤 기준으로 선별하는지 궁금합니다. 레스토랑과 카페가 대부분인 이유도요.

 

저희가 다루는 공간은 숙대입구부터 삼각지, 신용산, 한강대교까지의 라인인데요. 아직까지 삼각지 일대에는 서점, 편집숍, 패션 브랜드 쇼룸 공간이 많지 않아요. 레스토랑과 카페의 비중이 높은 편이죠. 가이드북을 제작한 지 2년차인데요. 처음에는 130개였던 공간이 190개, 230개, 330개 그리고 9월호에는 400개의 공간까지 늘어났어요. 전체의 60%는 저희가 실제로 먹어보고 경험해 본 공간들이고요. 유니크함이 돋보이는 공간 위주로 살펴봐요. 예컨대 오너가 인테리어에 특별히 힘을 줘 새로운 공간 경험을 추구하거나 메뉴에 새로운 룩을 시도하는 등의 공간들 말이죠. 제가 느낀 바로는 삼각지는 F&B 공간으로 생존하기 치열한 곳이에요. 이미 다른 곳에 성공한 케이스에서 파생된 공간이 많아서 노하우가 없다면 오래 버티기 어려워요.

로컬 퍼퓨머리, 로컬 디자이너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파르품삼각의 공간 ⓒheyPOP

파르품삼각 공간의 붉은색 벽돌도 인상적이에요. 공간 디자인은 직접 하신건가요?

 

라하프(LAHAF)의 한재성 대표에게 공간을 의뢰했어요. 공간 콘셉트는 이솝의 룩을 참고했고요. 물건을 팔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죠. (웃음) 상업 공간처럼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신비로운 공간 디자인을 위해 외장재를 주로 활용했습니다. 공간에 적용한 색상은 파르품삼각의 아이덴티티 컬러인 주황색에 맞췄어요. 가구도 성수동에 있는 토우드에서 빨강으로 맞춤 제작했고요. 최근에는 타깃 연령층을 낮추면서 공간 디자인 리뉴얼도 고민 중이에요.

로컬 퍼퓨머리를 유지해 온 원동력과 비결도 궁금합니다.

 

관심이죠. 그리고 로컬 퍼퓨머리 뿐만 아니라 디자인 일도 마찬가지일텐데요. 개성이 있어야 해요. 모든 디자이너라면 B2C 비즈니스를 해보고 싶을텐데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나만의 아우라를 만들어야 해요.

그런 점에서 로컬 브랜드와 로컬 디자이너로서 지녀야 하는 태도나 자세가 있다면요?

 

지역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 저는 이게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의 땅, 공기, 사람, 공간 모든 것들들을 사랑스러워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죠. 그리고 아무리 스스로가 로컬이라고 말해도 누군가 동의해 주지 않는다면 스파크가 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지역에서 함께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삼각지를 키워드로 표현하자면요?

 

잊혔던 곳. 서울역과 용산역이 있고, KTX로 전국 어디든 갈 수 있는 곳. 그리고 대한민국의 압축된 근현대를 볼 수 있는 곳. 광화문과 경복궁 일대는 1500년부터 2023년까지를 보여주고, 강남 코엑스는 2023년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곳이라면, 이곳 삼각지는 1950년부터 2023년까지를 둘러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용산 공원이 운영되기 시작하면 삼각지-용산 일대의 모양이 보다 명징하게 잡히지 않을까 싶어요. 아직까지는 안갯 속을 걷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정훈 기자

자료 제공 파르품삼각

프로젝트
<파르품삼각 가이드>
이정훈
독일 베를린에서 20대를 보냈다. 낯선 것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며 쉽게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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