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16

카텔란의 뒤를 잇는 리움미술관의 새 전시

한국 대표 동시대미술 작가 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WE〉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리움미술관이 새로운 전시를 준비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동시대미술 작가인 김범의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반전과 위트, 사유의 묘미가 가득한 전시다.
'볼거리', 2010, 단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1분 7초.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김범. 촬영 이의록, 최요한.

김범은 덤덤한 유머를 구사하는 작가다. 돌멩이에 시를 가르치거나 임신한 망치를 만들고, 철조망으로 만든 목줄 끝에 플러그를 연결해 콘센트에 꽂거나 비명을 지르며 캔버스에 붓질한다.

전시 제목인 <바위가 되는 법>은 그가 쓴 <변신술>에 나오는 글의 제목에서 작가가 고른 것이다. ‘바위가 되는 법’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4. 바위가 되는 법

한 장소를 정하되 가능하면 다른 바위가 많은 곳에 자리 잡으면 도움이 된다.

앉거나 눕는 등 몸을 낮추어 하나의 형태를 정하되, 주변 환경과 어울릴 수 있는 자세를 취한다.

움직이지 않고 숨소리를 죽인다.

모든 계절과 기후의 변화를 무시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만일 폭우 등의 물리적인 힘이 가해져 그에 의해 자리가 움직여지거나 아래로 구르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개의치 않고 본래의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다.

땅에 닿는 부분에 이끼가 끼거나, 벌레들이 집을 짓게 되면 다치지 말고 보존한다.

김범, ‘바위가 되는 법’ <변신술>(2007)
전시 전경.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김범. 촬영 이의록, 최요한.

소위 ‘코끼리가 냉장고에 들어가는 법’ 같은 식의 위트와 접근은 그의 작업 전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물이나 일상적으로 겪는 상황을 엉뚱하게 뒤집는다. <변신술>의 변신 대상이 나무나 문, 냇물, 사다리, 에어컨이 되는 법을 알려주는 것도 같은 연유에서다.

1963년생인 김범은 한국 동시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작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동 대학원, 미국 뉴욕의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광주비엔날레와 이스탄불비엔날레, 베니스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제12회 샤르쟈비엔날레 등에 초대받았다. 1995년에는 석남미술상, 2001년에는 에르메스 미술상을 받았다. 그는 한국현대미술을 소개하는 다양한 자리에 대표 작가로 참가했지만 2010년 아트선재센터에서의 개인전이 마지막 국내 전시일 정도로 전시도 작품도 모두 드문, 과작(寡作)인 작가다. 이런 김범이 동시대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이유가 있다.

'임신한 망치', 1995, 목재, 철, 5 × 27 × 7cm. 개인 소장. ⓒ김범

1990년대는 격변의 시기였다. 민주화 운동이 끝나면서 정치와 사회가 급변했고, 경제 성장과 외환위기 등 다양한 사회적 명암이 교차했다. 반면 영화나 음악, 만화 등 대중문화의 부흥기이기도 했다.

한국 현대미술도 마찬가지였다. 시대 변환과 맞물려 전 세계적 변화 상황과 이와 연관된 한국의 사회 환경이 한국 현대미술에 그대로 흡수됐다. 기존 관습과 논리에서 탈피한 세대가 등장했고,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혼재하던 상황까지 흡수해 다양한 형태의 작업이 나타났다.

그 상황에서 김범은 우리가 흔히 보는 사물이나 우리가 쉽게 접하는 상황, 그 사물과 상황을 인식하는 ‘보는 법’을 새롭게 탐색했다. 항상 당연하게 인식하던 사물과 상황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거나 뒤집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통해 실체와 예술을 탐구한 것이다. 회화나 드로잉 뿐만 아니라 조각과 비디오, 출판물, 설치 등 다양한 매체 작업으로 지각과 인지의 반전을 드러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2024년 5월 26일까지 여는 소장품전 <백 투 더 퓨처>에서도 김범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까닭이다. <백 투 더 퓨처>는 한국 현대미술 동시대성의 맥락이 형성된 1990년대를 중심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까지의 주요 작가의 작품을 모은 전시다. 이 전시에는 새벽의 청계 고가도로 달리는 택시의 전면 유리창과 백미러, 사이드미러를 통해 보이는 같지만 다른 풍경이 하나의 화면에 뒤섞인, 김범의 ‘3개의 세계(에셔에 의한, 청계고가도로 1/13/97 5:00-5:20 a.m.)’도 선보인다.

'폭군을 위한 안전가옥 설계안(조감도)'와 '폭군을 위한 안전가옥 설계안(청사진)', 2009, 종이에 연필, 90.5 x 60cm 청사진, 98 x 68cm. 매일홀딩스 소장. ⓒ김범

리움미술관의 <바위가 되는 법>은 이런 김범이 탐구해온 ‘보는 법’을 망라한 전시다. 국내외 미술관과 갤러리, 개인 컬렉터의 도움을 받아 1990년대부터 2016년까지 만든 작업 중 70여 점을 선별했다.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면 ‘동물의 왕국’을 편집한 대형 영상이 틀어져 있다. 영양이 치타를 쫓는 장면이다. 영양이 치타를? 틀린 설명이 아니다. 정말 영양이 치타를 쫓는다. 김범은 편집을 통해 약육강식과 먹이사슬을 거스르는 인과 원칙을 설정했다.

'두려움 없는 두려움', 1991, 종이에 잉크, 연필, 가변 크기.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김범. 촬영 이의록, 최요한.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전통적인 작품이 아니라 캔버스 자체가 작품이 되는 연작도 있다. 캔버스를 오리거나 구멍을 내고, 실을 꿰거나 말아서 캔버스가 가진 물성과 인식을 뒤집는 작업이다. 여기에 텍스트를 씀으로써 1970년대 개념미술과는 또 다른 형태의 작업을 고민한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미술사적으로 국한하지 않더라도 개인이 가진 일상적인 인식을 도려내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상당히 강하게 전달된다.

소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관점에서 보이는 장면을 그린 ‘무제’나 산의 능선처럼 보이지만 열쇠의 골을 확대한 ‘현관 열쇠’, 사나운 개가 벽을 뚫고 달아난 흔적 같은 ‘두려움 없는 두려움’, 난폭한 사람의 집에 초대되어 벌어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하나의 가정’ 등도 보는 방법에 대한 작업이다.

이렇게 보는 방법은 김범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구 하나를 꿰어간다.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What you see is not what you see.

 

 

캔버스 위에 검은 미로 퍼즐이 그려져 있다. 무심코 입구와 출구를 찾아 미로를 헤맨다. 머릿속에 궤적을 그리며 한참을 시도하면 그 끝에 다다른다. 묘한 희열이 느껴지지만 캔버스 옆의 작품 제목을 보면서 아차, 싶다. 제목은 ‘무제(친숙한 고통 #2)’이다.

그러자 점차 커지는 캔버스와 더 복잡해지는 미로가 눈에 들어온다. 가장 큰 작업은 491×348.5cm에 이르는 거대한 미로다. 아찔하다. 학습된 일상적 습관과 행동, 어느 캔버스에도 입구와 출구가 명시되어 있지 않음에도 자연스레 미로를 찾는 눈길이 우리의 삶과 겹쳐진다.

ⓒheyPOP

그에게 중요한 연작이 하나 더 있다. ‘교육된 사물들’이다. 이 연작에는 항상 사물과 그 사물에게 교육하는 영상이 함께 설치되어 있다.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은 제목처럼 돌을 앞에 두고 정지용의 시와 그가 활동한 1920년대와 1930년대 한국시의 변화 등을 교육한다. 12시간 11분 가량의 러닝타임에서 추측하건대 그야말로 고강도의 주입식 교육이다. 그 외에도 배에게 바다가 없다고 가르치거나 돌에게 새가 되라고 강요하고, 도구에 불과하다고 사물에게 교육한다.

'노란 비명 그리기', 201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1분 6초. ⓒ김범.

그 외에도 다양한 연작이 있지만 화룡정점은 ‘노란 비명 그리기’다. 작가는 괴성이나 비명을 지르며 노란색 획을 하나씩 긋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심리적 고통의 비명으로 좀 더 다양한 색의 변화를 줘볼까 해요. 우선 칠해지지 않은 부분에 견디기 힘들고 혼란스러울 때 지르는 비명을 넣으려고 합니다. 큰 붓으로 오렌지색과 울트라 마린을 섞어 부드러운 회갈색을 만들고 여기에 퍼머넌트 옐로를 조금 섞습니다. 어때요 혼란스러운 색이 되죠? 이렇게 혼란스러운 색으로 길게 터치를 해줍니다. (붓칠을 하며 소리를 지른다) 으아아아악!

〈”노란 비명” 그리기〉 중 일부, 201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1분 6초

캔버스의 다양한 노랑색 만큼이나 여러 유형의 비명을 지르며 획을 긋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희비극이 교차하는 난감한 상황을 겪게 된다. 결국 우리의 삶도 저렇게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고통스러울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작가의 표정과 소리는 분명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가장 최근 작업인 ‘폭군을 위한 인테리어 소품’ 프로젝트는 불의한 권력자를 위한 인테리어 및 생활 소품을 제작, 판매하고 수익금을 기부하는 실제적인 순환을 만들어낸다. 폭군을 위해 제작된 소품이 소비되고 사회에 기여하는 이상한 구조다. 이번 전시에서는 벽지 설치와 함께 리움 스토어와 협력해 제작한 다양한 아이템이 판매된다.

ⓒheyPOP

전시를 둘러보면 진지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지만 누구보다 진지하게 다양한 고민과 고찰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작가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참고로 김범 작가는 광화문 이순신 동상으로 유명한 故 김세중 작가와 1960년대 대표 여류 시인인 김남조 작가의 삼남이다. 본인의 이러한 이력이 노출되는 걸 꺼려 하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어온 다양한 작업 형태와 사유를 이해할 수 있는 작은 단초가 되기도 한다.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2010, 돌, 목재 탁자, 12인치 평면 모니터에 단채널 비디오(12시간 11분), 2010, 가변 크기. 매일홀딩스 소장,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김범. 촬영 이의록, 최요한.

이외에도 전시와 연계한 여러 프로그램이 예정되어 있다. 김범 작가와 전시를 기획한 김성원(리움미술관 부관장), 주은지(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SFMOMA 큐레이터)가 참가하는 <토크 프로그램>과 오은 시인이 김범의 아티스트북 작품을 문학적 관점으로 읽어보는 <강연 프로그램>, 김범의 작품 세계를 다시 보는 비평 및 연구프로그램 <크리틱 서클>을 진행한다. 연구서 형식의 출판물이나 청소년을 위한 전시 감상 워크북도 준비되어 있거나 출간할 예정이다.

안상호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리움미술관

프로젝트
<바위가 되는 법>
장소
리움미술관
주소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시간
10:00 - 18:00
참여작가
김범
헤이팝
공간 큐레이션 플랫폼, 헤이팝은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와 브랜드에 주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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