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with 소소문구
김청 브랜드 매니저, 백온유 디자이너, 유지현 디자이너, 한보람 디자이너, 조현희 마케터
시를 모티프로 만든 ‘시 드로잉 북 시리즈’는 언제부터 출시했나요?
유지현 2014년, 한용운 시인의 <산촌의 여름 저녁>에서 영감을 얻으면서 시작했어요. 2017년에는 김영랑 시인의 <꿈 밭에 봄마음>을, 2022년 봄에는 장정심 시인의 <꽃이 되면>에서 영감을 받아 출시했고요. 시 시리즈는 소소문구의 스테디셀러이자, 시그니처 제품이에요. 앞으로 계속 출시할 생각이에요.
시의 한 구절이 제품이 된다는 점이 독특하더라고요.
유지현 소소문구의 문구에는 ‘기록한다’라는 뚜렷한 기능이 있으므로 예술과 문학을 떠올렸고, 그중에서도 시에서 디자인 모티프를 찾았어요. 보통 시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문자로 표현된 예술이죠. 그래서 디자인으로 풀어내는데 자유도도 높았어요. 시 시리즈는 활용도가 높다는 장점이 있지만, 고객 리뷰를 보면 책등에 적힌 낱말이 전하는 울림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요. 책등에는 숲, 꿈, 터, 밤과 같은 낱말이 적혀 있는데요. 시 시리즈를 통해 짧지만, 힘이 있는 우리말을 꾸준히 선보이고 싶어서 시를 자주 찾아봐요.
시리즈의 세 번째 주인공이자, 전시 명에도 영향을 준 시 <꽃이 되면>의 어떤 부분에 끌렸나요?
유지현 시 시리즈의 전(前) 주인공이었던 두 편의 시(<신촌의 여름 저녁>, <꿈 밭에 봄마음>)와 장정심 시인의 <꽃이 되면>은 자연을 주제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꽃이 되면>에는 자기 주체성이 담겨 있어요. 저는 ‘나는 꽃이 될 거고, 남이 알건 말건 알아서 피어날 거다.’라는 시인의 메시지를 ‘나는 무엇이든 될 것이고, 남이 알든 말든 내 본분에 맞게 잘 살 것이다.’라고 해석했어요. 이처럼 자기 주체성이 전해지는 마지막 한 줄이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시 드로잉북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번 드로잉북을 기획할 때, 특별히 고려한 부분이 있었나요?
유지현 사용자가 망설임 없이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바라며 손바닥만 한 사이즈(스몰)부터 백팩을 채울 수 있는 큰 사이즈(라지)까지 출시했어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사이즈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드로잉 북을 가지고 다니죠. 그런 면에서 시 드로잉북은 두께가 종이를 받쳐 주기 때문에 서서 그릴 수도 있어요. 그렇기에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는 자기만의 생각과 마음을 드로잉북에 쏟았으면 해요. 스몰에서 시작하여 미디움, 라지까지 표현의 자유로움이 점점 커진다면 제작자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아요.
시에서 4개의 낱말을 선정했죠. 이는 각 드로잉북의 컨셉이 되었어요.
유지현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께서 “시가 어렵다면 한 글자씩 읽으며 장면을 상상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저에게 시는 하나의 장면이 되었어요. 이번 시리즈의 단어 – 꽃, 잎, 물, 터는 <꽃이 되면>을 읽으며 상상했던 장면에서 등장한 재료들이었어요. 씨앗이 뿌리내리는 고동색의 ‘터’, 자라날 양분이 흐르는 쪽빛 ‘물’, 싱그럽게 돋아나는 연두색 ‘잎’, 그 끝에 고즈넉이 피어날 분홍색 ‘꽃’송이가 그것이었죠.
각 단어와 작가를 일대일 매칭하여 팝업 전시 <남이야 알건말건>을 열었어요.
김청 <꽃이 되면>에서 추출한 네 가지 낱말(꽃, 잎, 물, 터)이 더욱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지길 바랐어요. 종이와 제본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드로잉북을 마주할 때 무언가가 자라나는 시간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면서 전시를 함께할 작가들이 떠올랐어요. 이 작가들이라면 우리가 추출한 낱말들을 뿌리내려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손에 잡히지 않는 찰나를 구조적으로 포착하는 오혜진 작가에게는 ‘꽃’을, 생장하는 식물의 윤곽을 푸르게 드러내는 요리 작가에게는 ‘잎’을, 상념이 흘러가는 자취를 이어내는 윤미원 작가에게는 ‘물’을, 자신만의 규칙으로 공백을 채우는 이하여백 작가에게는 ‘터’를 맡겼습니다.
5층에는 작가들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린 드로잉북을 전시했더라고요.
김청 각 작가에게 낱말과 라지 사이즈 드로잉북을 한 권 주면서 3주라는 기간 동안 자유롭게 활용해달라 부탁했습니다. 그림, 낙서, 심지어 작은 끄적임까지 모두 좋았어요. 작가들이 주어진 대지를 자유롭게 채우기를 바랐거든요. 이후, 돌아온 드로잉북을 보면서 그 작가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채워져 있는 아름다운 노트들을 우리만 보지 말고 전시를 통해 공유하기로 했어요.
전시 서문에서 ‘남이야 알건 말건’이라는 시의 구절에서 연습의 태도를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조현희 저희 모두 ‘남이야 알건 말건 향기만이 주리라’라는 짧은 구절에 사로잡혔어요. 깊은 산 속에 홀로 피었어도 향기를 피우겠다는 시인의 태도는 우리 모두를 돌아보게 했죠. 과연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지 또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때는 언제였는지 등을 생각해봤어요.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끊임없는 고민을 거쳐 정체된 결과물을 만드는 것에 익숙해요, 하지만 연습할 때만큼은 자유롭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기에 마음껏 시도하고, 틀리고, 망치고, 다시 시도해요. 타인의 평가에도 개의치 않아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순간과 태도가 있다는 걸 전하고 싶었어요.
드로잉북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포스터 이미지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순간을 표현한 걸까요?
한보람 전시 부제 ‘표현의 세계를 펼치는 연습장’에는 드로잉북을 펼치면 나의 표현의 세계도 함께 펼쳐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래서 이번 팝업 전시의 목적은 드로잉 북을 먼저 사용해 본 작가들의 표현 방법을 살펴보면서 나의 표현 세계도 확인해보는 자유로운 공간이 되는 거였어요. 이를 전달하기 위해 드로잉북을 인덱스가 붙어있고 조금은 구깃거리지만 모든 페이지가 활짝 열려 있도록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남이야 알건말건’이라는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제목과 함께 펼쳐진 드로잉북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궁금해하는 호기심을 갖고 전시장을 방문하길 바랐어요.
이번 팝업 전시에서는 인스타그램의 AR 필터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요.
한보람 종이라는 평면 매체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이자 관람객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는 도구로 인스타그램의 AR 필터를 활용했어요. 무빙 포스터 필터를 통해 2D 이미지에 입체적인 움직임을 더했고, 도슨트 필터로 드로잉북을 먼저 사용해 본 작가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지면에서 풀어내지 못한 부분까지 확장할 수 있었어요.
필터를 적용하면 작가의 설명을 들을 수 있더라고요. 신기했어요.
한보람 도슨트 필터는 메인 공간인 카페꼼마 5층에서 작가들이 사용한 드로잉북 원본을 한 장씩 넘겨보면서 작업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게 작업했어요. 이런 경험들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유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다채롭고 풍성한 이야기로 자라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이번 전시에서는 직접 연습장에 그림이나 글을 써보거나, 작가의 표현에서 뽑아낸 문구 스티커를 붙이는 등 관객과 소통하는 장치가 많아요. 이런 경험을 통해 관객이 무엇을 느꼈으면 하나요?
한보람 각 개인은 다양한 표현의 세계를 지니고 있지만, 어디선가 본 멋진 이미지처럼 완성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그들이 연습에 대한 힌트를 얻거나, 몇 가지 작은 시도를 해볼 수 있도록 전시를 구성했어요. 전시된 작가의 연습장을 보면 손이 가는 대로 그린 페이지도 있고, 잘못 그은 선도 발견할 수 있어요. 이렇게 서로 다른 연습장을 보면서 자신의 연습장을 떠올려보고, 전시장 여기저기에 놓인 연습장에 뭔가를 끄적거리며 나만의 연습을 발견할 작은 기회들을 만나길 바라요.
1층에서는 소소문구 제품과 함께 파이롯트의 제품도 판매하고 있죠?
김청 한국 파이롯트와 함께 팝업을 진행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예요. 작년 여름, 홍대 무신사테라스에서 열린 ‘나만의 한 줄을 캐는 옥상책밭’을 준비하던 중에 한국 파이롯트에게 협업을 제안받으면서 인연이 닿았어요. 문구를 좀 쓴다는 사람에게 파이롯트의 ‘주스업’은 정말 잘 써지는 펜으로 알려져 있거든요. 파이롯트와 좋은 인연으로 함께 할 수 있어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시 기획부터 지금까지, 힘들었거나 까다로웠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조현희 전시 제목을 정할 때 가장 치열하게 고민해요. 전시를 통해 소소문구가 전하고 싶은 가치를 딱 한 마디로 표현해야 하니까요. 사실, 이번 전시 제목 <남이야 알건말건: 표현의 세계를 펼치는 연습장>도 전시 직전까지 엎고 엎어 정해졌어요. 저희는 글자 하나, 단어 하나까지 이게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전하는지 물음표를 던지거든요. 어떤 사람은 손에 잡히지도 않는 텍스트에 왜 이렇게 시간을 쏟는지 의아할 수도 있어요. 소소문구의 슬로건 ‘쓰는 사람을 위한 문구를 만듭니다.’에서 알 수 있듯이, 브랜드의 존재 이유가 온전히 쓰는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 문구로 어떻게 쓰는 사람을 위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만드는 문구가 쓰는 사람에게 어떤 효용을 줄 수 있을까?’ 등 가치적인 부분을 고민하는데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하고요. 제품 판매가 아닌 제품 경험이 저희의 최종 목표이기에 어려워도 꾸준히 전시를 기획하고 있어요.
소소문구에게 연습장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백온유 소소문구 구성원 모두 자기만의 연습장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회의 때, 번뜩 생각한 아이디어를 적은 기록부터 치열하게 머리를 맞대는 과정까지. 거칠지만 온전히 주의를 기울인 순간이 고스란히 남겨진다고 할까요. 이렇게 소소문구의 모든 일은 구성원이 모여 열중한 순간에서 탄생했어요. 소소문구에게 연습장은 ‘표현을 위한 생각의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소소문구의 PICK!
나만의 세계를 표현할 때 필요한 도구
노트 & 연필
즐겨 사용하는 노트를 여러 권 쟁여 두면 마치 곳간에 쌀 포대를 넉넉하게 넣은 기분이 들어요. 어제 쓴 페이지를 넘기고, 오늘 쓸 페이지에 날짜를 쓰면서 하루를 시작하는데요. 나무 살만 살살 발라 놓은 연필을 손에 쥐고, 뭉뚝하게 단상들을 적다 보면 어느새 실마리가 잡혀요.
내 방 책상
바깥 세계의 물결에 휩쓸리다 보면 문득 닻을 내리고 싶어져요. 그럴 땐 책상 앞에 앉아서 나만의 세계로 입장해요. 쓰다 만 노트, 듬성듬성 놓인 좋아하는 물건, 읽고 싶어서 꽂아 놓은 책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것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해요. 그래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책상 위에서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시간을 가끔 가져요.
책가방
노트, 연필, 노트북, 아이패드 등 표현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가득 넣을 수 있고, 재미있는 표현이 담긴 책도 넣을 수 있는 책가방이 가장 필요해요. 가볍게 산책하러 나갈 때 말고는 웬만하면 책가방을 들고 다니려 해요.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요.
지우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절 도와주지만, 제일 많이 도움을 받는 건 지우개예요. 그림을 그릴 때, 메모할 때, 실수로 잘못 쓴 부분을 지우면서 끝내 제 생각에 도달할 수 있게 도와줘요. 약간 남는 흔적이 지저분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뭘 수정했는지 상기시켜주는 게 도움이 될 때가 있어요.
책
책은 ‘나도 저렇게 표현하고 싶게’ 만들어요. 나만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어도 해야 할 일이 우선이 되면서 바빠지면 표현 욕구 자체를 잊어버릴 때도 있죠. 그럴 때, 책을 읽으면 표현 욕구가 다시 솟아나요. 작가만의 세계가 꾹꾹 담긴, 작은 책 안에 들어있는 넓은 세계를 읽으면 나만의 이야기를 나만의 방식으로 남겨보고 싶은 욕망이 솟아올라 자기 전, 꼭 한두 문장이라도 쓰게 돼요.
글 허영은 객원 필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소소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