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후밀은 성수동에 있다. LCDC와 플라츠2 인근이다. 이 카페를 스쳐 지나면 아직 공사 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니다. 엄연히 정식 오픈 후 영업 중인 곳이다. 공장이 즐비하고, 때문에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를 흔히 볼 수 있는 위치적 특성을 가진 곳이 성수동이라지만 유리창도 문도 없는 곳이라니 너무 극단적인 게 아닐까, 라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보후밀이 있는 뚝섬로17길 29 건물은 과거 ‘컴퓨터 클리닝 호텔사’ 세탁소와 ‘휴대폰마트’라는 매장이 있던 자리다. 언제 문을 열었는지 가늠이 힘들 정도로 낡은 두 매장이 나간 뒤 간판과 내부 구조물은 모두 철거된 후 몇 년 동안 비어 있던 곳에 보후밀이 들어섰다. 아주 약간의 보수를 거쳤지만 낡은 건물의 역사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건물에 대한 최소한의 간섭과 마감, 리사이클과 업사이클을 통한 인테리어와 운영 방식 등 보후밀의 운영자들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보후밀의 운영자는 김기혜 디자이너와 정순구 작가다. 김기혜는 서울과 제주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정순구는 나무를 소재로 한 가구를 디자인하는 공예작가다.
Interview with 보후밀
김기혜, 정순구
—보후밀을 연 계기가 있을까요.
정순구(이하 정). 우리가 총 4명입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이들 4명이 모여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저와 김기혜 씨, P와 K가 있죠. 일단 모두 과잉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고 환경에 관심도 있어서 시작하게 됐죠. 모임 이름을 ‘둘이 한 프로젝트’, ‘세상에 뿔 난 사람들’ 이런 이름을 지으려다 포기했어요. 대신 ‘보후밀’이라는 카페 이름은 다들 염두에 두고 있었죠.
—P와 다른 K는 누군가요.
정. 나중에 알게 되겠죠. 굳이 많은 걸 다 알릴 필요는 없잖아요.
—보후밀이라는 이름은 왜 다들 마음속에 두고 있었을까요?
정. 카페 이름은 ‘보후밀 흐라발’이라는 체코 작가의 이름에서 따왔어요. 저는 안 읽었어요. 멤버들이 보후밀 흐라발이 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책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가 이번에 튀어나온 거예요.
김기혜(이하 김). 보후밀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에 공간이랑 연관된 내용이 있어요. 주인공인 한탸는 폐지 압축공이거든요. 한탸의 삶이 책 한 권에 다 담겨 있어요. 35년 동안 폐지를 압축하면서 살았던 그에게 폐지란 ‘풍요의 뿔’이었어요. 컴컴한 지하에서 일하는데 깔때기가 달린 천정에서 폐지가 계속 쏟아지죠. 종이가 계속 버려져야 일을 할 수 있고, 일상을 이어갈 수 있는 상황인 거죠. 끝까지 읽으면 ‘내가 여태 해온 일이 의미가 있었나’라는 회의감도 들고, 과도한 산업화로 인한 주인공의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져요. 소설 속의 내용이지만 현실도 마찬가지예요. 무의미하게 버려지는 것들, 우리의 직업, 삶의 방향 등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했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 풍요의 뿔은 우리의 키워드이기도 해요. 풍요에 뿔에서 나온 게 커피이기도 하죠. 한탸처럼 우리도 노동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우리는 커피를 비싸게 마시는 현실이 아이러니죠.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중략)… 내 손 밑에서, 내 압축기 안에서 희귀한 책들이 죽어가지만 그 흐름을 막을 길이 없다. 나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문학동네(2016)
—환경에 대해 고민을 시작한 이유가 있을까요.
김. 저는 제주도에서 잠깐 살았어요. 제주의 지인들이 환경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접했죠. 제주는 환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지역이에요. 분리수거부터 시작해서 환경 관련 프로젝트가 많아요.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관심이 없었는데 환경에 대한 여러 이슈를 접하면서 점점 관심도 생겼고 심각성도 알게 됐죠.
—환경을 염두에 둔 공간은 많지만 지속에 대한 슬로건만 내걸었지 실천에 대한 진정성을 가진 공간은 흔치 않아요. 반면 보후밀의 공간은 출발점이 어디서부터인지 확연하게 보여요.
정. 우리는 제로 웨이스트를 주장하지는 않아요. 진짜 환경을 위한다면 아무것도 하면 안 되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환경을 고민하는 사람’ 정도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리고 보후밀은 이 상태로 완벽한 공간은 아니에요. 조금씩 환경에 적응해가는 중이죠.
—처음에 보후밀을 보고 놀랐어요. 공사 중이라 생각했는데 영업 중이었다는 SNS 글이 와닿더라고요.
김. 고객들 반응이 되게 재미있어요. 우리는 익숙한데 공간을 처음 보는 이들은 충격적이라는 표정을 주로 지어요. 놀라고 신기해서 들어오는 손님도 있고요. 또 뚫려 있으니까 지나다니는 사람과 눈을 자주 마주쳐요. 자주 다니시는 분들 얼굴도 빨리 외워져요.
—경계 없이 개방된 공간으로 인해 생기는 단점을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하네요.
정. 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어요. 사람들은 열려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는 사실 닫히기도 해요. 열고 퇴근할 수는 없잖아요. 실제로 많이 물어봐요. 한여름이나 겨울에는 어떻게 하냐고요. 우리도 대비하고 있죠. 또 공간이 열려 있는 데다 성수동이라는 입지 때문에 공사장의 소음이 잘 들리죠. 동네 주민을 고려해서 음악도 아주 작게 틀어요. 환경이 변하는 과정에 적응해야 하잖아요.
—카페 안의 테이블이나 벤치, 잔들은 직접 만든 건가요. 특히 테이블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한탸가 떠오르네요.
정. 병을 재활용한 유리컵은 P가 하는 작업이에요. 병이 깨지지 않도록 잘라야 하니까 상당히 번거로워요. 레이블도 떼야 하고, 날카로운 부분과 표면을 샌딩하고, 코팅 후 가마에 구워서 소독도 해야 하죠. P가 병 아랫부분으로 잔을 만들면 버려지는 윗부분은 K가 조명으로 만들기도 해요.
테이블은 확실히 상징적이죠. 성수동에 흔히 보이는 버려진 팔레트를 활용해서 제작했어요. 압축한 종이도 인근 인쇄소에서 버려지는 폐지를 사용했어요. 종이와 팔레트는 서로 연결될 수 없으니까 철제 구조를 이용해서 결합했죠. 서로 다른 소재를 겹친 거예요. 벽도 마찬가지예요. 기존 벽 마감에 새로운 페인트를 살짝 겹쳤어요. 벤치형 의자는 직접 제작하려다 의뢰했어요. 공간을 꾸밀 때 최대한이든 최소한이든 할 수 있지만 여기는 최소한 들어간 프로젝트예요. 최소한의 뉘앙스가 건축과 결합한 거죠.
—카페는 여러 형태로 소통이 가능한 공간이잖아요. 보후밀의 공간도 그런 의도가 보여요.
정. 우리는 커피와 공간으로 잡아놨어요. 간판에도 ‘보후밀 커피 – 공간’이라고 썼어요. 이 공간에 사람이 모이면 소통하게 되고 생각이 서로 겹치고 뭔가 나누잖아요. 커피가 매개체가 되고 공간이 매개체가 되기도 하죠. 결국 공간이 있으니까 사람이 모여서 무엇인가 함께 해볼 수 있는 접점이 만들어지죠. 병으로 만든 유리잔도 공간이 있으니까 쓰임이 있는 거예요. 환경도 그래요. 우리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거잖아요. 그 안에서 활동이 이뤄지죠. 보후밀이 성수동에 있으므로 팔레트를 주워서 만들 수도 있고, 인근 공장이나 공사장에서 나온 소재를 사용할 수 있어요.
—보후밀의 공간은 너무 극단적이에요.
정. 우리 삶의 방향성에 대한 문제죠. 공간이 문제일까요? 커피가 문제일까요? 사실 문제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전혀 문제가 없는 데 문제가 있다면 바라보는 지향점이 다른 거죠. 우리는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고 그냥 주변에 있는 것, 쓸 수 있는 것을 모아서 배열하고 조합한 것뿐이에요. 모든 재료가 날 것에서 시작하잖아요. 가공에, 가공에, 또 가공하면 에너지를 계속 투자한 집약체가 되잖아요. 여기는 그나마 그런 과정이 없어요. 주변에 버려진 물건을 잘 주워서 적당히 가공한 뒤 공간을 구성했죠. 우리는 그렇게 보전한 비용을 가지고 좋은 원두를 사용한 커피를 상당히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해요. 만약 다른 곳처럼 비싼 재료로 공간을 꾸미면 비용에, 비용에, 또 비용이 더해진 커피가 서비스되겠죠.
—텀블러를 가져오면 드립 커피 한 잔이 2,500원이라는 점은 매력적이네요.
정. 맛있는 커피를 서비스하는 게 우리 콘셉트예요. 보후밀의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고객이 텀블러를 챙겨오도록 하는 게 목표죠. 여기까지 수고스럽게 가져오는 고마움 때문에 가격을 많이 낮췄어요. 우리의 생각을 지지하고 환경을 고민하는 분들이잖아요. 그럼 우리와 동지죠. 공간은 누추할 수 있지만 그래도 재밌잖아요. 보후밀에 오기 위해 텀블러 챙기는 행동, 사전부터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것 자체가 현대미술의 형태거든요.
—작가와 관객의 상호작용처럼 카페 운영자와 고객 사이의 상호작용이군요.
정. 소통하지 않으면 환경은 사람의 편리에 맞춰 변해요. 우리는 일회용 캐리어도 없어요. 포장을 위해 찢어진 종이상자를 가지고 와서 주문하는 분도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찢어진 부분만 테이프로 붙여서 커피를 담아 주죠. 동네 주민들은 텀블러를 가져오면 할인해 준다는 말에 집에서 와인잔이나 공병을 가져와서 주문하기도 해요. 편의를 대신하는 창의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거죠. 환경에는 리사이클링이라는 순환의 의미가 있잖아요. 사람의 마음이 오가는 것과 이 공간 자체가 순환하는 것도 리사이클링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공간은 거주자와 소유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지만 이곳이 상업 공간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잖아요. 어떻게 극복할 생각인가요.
정. 그건 수익을 어떻게 바라보냐에 따라 달라져요. 가치 또한 수익일 수 있어요. 가치를 환산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가 생기면 그것도 수익이죠.
—대관이 가능한 공간이 많더라고요.
정. 보후밀 뒤쪽에 작은 단층 건물이 있고, 보후밀 2층에도 유휴 공간이 있어요. 매장 안에도 있죠. 그곳에서 대관이나 팝업을 할 예정이에요. 보후밀이 알려지지 않아서 아직은 우리 생각과 부합하는 분을 만나기 힘들어요. 시간이 필요하죠. 대관이라는 형태 역시 수익처럼 다양하게 교환될 수 있어요. 비용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물물 교환이 될 수도 있고, 우리와 결이 맞고 소통되는 사람이라면 같이 무언가를 할 수도 있죠.
—열린 공간이라 장마나 폭염, 한파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요.
정. 우리도 겨울을 준비하고 있어요. 문이 어떤 방식으로든 달리긴 할 거예요. 어떻게 할지는 정해지지 않았어요. 영업을 안 할 수도 있죠. 참고로 조만간 다른 프로젝트를 할 수도 있어요. 다회용 컵 공유 시스템인 ‘보틀클럽’의 성수동 거점으로 논의하고 있어요. 한 가지가 더 있는데 공공을 위한 프로젝트예요. 성수동 골목에 의자를 만들어서 놔두려고 해요. 주말에 인파가 엄청난데 앉을 데가 없어요. 도떼기시장이나 다름없어요. 뜻이 맞는 곳과 함께 주말에는 벤치를 골목 곳곳에 놔두는 거죠.
—보후밀의 목표가 있다면요.
김. 환경에 대한 고민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실천이잖아요. 입으로 내뱉고, 글로 쓰고, 밖으로 내보내야 실행하는 거죠. 진정성을 가지고 브랜드를 조금씩 키워서 우리가 고민한 메시지가 잘 전달되면 좋겠어요.
글 안상호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보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