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부가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인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의 독특한 이력에 있다. 공통점은 둘 다 처음부터 가구 디자인을 배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찰스 임스는 워싱턴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으나, 학교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진보적인 성향 때문에 2년만 다니고 그만두게 된다. 이후 개인 사무실을 열어 다양한 작업을 진행했고, 이런 그의 작품을 눈여겨 봤던 세계적인 건축가 에리엘 사리넨(Eliel Saarinen)은 그에게 자신이 교장으로 있는 크렌브룩 아카데미(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공부를 더 하길 권한다. 초반에는 장학금을 받으며 산업 디자인을 공부했던 그는 뛰어난 실력으로 얼마 있지 않아 학교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며, 산업디자인 학과장으로 역임하기도 했다. 짧은 시간 내에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 이 학교에서 그는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에리엘 사리넨의 아들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과는 절친이 되었으며 훗날 배우자가 되는 레이 카이저(Ray Kaiser)를 만나게 된다.
레이 카이저는 유명한 미국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에게 무용을 배웠으나, 그녀의 흥미는 단순히 무용에 머무르지 않았다. 패션, 연극, 예술뿐만 아니라 예술매체와 이와 관련된 사회집단 등, 예술 문화와 디자인 전반에 관심이 있었던 그녀는 결국 무용을 그만두었다. 이후 추상표현주의 화가이자 교육가로 미국과 독일 두 나라에서 명성을 알린 한스 호프만(Hans Hofmann)에게 그림을 배웠고, 미국 추상화 그룹(American Abstract Artists[AAA])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디자인과 예술을 탐구하길 원했고, 결국 크렌브룩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레이 카이저가 찰스 임스와 가까워지게 된 것은 공모전 덕분이었다.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서 주최한 홈 퍼니싱의 유기적 디자인(Organic Design in Home Furnishing) 공모전을 위해 찰스 임스와 에로 사리넨과 함께 힘을 모았고, 그 결과 합판을 휘어서 만든 다기능 시스템 가구를 탄생시키며 1등을 거머쥐게 되었다.
결혼 후 이들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본격적으로 사무실을 열고 획기적인 디자인을 탄생시키기 위해 노력을 쏟게 된다. 특히 공모전을 위해 연구했던 과정을 심화하며 합판을 성형해 만드는 기술은 가구의 모습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또한 이들은 기존의 가구 업체가 시도하지 않았던 강화 플라스틱, 유리 섬유, 철사, 알루미늄 등과 같은 혁신적인 소재를 사용했다. 이후 현재까지도 명품 디자인으로 인정받는 라운지 체어 앤 오토만, 몰디드 암체어, 사이드 체어, LCW 등과 같은 다양한 의자들을 설계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뿐 아니라 장난감, 광고, 패턴, 건축, 디자인 자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디자인 능력을 뽐냈다. 심지어 영화까지 제작했다니, 이들의 능력의 한계치는 과연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진다.
임스 체어 중에서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의자 중 하나가 최근 새로운 버전으로 탄생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의자는 1950년대부터 비트라와 허먼 밀러에서 몰디드 암체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임스 부부의 실험적인 정신을 널리 알린 가구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플라스틱, 파이버글라스 등의 소재의 상판이 4개의 다리가 있는 베이스와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이 의자는 대량 생산이 가능한 동시에 편안한 사용감을 선사해 시간의 흐름에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의자를 시작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한 의자 디자인들이 속속 선보였으니, 임스 부부가 얼마나 획기적인 설계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새롭게 만들어진 이 의자에는 느긋하게 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가 그려져 있다. 가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 이 귀중한 의자에 누가 그림을 그린 것일까?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임스 부부의 친한 친구로 유명한 사울 스타인버그(Saul Steinberg)다.
루마니아 출신 유대인인 그는 반유대인종법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예술가들과 함께 미국 모더니즘(American Modernism)을 이끌었으며, 뉴욕 아방가르드 그룹 등 선구적인 예술가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스스로를 ‘그리는 작가’라고 칭했던 그는 뉴요커 잡지의 삽화가로 수십 년간 일하며 삽화를 예술의 경지에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밖에도 독창적인 드로잉, 판화, 콜라주, 조각 작품을 남기며 호평을 받았다.
임스 부부가 파이버글라스 소재의 몰디드 암체어를 시장에 선보일 무렵, 스타인버그는 배우자 헤다 스턴(Hedda Sterne)과 함께 임스 부부의 사무실이 있는 로스앤젤레스에 머무르던 중이었다. 예술과 디자인을 사랑하는 두 부부는 금세 친구가 되었고, 함께 드로잉과 로스앤젤레스에 관한 영화를 구상하는 등 일과 놀이의 경계 없이 다양한 실험을 즐겼다. 심지어 스타인버그는 건축 대학을 다녔지만 대학 졸업장이 없는 찰스 임스를 위해 정교한 가짜 졸업장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이런 유쾌하고 다양한 실험이 바로 임스 부부의 로스앤젤레스와 베네치아 사무실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부부의 사무실에 머무는 동안 스타인버그는 사무실 가구, 바닥 및 벽 등 곳곳에 그의 그림을 남겼다. 그중 작가는 그 당시 신제품이었던 암체어에도 여성과 고양이를 그려내며 그만의 재치를 뽐냈다. 뚱한 표정이지만 편안히 앉아있는 누드의 여성의 모습과 더불어, 고양이들이 늘 그렇듯 집사의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고양이는 작가가 좋아하는 그림 주제였기 때문에 더욱 친근한 모습이다. 뉴요커 표지에 7번이나 고양이가 등장했을 만큼, 그는 고양이를 사랑했다. 의자에 앉아있는 누드 여성은 1951년 시립 아트 센터 개장식에서 처음 대중에게 선을 보였는데, 이를 본 미술 평론가들이 ‘저급하다’, ‘예술이 아니다’라며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임스 부부는 자신들의 사무실 곳곳에 멋대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에 대해 화를 내기 보다는 그의 장난스러운 그림에 같이 공감했으며, 이를 사진을 남기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이들의 유쾌한 협업은 그 당시 임스 부부와 스타인버그의 친분을 드러내는 존재로 가치가 높아졌다. 현재는 두 개의 의자만 남아있는데, 고양이가 있는 의자는 임스 인스티튜드가 소장하는 컬렉션의 일부로, 여성의 누드 그림이 있는 의자는 임스 인스티튜드가 비트라 디자인 박물관에 영구 대여 중이다.
이 의자는 그 자체로 많은 것을 시사한다. 3차원 공간에 2차원의 그림이 결합하는 동시에 현실과 허구가 만나며 상호 연결되는 모습은 마치 임스 부부와 스타인버그의 우정 그 자체를 드러내는 듯하다. 이렇게 우리는 세기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들과 예술가가 만나면 시간을 뛰어넘는 멋진 결과물이 탄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덕분에 이 의자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이들의 우정이 담긴 의자는 올해 6월 14일, 비트라와 허먼 밀러에서 한정판으로 판매될 예정이다. 임스 인스티튜드와 스타인버그 재단의 협업으로 완성된 이 파이버글라스 소재의 의자는 각 나라별로 500개 한정으로 판매된다고 한다. 허먼 밀러 측은 “어떤 친구가 당신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당신의 가구, 바닥, 벽 전체에 그림을 그렸나요?”라며 이 의자가 탄생하게 된 비화에 대해 궁금증을 자아냈으며, 비트라 측은 임스 부부와 스타인버그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해 사람들에게 의자가 가진 가치와 의미를 전달했다.
글 박민정 객원 필자
자료 출처 EAMESOFFICE, VI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