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의 시작과 함께 씨흐 트루동이 아주 특별한 협업을 발표했다. 바로 세계 최고의 차 마스터 중 한 명인 마스터 쳉(Tseng Yu Hui)과 함께 세 가지의 향을 개발한 것이다. 마스터 쳉은 오늘날 가장 인정받는 전 세계 10명뿐인 차 마스터 중 한 명이자 중국 밖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인물이면서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1995년 파리 5구 생-메다르 가(rue Saint-Médard)에 다실 ‘메종 데 트로와 테(Maison des Trois Thés)’를 열고 차 보관에 최적화된, 온도와 습도 조절이 되도록 특별히 설계된 차 저장고를 운영하고 있다. 파리 시내에 어떻게 이런 공간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과거로 시간 여행이 가능한 이 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차 저장고를 보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천 가지가 넘는 차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어떤 것은 한 포 당 가격이 백만 원, 천만 원을 호가하는데 와인과 비유해 설명하면 프랑스인들은 바로 이해를 하고 그 매력에 빠져든다고. 마스터 쳉이 해외에서 활동하는 덕분에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에서의 차에 대한 인식과 정보의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다. 피에르 갸르니에 등 유명 셰프들은 그녀를 통해 알게 된 동양 차의 향과 맛에 매료되어 차 페어링 식사 메뉴를 준비하는가 하면 초콜릿 전문가 쟈크 제낭과 파티시에 피에르 에르메는 그녀와 협업을 통해 디저트 메뉴를 개발하기도 했다.
다실을 운영하는 마스터 쳉과 향초 회사 씨흐 트루동은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일까? 둘의 만남은 차 애호가인 트루동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줄리앙 프뤼보스트(Julien Pruvost)에 의해 시작되었다. 3년 전 그가 ‘메종 데 트로와 테’를 방문했을 때 목재 가구가 채워진 공간 속 검은색 차 주전자가 내뿜는 증기, 그리고 귀중한 잎사귀에서 추출된 ‘차’라는 액체를 마시는 순간 예상치 못한 다른 세계로 순간 이동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 때 느낀 차의 맛을 ‘미묘한 영적 계시자’라고 표현했다. 한참 이 경험에 흠뻑 빠져 몇 주를 보낸 줄리앙은 수 세기 동안 지켜져 내려온 차가 가진 탁월함과 세련미가 발산하는 향을 초로 재현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마스터 쳉과 협업하여 5천 년 중국 차의 역사를 기념하는 3개의 향초 컬렉션이 탄생했다. 물의 정령(L’Esprit de l’Eau), 꽃잎이 흩날리는 하늘 아래(Sous un Ciel de Pétales), 지상으로(Terre à Terre)라는 이름이 붙여진 옥색, 분홍색, 흙색의 세 가지 향초는 패키지부터 새롭다. 진 왕조 (기원전 221-206년) 시대의 문자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메종 데 트로와 테’ 로고가 유리병에도 어울릴 수 있도록 트루동 역사상 처음으로 서예를 디자인에 도입했는데 마스터 쳉의 어머니가 연습한 글자 중 투명, 구름, 숲이라는 한자를 가져와 각각의 병에 사용했다. ‘물의 정령’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물의 움직임을 연상시키고, ‘꽃잎이 흩날리는 하늘 아래’는 플로럴 향의 가벼움이 주는 미묘함을, ‘지상으로’는 땅의 에너지를 상징하도록 동심원을 나타냈다고. 서예 기법의 엠블럼은 순금으로 제작되어 트루동 특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색이 칠해진 유리병 뒷면에는 한자, 프랑스어로 표기된 향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고, 병 내부에까지 금색 처리가 되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Maître Tseng x Trudon
물의 정령
L’Esprit de l’Eau
조향사: 베누아 라푸자(Benoist Lapouza)
아름다운 소재와 천연 성분, 순수한 향을 선호하는 베누아 라푸자가 신선한 물과 공기의 숨결을 담았다. 산 속 바위 위를 미끄러지듯 흐르는 맑은 물에 삼나무와 사이프러스의 우디 노트, 그리고 스파이시한 노트를 결합한 신비로운 물의 향이다.
꽃잎이 흩날리는 하늘 아래
Sous un Ciel de Pétales
조향사: 뱅상 리코(Vincent Ricord)
그라스(Grasse)에 기반을 둔 조향사 가문 출신의 뱅상 리코는 감정을 향으로 구체화해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히말라야 산지의 자스민 삼박(sambac)과 자스민 그란디플로룸 (grandiflorum)을 결합해 탄생한 신선한 베르가못 향이 지배하는 가운데 가벼운 나무의 향을 베이스 노트로 느낄 수 있다.
지상으로
Terre à Terre
조향사: 밀렌 알랑(Mylène Alran)
어린 시절을 보낸 자신의 집의 정원에서 향에 관한 영감을 받는 밀렌 알랑은 주로 자연에서 에센스를 추출해 캐릭터 있는 향수를 만든다. 이번에도 베티베르, 캐시미어 우드, 패출리의 신선함을 가진 우디 노트를 사용해 이끼가 낀 땅을 연상시키도록 했다.
무려 3년이나 걸린 이번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한 씨흐 트루동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줄리앙 프뤼보스트는 이번 협업에 대해 강한 애정을 보이며 이렇게 설명했다.
“
이번 협업으로 초를 통해 단순히 차의 향과 맛을 재현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개발한 향의 이야기를 통해 마스터 쳉이 경험하고
구현한 우주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씨흐 트루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줄리앙 프뤼보스트
”
처음 콜라보 제안을 들었을 때 한 번에 허락하지 않았던 마스터 쳉을 설득하고 향의 개발 과정마다 완벽주의자인 그녀의 수락을 거치느라 어렵게 완성된 이번 컬렉션은 결과물에서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차원의 깊이가 느껴진다. 아마도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트루동의 협업 중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프로젝트가 아닐까.
글 양윤정 객원 필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씨흐 트루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