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즈의 역사
프리즈는 1991년 창립한 영국의 현대미술 전문잡지 <프리즈(Frieze)>의 발행인 어맨다 샤프(Amanda Sharp), 매튜 슬로토버(Matthew Slotover)와 더불어 예술가 톰 기들리(Tom Gidley)가 창설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페어의 첫 시작은 2003년 런던에서 열린 프리즈 런던이었으며, 125개 갤러리가 참여하고 27,700여 명이 관람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이후 런던에서는 리전트 공원에서 해마다 10월에 프리즈 런던과 프리즈 마스터스가 진행된다. 이어 이들은 2012년 5월에는 프리즈 뉴욕, 2019년 2월에는 프리즈 로스앤젤레스, 2021년 10월에는 No.9 코크 스트리트(No.9 Cork Street)를 론칭했다. 2022년에는 프리즈 서울이 진행되면서 아시아권에도 영향력을 넓히려는 포부를 드러냈다.
세계 3대 아트페어
프리즈는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한 아트 바젤(Art Basel),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한 피악(FIAC)과 더불어 세계 3대 아트 페어로 꼽힌다. 1970년 대에 시작한 아트 바젤과 피악과 달리 프리즈는 꽤 늦게 문을 열었지만, 영국의 주요 갤러리가 활약하면서 단숨에 미술계에서 대세가 되었다. 이 페어에서는 고대 예술작품은 물론이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호크니, 마티스 등과 같은 거장들의 작품들과 더불어 실험적인 작품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덕분에 행사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을 ‘프리즈 위크(Frieze Week)‘라고 부르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현재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핫한’ 아트 페어로 인정받고 있는 중이다. 이와는 달리 피악은 작년에 수십 년 동안 개최 장소로 사용했던 그랑팔레(Grand Palais)를 아트 바젤 측에 뺏기면서 개최를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제 세계적인 아트 페어는 아트 바젤과 프리즈 두 곳으로 좁혀지면서 그 영향력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중이다.
LA에서 열린 올해 첫 프리즈
미술계를 넘어 전 사회적으로, 또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프리즈가 지난 2월 16일부터 19일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다시 진행되어 화제가 되었다. 문화예술 도시로 사랑받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인만큼 페어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이번 행사는 산타 모니카 공항에서 지금까지 진행된 규모 중 가장 크게 열렸다.
페어는 두 섹션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메인 섹션에서는 총 22개국 120여 개의 갤러리가 참여했으며 포커스 섹션에서는 최근 12년 내 설립된 갤러리들이 참여했다. 국내에서는 국제갤러리와 학고재갤러리가 참여하며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과 적극적인 소통의 길을 열었다.
프리즈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프리즈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작품을 선보이는 ‘뷰잉 룸(Viewing Room)’이 진행되었다. 2월 15일부터 20일까지 진행된 뷰잉 룸에서는 16개국 101개 갤러리가 참여했으며 해외여행을 떠나지 못했던 이들에게도 다채로운 작품 관람의 기회를 선사해 전 세계 사람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프리즈에서 주목받은 작가와 작품들을 보면 현재 국가들을 이루고 있는 이주의 역사, 식민주의의 유산, 그로 인해 생겨난 문화 등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작품들이 서서히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트페어가 주목한 작가 또한 이런 트렌드에 기반하고 있다.
반식민 역사와 영적 텍스트의 영향을 받아 작품에 검은색과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는 여성 인물을 등장시키는 한나 워드(Hana Ward), 에리트레아(Eritrea)에서 태어났지만 전쟁으로 인해 미국으로 난민으로 정착한 배경을 기반으로 하여 구상과 추상을 혼합한 비선형적인 형태의 꿈과 추억을 그리는 피크레 게브레예수스(Ficre Ghebreyesus), 북미 원주민의 경험을 형성하는 민족 간 교류 및 폭력적인 갈등을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는 다나 클랙스턴(Dana Claxton), 흑인의 역사와 문화를 기반으로 공동체의 기억을 회화 작품으로 선보이는 타-컴바 T. 아이켄(Ta-coumba T. Aiken) 등이 주목할 작가로 선정되었다. 그 밖에도 한국계 미국인으로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허한나(Hanna Hur)와 그녀가 한국의 조상에 영감을 받아 만든 설치 및 회화 작품도 주목을 받았다.
전 세계의 미술계 관련 소식을 전달하는 권위 있는 매체인 아트넷(Artnet) 또한 이 아트페어에서 주목해야 할 작가와 작품들을 선정했다. 선정 목록에는 지난해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거대한 규모의 개념 화가’ 제니퍼 바틀렛(Jennifer Bartlett), 24살의 나이로 현재 미술계를 뒤흔들고 있는 베로니카 페르난데스(Veronica Fernandez), 작품에 수수께끼 같은 인물을 등장시켜 철학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캐럴 던햄(Carroll Dunham), 네오 매너리즘 스타일로 미국 남부에서 살아가는 흑인의 모습을 활기찬 분위기로 담는 어니 반스(Ernie Barnes),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에서 내전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조아나 초말리(Joana Choumali) 등, 각기 개성 넘치는 작품을 선보이며 작품을 통해 강렬하게 주제의식을 선보이는 이들이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아트넷이 주목한 작가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작년 프리즈 서울에서 생 로랑과 협업을 통해 쇼케이스를 열어 화제를 모았던 우리나라 작가 ‘이배’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숯의 화가’로 불리며 숯을 활용한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선보이는 그는 프랑스를 시작으로 전 세계에 숯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중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사용하고 있는 소재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더더욱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 숯을 통해 한국의 정체성과 문화를 드러내는 작가가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주목을 받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30여 년 동안 숯을 연구하고 탐구해가며 작품 활동을 해온 거장의 진가가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아트페어에서 선보인 허한나 작가와 이배 작가의 모습을 통해서 작가 자신이 가진 전통과 문화, 즉, 자신의 뿌리에 대한 고찰이 작품에 녹아들었을 때 모두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명작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는 비단 한국 작가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 어느 때보다 ‘나다움’을 추구하는 시대인 만큼, 예술계에서는 자신의 뿌리를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글 박민정 객원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