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에 태어난 샤흘 크리스토플(Charles Christofle)은 보석상을 운영하던 매형으로부터 일찍부터 금세공 기술을 배우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15살. 그는 1830년대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보석상 중 한 명으로 불리게 되고 작품을 남미로 수출하기까지 한다. 세공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신기술에 대한 호기심도 남달라서 당시 혁명적인 기술이었던 전해 도금 및 은도금에 대한 특허를 구입하기도 했다. 이렇게 비즈니스 감각까지 갖춘 공예가 샤흘 크리스토플은 파리 오페라 갸르니에 지붕의 거대한 동상과 루브르 박물관 계단 같은 전설적인 작업을 남기는 것 외에도 ‘Charles Christofle & Cie’라는 회사를 설립해 은 제품 식기류를 제작한다. 그것이 현재 메종 크리스토플의 시작이다.
메종의 탄생 이후 샤흘 크리스토플과 상속자들은 순결을 상징하는 귀금속인 은을 생활 예술의 상징이자 그 시대와 디자인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중요한 오브제로 탈바꿈시켰다. 장식 예술 분야에서 혁신과 전위의 최전선에 있으면서 지오 폰티, 맨 레이, 쟝 콕토, 앙드레 푸트만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 및 디자이너들과 협업을 꾸준히 이어온 것이 오늘날까지 최고의 식기 브랜드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2022년. 지난 200년의 역사를 새롭게 보여줄 가이드라인이 등장한다. 오랜 메종의 전통을 간직하는 반면 자유롭고 모던한 이미지를 심어 나가는 것을 목표로 람단 투아미는 새로운 로고와, 컬러, 캠페인 비주얼을 탄생시켰다.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와 브랜드 로고
새로운 타이포그래프를 위해 1912년 프랑스 서체 디자인계의 거장이자 그래픽 아트와 공예 잡지를 제작했던 샤를 피뇨(Charles Perignot)가 루이 15세의 조각가 샤를 니콜라 코친(Charles Nicolas Cochin)을 기리려 고안한 ‘코친(Cochin)’서체를 찾아내고 이를 재해석했다. 이는 1936년 만들어진 크리스토플 카탈로그에서 발견한 피뇨의 리드 레터를 기반으로 했다. 손으로 직접 쓴 것 같은 과거 서체의 전형적인 세부 디자인을 가져와 유기적인 결과를 만들었다.
크리스토플 그린
반짝이는 은과 가장 잘 어울리는 컬러로 녹색을 선택했다. 올리브그린에 가까운 ‘크리스토플 그린’은 17세기 말부터 그리스 신화의 중요한 요소인 올리브 나무가 상징하는 조화, 정교함 및 공감을 의미하는 신성하고 신비로운 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추가된 21세기 컬렉션
브랜드의 이미지를 새롭게 고치는 과정에 시대에 걸맞은 컬렉션을 개발했다. 이전에는 없었던 운동화 보관 상자와 텀블러가 그것. 브랜드의 상징적인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걸작을 다시 개발하는 것 외에 과거에 존재하지 않은 오늘날의 일상적인 오브제를 컬렉션에 포함시킨 것이 매우 흥미롭다. 일회용으로 여겨지던 물건이 은세공 기술을 만나 귀중한 소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몇 년 전 소더비는 스니커즈 전담 부서를 만들고, 최근 마이클 조던이 신었던 1984년도 나이키가 1,472,000달러에 낙찰되기도 했다. 이렇게 예술 작품 등급으로 승격된 스니커즈를 수집하는 사람들을 위해 올리브그린 컬러 벨벳의 안감 처리된 은 케이스를 신발 상자로 제작했으며, 덮개에는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두 개의 구멍을 마련했다. 완벽한 보관을 원하는 수집가들을 설레게 할 이 상자는 실용성을 물론 극도의 세련미까지 느낄 수 있다.
일회용 커피 컵을 재해석해 만든 텀블러 역시 재미있다. 이중 단열 기술 덕분에 음료를 따뜻하게 유지하는 것은 물론 차가운 음료의 경우 세밀하게 제작된 은색 금속 빨대와 함께 사용하면 편리하다. 전면과 뚜껑에 새겨진 크리스토플 로고는 사용하는 사람에게 특별함을 느끼게 해준다.
새 컬렉션을 위한 캠페인 이미지들 또한 기존 광고와는 무척 다르다. 고가의 럭셔리 제품들이 일반적으로 선보이는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과 달리 이번 캠페인에는 평소 우리의 일상이 담겼다. 접시 위에는 먹고 남은 음식, 테이블에는 음식 부스러기, 한 입 베어먹고 놔둔 사과, 쓰러진 컵에서 흘러나온 물까지 무척 혼잡하다. 하지만 이런 혼잡함 속에 놓인 크리스토플 제품들은 여전히 빛이 난다. 요즘은 SNS 용으로 다 먹고 난 접시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것이 세련된 것이라는 소리는 들은 적이 있다. 이런 요즘의 온라인 감성과 동일시 여겨지는 컬렉션 사진들은 자꾸 쳐다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저 번잡한 장면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고, 보는 이에게 그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들고, 결국엔 크리스토플 제품들이 나의 일상에서 먼 것이 아닌 가까운 매개체로 다가오게 한다.
람단 투아미는 누구?
프랑스의 유명 아트디렉터이자 화장품 브랜드 ‘불리(BULY) 1803’의 공동창립자다. 리버티 런던의 남성복 디렉터로 활동했고, 2007년 파리의 고급 양초 제조업체 ‘시흐 트루동’의 아트디렉터를 맡아 브랜드를 되살리며 주목받는다. 2019년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아트 리서치 인더스트리(Art Recherche Industrie)’를 만들어 자신이 만든 ‘불리’를 비롯한 다양한 브랜드들과 작업을 해오고 있다.
글 양윤정 객원 에디터
자료 출처 크리스토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