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어 힐데브란트는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진 경험과 샤넬 서울 플래그쉽 스토어의 한 쪽 면을 장식한 이력으로 우리에게도 제법 익숙한 작가이다. 주로 아날로그 사운드 저장 매체를 사용하여 작업하는데 카세트 테이프, 레코드판과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고 조각, 설치 작품을 만든다. 힐데브란트의 작업은 미니멀리즘과 추상 표현주의로 표현된다. 단순해 보이지만 작품들은 많은 문학적, 영화적, 음악적, 건축적 영감을 자양분으로 성장해왔다. 이러한 문화적 원천은 작가 개인 뿐 아니라 작품을 마주하는 대중들에게도 특별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촉발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2020년, 즉 미술관이 완공되기도 전 쿤스트할레 프라하의 큐레이터 크리스텔 하브라넥(Christelle Havranek)이 파리에서 그레고어 힐데브란트를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개관 후 대형 개인전으로 소개될 아티스트는 한번도 체코에 소개된 적 없으면서 2개의 갤러리 공간을 혼자서 다 채울 수 있는 기량을 갖춘 작가 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힐데브란트만큼 적합한 작가가 없다고 판단한 것. 그 또한 20년 작가생활을 되돌아 볼 수 있는 대규모 회고전의 필요성에 동의했고 미술관이 개관도 하기 전, 공간을 직접 보지도 않은 시점에 큐레이터와 아티스트 두 사람의 신뢰가 중심이 되어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건물 1, 2층 두 개의 갤러리에 걸쳐 80점이 넘는 작품들이 채워졌고 작품의 종류도 회화, 조각, 설치 등 다양하다. 여기서 전시명의 의미가 갑자기 궁금해진다. ‘눈 깜박할 사이에 세월이 흘렀다. A Blink of an Eye and the Years are Behind Us.’ 한국어 표현으로도 존재하는 이 재미있는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호기심을 유발시키려는 목적 외에도 이는 작가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눈 깜박할 사이에 작가로 살았던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뜻, 그리고 그 쏜살같이 흘러간 20년을 응집하는 전시가 여기에 있다라는 의미이다. 전시에는 과거 대표작과 신규 작품들을 함께 모았다. 가장 처음 작업했던 테이프 필름을 캔버스에 붙이는 1999년작부터 이번 전시를 위해 프라하의 테라조(terrazzo) 바닥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컬러풀한 레코드 판과 나무, 알루미늄이 사용된 2022년 최신작까지 조금씩 변모하고 발전해온 작가의 발자취를 순서대로 읽을 수 있다.
1층 전시장에 입장하면 다양한 무채색의 톤을 가진 무게감이 느껴지는 조각과 회화 작품들이 조화롭게 펼쳐진다. 초기 작업부터 기본 재료가 되었던 테이프 필름으로 덮은 벽면은 관락객들의 움직임에 따라 물결치듯 미세한 움직임이 동시에 일고 바이닐 레코드 판의 조각을 콜라쥬한 작업은 조각마다 가진 미세하게 다른 반짝임을 보여주면서 중앙의 체스 피스를 확대한 묵직한 브론즈 조각상의 매트한 검정색 질감은 밸런스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물결치는 필름 벽면은 쿤스트할 프라하 공간에 맞춰 제작한 VHS 카세트의 마그네틱 테이프로 만든 대규모 설치물 ‘오르페우스(Orphéeee)’인데 단순한 테이프 필름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프랑스 감독이자 시인이자 예술가인 장 콕토(Jean Cocteau)의 1950년 영화 오르페우스가 포함되어 있고 특수 처리된 필름은 물 위 사물이 반사되는 효과를 가지고 있어 바라보고 있으면 신비한 느낌이 든다.
오디토리엄 공간에는 놀랍게도 카세트 테이프가 바닥을 덮고 있다. 카세트 테이프와 에폭시 레진이 사용된 제목도 ‘카세트 마루바닥(Cassette Parquet Flooring)’인 작업은 실제 뮤지션들이 이 위에 올라가 공연을 할 무대이기도 하다. 힐데브란트는 파트너인 알리시아 크바데(Alicja Kwade)와 함께 음반사를 운영 중인데 그들과 함께 작업한 뮤지션들이 전시기간 동안 이 무대에서 콘서트를 열 계획이다. 일정은 홈페이지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2층으로 올라가면 그의 베를린 스튜디오 건물에 있는 (예전 문지기의 집이었던) 오두막 공간 ‘그르체고르츠키 쇼(Grzegorzki Shows)’를 재현한 것을 볼 수 있다. 녹색 리놀륨 바닥과 핑크 네온사인으로 완성된 오두막은 실제와 동일하게 재현되었고 반대편은 압축 가공한 레코드 판으로 세워진 미로의 통로로의 초대가 기다린다. 검정과 흰색의 레코드들로 쌓아 올려진 벽은 일종의 단색화 같으면서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거대하고 강렬한 미니멀리즘 건축물의 일부분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그렇게 미로를 통과하고 마지막 출구에서 마주하는 장면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높은 천장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검정색 천막이다. 이 거대한 천막이 주는 시각적 놀라움은 경이로울 정도. 전시의 마지막 장면은 관람객 누구나 감탄사와 함께 마무리 짓게 된다. 이런 전시 스토리라인을 되집어 보면 힐데브란트의 20년 작가 인생을 돌아봤을 때 현재가 가장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싶다. 그의 시작도 물론 기발하고 아름다웠지만 관객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현재 그리고 더 나아갈 미래까지 기대하고 지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Interview with 그레고어 힐데브란트
— 전시를 축하한다. 개인적으로 1층에서 시작해 2층으로 옮겨가면서 점차 발전되는 미디엄의 사용과 작품의 이야기, 그리고 미로처럼 구성된 공간을 거쳐 마지막 방에 도달했을 때 마주하는 거대한 작품 2017년작 Segel은 영화 또는 연극의 클라이맥스를 느끼게 해준다. 이런 희극적 구성을 미리 생각하고 작품을 배치했는지 궁금하다.
아니다. 2층 전시관은 따로 벽이 없이 가로로 긴 하나의 공간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로 압축 가공한 LP 레코드판을 탑처럼 쌓아 올려 구성한 미로(Labyrinth)를 넣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벽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미로에서 탈출했을 때도 아무것도 없을 거라 예상하지만 2017년에 텔아비브에서 사이프리스까지 세일링을 했을 때 사용한 거대한 플라스틱 필름 천막을 마주하는 것은 놀라운 비주얼 경험일거라 생각한다.
— 쿤스트할레 프라하로부터 꺄르트 블랑쉬를 제안 받았나?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르체고르츠키 쇼’는 큐레이터인 크리스텔 하브라넥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베를린의 작업실 일부분을 다시 하나씩 재현하는 것은 시간 뿐만 아니라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되는 일이기 때문에 미술관 측으로부터 프라하에서 직접 제작을 제안 받기도 했다. 덕분에 거의 이주일 만에 제작을 마쳤다.
— 작품 설치에 어려움이 있었던 부분은 없었나?
1층 전시장 천장에 설치된 컬러풀한 바이널 작업은 건물 규정의 이유로 설치 자체가 큰 문제였다. 이유는 건축물의 안전 규정에 맞지 않았기 때문인데, 작품으로 천장 전체를 덮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절충안으로 반만 사용하게 되었다.
— 서울에서도 전시를 가진 적이 있는 걸로 안다.
맞다. 갤러리 페로탕에서 개인전을 가졌었고 키아프에서도 솔로 전시를 치뤘다. 서울 샤넬 스토어로부터 거대한 설치물 작업 제안을 받아 그 곳에서도 내 작품을 접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에 두 번 방문한 경험이 있다. 좋았던 기억은 냉면과 산낙지다. 독일에서는 따뜻한 국수만 먹는데 차가운 국수라는게 너무 신기하고 맛있었다. 산낙지를 처음 대했을 때는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지만 고추장과 함께 먹어보니 꽤 맛있었다.
— 음악은 당신 작업의 키워드라고 할 만큼 매우 중요하다. 작품들은 음악을 담고 있지만 사실 관객들은 음악을 상상해야 할 뿐 실제로 듣지는 못한다.
그렇다. 음악은 내 작업의 내부에 존재한다.
— 그래서 이번 전시에 퍼포먼스를 포함시킨 것이 흥미롭다. 소리를 내지는 못하지만 음악을 담고 있는 작품들에 둘러싸여 라이브 콘서트를 경험하는 것은 관객들에게 매우 멋진 경험이 될 것이다.
그르체고르츠키 레코드(Grzegorzki Records)라는 인디음악 레이블 회사를 운영 중이다. 이를 통해 정기적으로 레코드를 제작하고 뮤지션들을 지원한다. 그들이 이번 전시 기간 중 몇 번의 콘서트를 이 곳에서 가질 예정이다. 카세트 테이프로 제작된 바닥 위에서 말이다. 레코드 회사를 운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오래된 LP 레코드판을 구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수요도 충분치 않으며 가격도 너무 비싸다. 그래서 직접 음악을 만들고 제작하는 것이 나에겐 재료를 수급하는 하나의 해결방법이 되었다.
— 바보같은 질문 일수도 있는데 작업에 사용되는 수많은 카세트 테이프는 어디서 어떻게 구하는가?
과거에는 수퍼마켓에서 싼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었다. 10개에 5유로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카세트가 음악시장에서 사라지면서 더 이상 구입이 불가능해졌고, 주변 베를린 아티스트 친구들로부터 안 쓰는 테이프를 전부 전달받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베이에서 통해 많이 구입한다.
글 양윤정 객원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