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처럼 다채로운 빛의 회화
이번 전시에서는 실크에 갖가지 색의 염료를 고루 입혀 완성한 추상화 연작과 함께 전통 유리공예 기법으로 탄생한 유리 조각, 앞서 선보인 공연을 기록한 사진 작업 등 50여 점을 선보인다. 앞서 9월 초에 열린 Kiaf에서 갤러리현대가 프리뷰로 선보였던 실크 작품과 유리 조각 작품들을 기억하고 있다면 더 반가운 작품들일 테다.
겉으로는 아름다운 추상회화처럼 보이지만 작품 배후에는 오랜 시간 작가가 추적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마티 브라운은 미술뿐 아니라 문화, 역사,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탐구하면서 의미망을 직조해 가는데, 비크람 사라바이 (Vikran Sarabhai),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인도의 우주개발 프로그램 등 인물이나 문화의 이동과 교류, 변화 작용을 연구하며 본인만의 서사를 창조해 간다. 전시 제목인 <Ku sol>은 달을 뜻하는 핀란드어 ‘쿠(Kuu)’와 태양을 뜻하는 라틴어 ‘솔(Sol)’을 조합한 것이다. “두 가지 언어를 조합한 것은 다른 문화권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또 하늘에서 달과 해가 만나는 순간을 떠오르게도 합니다. 빛은 내 작업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죠.” 마티 브라운은 특정 대상을 재현하지 않고 본인만의 서사를 창조해 나간다. “저는 작업과 전시를 통해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 기쁨을 느껴요. 이 전시 제목이 관람객에게 잘못된 인지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양한 경로로 접근하는 것을 의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실현된 외계인 영화 각본에서 출발한 연구
마티 브라운은 흥미롭게도 인도 영화감독, 사트야지트 레이(Satyajit Ray, 1921~1992)의 미실현 각본 <외계인(The Ailen)>과 그 각본이 세계에 미친 영향을 오랜 기간 연구해 왔다. 레이 감독은 영화, 음악, 책의 저술가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으며 무엇보다 인도 영화를 세계 무대에 알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레이는 1967년 뱅골 서부를 배경으로 SF 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했는데, 여기 등장하는 외계인은 커다란 머리와 움푹 팬 볼, 쑥 들어간 눈으로 묘사된다.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 친근하고 아이 같은 이미지로 묘사된 첫 사례다. 한 마을의 호수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마을 소년 하바와 만나 우정을 쌓는다는 이야기는 스필버그 감독의 <E.T.>를 연상시킨다. 이 시나리오는 영화화되지 않았지만 마티 브라운은 스필버그의 영화와 레이의 시나리오와의 연관성을 찾아내려 연구를 거듭했다.*
*레이 감독은 ‘내 영화 대본이 등사판으로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스필버그의 <E.T>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으나 스필버그는 이를 부인했다.
“저는 서베를린 출신이에요. 많이는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할리우드 영화를 접할 기회가 종종 있었죠. 개인적으로 십 대 때 처음 <E.T.>을 봤어요. 나중에 레이 감독을 알게 되고 나서 상상해 봤습니다. 만약 스필버그가 아닌 레이가 만든 외계인 영화라면 어땠을까 하고요.” 인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많이 만들어내는 나라로, 레이 감독은 발리우드 영화의 시초 격이다. 비록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제작 논의 과정 중 무산되었지만 이후 발표된 많은 SF 영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티 브라운의 회화는 <외계인>에 기술된 이미지와 낯선 존재와 인간의 만남이 동서양을 넘나들며 새롭게 해석되거나 고착화되는, 드러나지 않는 문화의 흐름과 현상을 자신의 작품에 녹여낸다.
추상 회화 속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아름다운 빛이 마치 우주의 광선이나 새로운 시공간의 차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티 브라운은 2008년부터 실크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도네시아의 전통 밀랍 염식 기법인 ‘바틱(batik)’ 기법으로 추상적인 형태가 드러나는 회화를 선보였는데 2014년 이후부터는 색상을 혼합한 실크 추상화를 시도, 점차 빛의 스펙트럼이 극명히 드러나는 지금의 회화로 전개했다.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현대 1층에 들어서면 화려한 색의 향연을 느낄 수 있다. 만약 무지개를 가까이 볼 수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작가는 가장 화려한 작업들을 이곳에 배치했다고 귀띔했다. 이 작업은 특별히 찾아낸 섬유 바탕에 다채로운 염료를 스며들게 해 만들어 낸 것이다. 작가는 실크라는 소재를 통해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역사와 직물 생산의 전통 기술 등 다양한 의미를 끌어낸다. 하지만 실크에 스며든 아름다운 색의 향연은 이야기가 작업을 설명하는 요소가 되기 보다 관람객이 새로운 시각 경험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도록 안내한다.
외계인의 눈 혹은 알처럼 생긴 둥근 유리 조각은 독일 전통 유리공예 장인들과 협업해 만든 작업이다. 입으로 유리를 불어 만드는 바이에른 주의 유리공예(Glashütte Valentin Eisch) 기법은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온다. “지금은 산업화로 공방이 많이 줄긴 했지만 유리라는 소재는 오래전부터 하이-테크니션의 상징이었습니다. 실크는 동서양 문화의 교류와 연관이 있는데 이렇듯 모든 소재에는 각기 스토리가 있어요. 그 요소가 필요하니까 있는 것이죠. 외계인에 대해 연구한 바가 있더라도 설명을 붙이지는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명상적 여정을 떠나보길 바라요.”
마티 브라운은 레이 감독의 시나리오 속 줄거리를 바탕으로 2006년, 런던 더 쇼룸 (The Showroom)에서 공연 <The Alien>을 만들었다. 절제된 미감이 돋보이는 이 공연은 사진 기록으로만 남았는데 갤러리 지하층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번 개인전을 기회로 내한한 작가는 지난 9월 22일, 그가 오랫동안 연구한 인물인 인도 과학자, 비크람 사라바이(Vikram Sarabhai, 1919~1971)에 대해 소개하는 강연을 펼쳤다. 아름다운 빛의 스펙트럼, 그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꺼낼수록 마티브라운 작업의 깊이와 서사는 풍부하게 다가온다.
마티 브라운(Matti Braun)
1968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1996년에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조형예술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에스더쉬퍼갤러리(2020, 2019, 2014, 2010, 2007), BQ갤러리(2017, 2012, 2008), 멕시코시티 OMR 갤러리(2022, 2016) 등에서 갤러리 개인전을 개최했다. 2018년 미국 뉴욕의 루빈미술관에서 <A Lost Future>, 2016년 독일 하일브론의 쿤스트페어라인 하이브론에서 <Lak Sol>, 2012년 영국 브리스톨의 아르놀피니 현대미술센터에서 <Gost Log>, 2010년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의 쿤스트페어라인 브라운슈바이크와 프랑스 누아지르세크의 라 갤러리 컨템포러리아트센터에서 《Salo》, 2009년 리히텐슈타인 파두츠의 쿤스트뮤지엄 리히텐슈타인에서 <Kola>, 2008년 독일 쾰른의 루드비히미술관과 이탈리아 사우스 티롤의 뮤제이온근현대미술관에서 <Özurfa> 등 유럽과 북남미 주요 기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독일연방공화국현대미술관, 핀란드국립미술관, 루드비히국제예술포럼, 뮤제이온근현대미술관, 렌바흐하우스미술관, 몽블랑문화재단 등 유수한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쾰른에서 거주하며 활동 중이다.
글 이소진 수석 기자·콘텐츠 리드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갤러리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