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모네다 궁전 문화센터는 물론이고 다양한 국립기관의 책과 카탈로그를 제작한 에디토리얼 디자이너는 빠올라 이라사발(Paola Irazábal)이다. 빠올라는 데사로요 대학교(Universidad de Desarrollo)와 디에고 포르탈레스 대학교(Universidad Diego Portales)의 디자인 교육자이자 디에고 포르탈레스 대학 출판사의 디렉터로 활동 중이며, 개인 디자인 스튜디오 삐(Estudio PI)를 운영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그를 소개한다.
Interview with 빠올라 이라사발
— 칠레 모네다 궁전 문화센터와 교육기관, 미술관 등을 위해 60여 권이 넘는 책과 잡지, 카탈로그를 디자인하셨는데, 언제부터 예술과 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요?
생각해 보니 아주 어릴 때부터였어요. 예술과 문화는 저의 가족들 안에서 항상 다뤄지는 주제였습니다. 화가인 어머니와 책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저를 미술관에 자주 데리고 갔고, 예술과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직간접적으로 인식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디자인을 전공하고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칠레 산티아고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센터인 ‘모네다 궁전 문화센터’에 디자이너로 취직했습니다. 이 곳은 저에게 매우 큰 업적을 쌓게 해준 제2의 학교와 같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병마용, 인도 예술 등 다양한 대가들의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전시와 홍보 디자인을 맡으며 전시학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예술과 문화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시 도록과 책자를 디자인하기 위해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 곳에 있던 모든 콘텐츠들이 환상적이었습니다. 전시 하나 하나가 각자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야기의 중요한 장면을 포착해 책으로 구현한다는 작업이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다양한 국가, 교육, 문화, 사립 기관들과 같이 협업해서 책 큐레이팅(curating)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 본인이 하는 작업을 책 편집 디자인이 아닌 전시를 기획할 때 사용하는 ‘큐레이팅(curating)’이라는 용어를 써 ‘책 큐레이팅’이라고 하셨네요. 책을 삼차원 공간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의미하는 건가요?
저의 생각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해 주셨습니다. 저는 책 디자인에 있어서 ‘해부학(anatomy)’ 과 ‘큐레이팅(curating)’이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합니다. 목차를 골격에 비유하고 콘텐츠와 이미지는 이를 채워 나가는 살과 장기라고 가정할 때, 편집 디자인을 책의 해부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큐레이팅은 책의 순서, 제목과 텍스트, 컬러, 이미지로 구성되는 시각적 위계와 관련 있지요. 책을 어떻게 디자인 하는가에 따라 시각적 여행(visual journey)의 경로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술가의 작품이 디자인에 뒤덮이지 않게끔 하는 것이 큐레이팅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항상 예술가의 작품이 책의 디자인보다 빛나게 하는 것, 다시 말해 과장된 디자인(over-design)을 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요. 그래서 책은 심플하면서도 뛰어난 디자인을 지녀야 하고, 그러면서 내용을 돋보이게 하는 균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 디자이너님의 말을 정리하자면, 전시 도록을 디자인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디자이너의 자유로운 시각적 표현을 방해하는 일이 없어야 함과 동시에 전시 기관을 대변하는 시각물이라는 엄격함이라 해석됩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창의적인 디자인을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의뢰인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고 봅니다. 성공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은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과 관련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의뢰인이 예술가가 아니라 다른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굉장히 엄격한 룰을 갖춘 책을 주문합니다. 물론 요즘에는 국가기관도 많이 유연해지긴 했지만, 구조적인 체계를 갖추어 있어 여전히 엄격하게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먼저 그들이 뭘 원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듣고 몇 가지 디자인을 제안합니다. 이런 시각물은 종종 그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디자인일 때가 있습니다. 이를 보고 의뢰인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멋지게 시각물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요. 그 과정에서 의뢰인이 타이포그래피와 색상, 미세한 디테일을 인지하고 일반 책와의 차이를 의식해가는 과정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융통성있게 진행하려 노력합니다.
— 미술관과 같은 기관은 종종 본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 서체를 제공하죠. 자유롭게 서체를 고르고 이용하는데 제한적일 것 같은데요.
맞아요. 정말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다행히 점점 국가기관도 타이포그래피 선정에 있어 보다 더 유연해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타이포그래피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지금은 의뢰자와의 협상을 통해 디자이너의 관점을 제안할 여지가 있지만, 여전히 의뢰자 본인들의 로고타입(logotype)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최악의 분쟁은 기관이 거대한 크기의 로고를 책 표지 한가운데 배치해달라고 요구함과 동시에 아티스트의 디자인이 잘 드러나기를 원할 때 발생합니다. 이럴 때는 저 역시 재주를 부릴 수밖에 없지요. 그들이 거대한 로고를 표지에 붙여 달라 하면 그 요구를 들어주되 반투명 종이로 감싼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즉, 원하는 사이즈의 로고를 표지에 배치하지만 톤과 색상, 재료를 적절히 선택해 전체적인 책 분위기를 망치지 않게 하는 것이죠.
— 20세기 미국 타이포그래피와 편집디자이너 허브 루발린(Herbert Lubalin)은 좋은 책은 이미지,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레이아웃, 세 개의 디자인 요소가 조화를 이룰 때 실현된다고 했습니다. 동의하세요?
네, 완전히 동의합니다. 책 디자인은 양면 세팅(double-page setting)에서 시작하는데 이미지와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이 둘을 구성하는 레이아웃이 바로 편집 디자인의 근본적인 요소들입니다. 저에게 디자인은 일종의 시각 저널리즘(visual journalism)입니다. 시각적 위계는 어떻고, 양면에 중요한 내용은 무엇이며, 무엇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독해 리듬은 어떻게 구성하는지 등을 고민합니다. 독자들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디자이너가 정보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달려있지요.
— 이 세가지 요소 외에 디자이너님의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재료라고 생각됩니다. 재료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주세요.
재료 선정은 인쇄와 출판 과정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다양한 사이즈와 질감의 종이, 다양한 잉크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독해를 할 수 있습니다. 제게 책의 물질화는 아티스트가 전하고자 하는 영혼을 책에 고스란히 반영시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병마용(秦始皇兵马俑) 전시의 도록을 디자인했을 때, 중국의 전통과 거대한 역사를 결과물에 반영하기 위해 책자의 크기를 정하고 책 중간 중간에 가로로 길게 펼칠 수 있는 폴드 아웃 지면(fold-out page)을 삽입하기도 했습니다.
칠레 패션을 다룬 책을 디자인했을 때는 색상과 책 표지의 재료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 결과 책을 마치 하나의 패션 아이템처럼 실크스크린 인쇄를 한 천으로 포장해 발간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발간식에서는 사람들이 책의 포장 천을 자를 수 있도록 수많은 가위를 걸어 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책을 감싸고 있던 천을 과감하게 오려내지는 못하더라고요.
프란시스카 프리에토(Francisca Prieto)라고 런던에서 거주하는 칠레 예술가의 책 디자인을 맡았을 때, 디자이너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런 대화를 통해 그녀가 종이와 기하학에 큰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300장이 넘는 이 책에 독해의 리듬감을 주기 위해 책 중간 중간 다양한 질감의 종이와 잉크, 기하학적인 형태로 자른 지면, 각 장마다 다른 색의 종이를 활용했고, 폴드 아웃 지면을 이용해 작가의 세계관을 소개했습니다.
이처럼 한 권의 책은 또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책 자체로 소유욕을 불러일으킬 만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책은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가운데서, 혹은 그림만 보며 질감을 따라갈 수도 있어요. 다방면으로 읽을 수 있는 사물이 되는 것이죠.
— 마지막으로 편집 디자인에 관심 있는 한국 디자이너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90%의 인내심과 10%의 재능”이라는 제 모토를 나누고 싶습니다. 특히 90%의 끈기는 디자인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24시간, 365일 디자인을 생활화하고 디자인에서 숨 쉽니다. 길을 걸을 때도 주변의 색감, 타이포그래피, 패키징, 로고 등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규칙적인 디자인 작업을 수행하는 것 뿐 아니라 같이 일하는 사람을 경청하고 마을을 읽는 데에 필요한 인내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디자이너가 대중을 감동시키기 위해 가져야 하는 자세라 생각합니다.
글 김엘리아나 해외 통신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스튜디오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