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스는 일견 패션 브랜드처럼 보이지만, 의류를 중심으로 그래픽 포스터와 다양한 굿즈를 선보인다. 다음은 뭘 만들고 싶냐는 물음에 “그때그때 다르다”라고 답한 이승준 디자이너는 올해 합류한 팀원들과 새로운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언제 나오냐?’라는 궁금증은 접어 두시길. 시즌리스·젠더리스·타임리스가 브랜드의 가장 큰 화두란다. 런던과 베를린, 유럽에서 10여 년의 시간을 거쳐 서울로 돌아온 플라이스가 2막을 맞았다.
이승준 디자이너
브랜드 플라이스(PLYS)의 디렉터.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텍스타일, 남성복을 공부했다. 2011년 폴 스미스 멘즈 프린트 어워드에서 우승했으며, 2016년 플라이스를 론칭, 2017년 제13회 삼성패션디자인펀드 SFDF에서 수상자로 선정됐다. 2018년 레지나표와 함께 비이커 한남점에서 수상자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다. 플라이스의 옷은 화려한 네온 컬러가 특징인데 이는 공사장 인부나 스쿠버다이빙 장비, 사이클리스트 유니폼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이다. 런던과 베를린을 거쳐 10여 년간의 유럽 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서울에 돌아와 작업실을 마련했다. 최근 합류한 팀원들과 함께 그래픽 디자인과 소재 개발에 힘쓰며 새 컬렉션과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Interview with 플라이스
이승준 디렉터, 민예홍 디자이너, 김유진 팀원
*이름이 없는 답변은 공통 답변입니다.
— 브랜드명 ‘플라이스(PLYS)’는 니트 원사에 2겹의 실이 꼬여 있다는 것에서 착안해 지었다고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간결하면서도 브랜드 정체성을 대변하는 단어를 찾고자 했어요. 자연스럽게 플라이스 론칭 당시 주력 아이템으로 삼은 ‘니트’를 연결 짓게 됐습니다. 섬유 한 가닥, 한 올을 뜻하는 단어 ‘ply’를 떠올렸고 여러 실타래가 엮여서 하나의 조직을 이룬다는 의미를 담아 ‘플라이스(PLYS)’라고 짓게 됐죠. 니트웨어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조금 직접적이기도 하지만, 기본에 충실하면서 브랜드 이미지를 단번에 전하기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실은 한 겹으로 만들면 약하기 때문에 여러 가닥으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재봉실만 떠올려도 정말 두껍지 않은 이상 한 올만 있으면 쉽게 끊기기 마련이고요. 단어의 조합과 브랜드 본질에 집중하다 보니 짓게 된 브랜드명이고, 지금도 무척 만족스럽답니다. 어감도 좋지 않나요? (웃음)
— 이승준 디렉터님은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텍스타일과 남성복을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국내와 달리 해외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교육 커리큘럼이 있나요?
세계 어느 디자인 스쿨을 가도 각 교육기관마다 독창적인 커리큘럼이 있을 텐데요. 아무래도 전 세계에서 오는 학생들이 모이다 보니 과제로 만든 의복만 봐도 각 나라의 기후, 지리적 특성이 드러난다는 점이 무척 신기했습니다. 섬유 재질에 고스란히 반영되거든요. 특히 세인트 마틴 도서관에서 접했던 자료는 아직도 제가 옷을 만들 때 의지하는 레퍼런스이기도 해요. 세계의 텍스타일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방대한 자료를 통해 각자의 아이덴티티를 펼치는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기에 이론으로만 접할 수 없는 배움을 얻었죠.
—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약 10년가량 독일 베를린에서 지냈어요. 국내에도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한국 디자이너’로 많이 알려졌습니다. 외국에서 홀로 브랜드를 시작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독일에서 학업을 마치고 많은 분이 알 만한 유명 패션 브랜드에서 인턴십을 거쳤어요. 본격적인 브랜드 준비는 2014년부터 시작했고, 약 2년의 시간을 들여 2016년 SS 시즌에 론칭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브랜드를 준비하며 제품에 원하는 색을 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데 정성을 쏟았는데요. 외국인으로서 1인 스타트업을 운영하다 보니 업체와 소통할 때 제약이 많았습니다. 여러 회사를 찾아보고 문을 두드렸지만, 그들 입장에서 제가 달갑지 않은 클라이언트였을 거예요. 냉대를 당하거나 믿고 작업을 맡겨도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죠. 그렇다고 제품의 품질을 타협할 수는 없었어요. 원하는 이미지도 분명했고요. 결국 현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통해 신뢰할 만한 공장을 소개받기도 했는데, 라프시몬스(RAF SIMONS)나,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처럼 큰 브랜드와 거래하는 업체였습니다. 처음 관계자분에게 메일을 보냈을 때 답신조차 없었는데 직접 찾아가서 설득하니 ‘얘를 좀 도와줘야겠는데?’ 싶었나 봐요. 제품과 꼭 맞는 생산 업체를 찾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결국 최고의 업체와 거래할 수 있었으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웃음).
— 대면하니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나 봐요. 제품의 가능성도 봤을 것이고요. 그렇게 2016년, 파리에서 첫 데뷔쇼를 치렀어요. 일정 기간 런던의 한 쇼룸에서 플라이스의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고요.
제가 공부한 곳은 런던이었지만, 파리에서 첫 쇼케이스를 선보였어요. 파리 시장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개인적인 압박감이 있었거든요. 추후 영국에서 뛰어난 머천다이징 솜씨가 있는 쇼룸 에이전트들과 미팅을 진행하고 런던 베이스 에이전트와 함께 일했죠. 첫 컬렉션이라 미흡한 점이 많아서 차근차근 시작하려고 했는데, 첫 컬렉션부터 꿈꿨던 숍에 입점하는 영광을 누렸어요. 첫 컬렉션을 돌아보면 니트웨어 론칭에 대한 날것의 열정과 열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플라이스의 가장 순수한 비전을 보여준 컬렉션이었답니다.
— 니트 웨어에는 세계적으로 최고급 캐시미어 원사를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진 로로피아나의 원사를 고집한다고 들었어요.
니트를 입을 때 촉감이 좋지 않으면 안에 티셔츠를 입는데, 저는 니트웨어를 단품으로 입고 싶더라고요. 여러 업체의 원사를 이용했지만, 로로피아나 원단의 촉감은 그야말로 ‘버터’ 같았어요. 보드랍고 가벼웠고, 무엇보다 짜임이 견고했습니다. 로로피아나는 제가 원하는 컬렉션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또 ‘로스분(손실될 수 있는 여유분)’이 적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죠. 예를 들어 제가 실을 10kg 산다고 가정하면 로스분 계산을 해서 3~4kg 넉넉하게 주문해요. 중간에 실이 끊기고 사고가 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일정 여유분을 둬야 하거든요. 이를 부담하려면 버리는 돈이 상당해요. 근데 로로피아나의 경우 사고가 거의 없으니 로스분이 최소화되는 거예요. 함께 일하며 로로피아나가 왜 럭셔리 의류 브랜드 가운데 가장 고품질의 원사를 만들어내는 업체로 꼽히는지 다시금 실감하게 됐죠.
— 론칭 컬렉션을 선보인 직후부터 승승장구했어요. 거액의 세일즈를 성사시키고 글로벌 아이웨어 브랜드의 투자를 받기도 합니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가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점에서 입지전적 행보를 보였어요. 이례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비결이 있었나요?
첫 컬렉션부터 예상치 못한 성과를 낸 것은 사실이에요. 컬렉션 아이템 수가 많지도 않았는데, 몇 억 원대의 세일즈가 성사됐고 독일의 글로벌 아이웨어 브랜드 마이키타MYKITA의 투자를 받았죠. 게다가 당시 마이키타 회장의 아들이 제 컬렉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어요.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신진 브랜드인데 큰 관심을 받았던 셈이죠.
핵심은 ‘키 아이템’이 임팩트 있었다는 점이 아닐까 해요. 브랜드의 아이코닉한 아이템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 브랜드를 다시 찾는 이유가 되니까요. 저 역시 취향에 맞는 아이템은 자주 손이 가니까 2벌씩 구입하거든요. 간혹 특정 시즌에만 나왔던 아이템이 계속 나오길 바라기도 하고요. 이러한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해 시즌마다 색상과 소재를 조금씩 바꿔 꾸준히 출시하는 브랜드도 있습니다. 컬렉션 피스가 많지 않아도 브랜드를 떠올리게끔 하는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 매력적인 브랜드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죠. 플라이스의 컬렉션에도 강력한 무언가가 있었을 거예요. 저는 그게 색감이라고 생각하고요. 초창기 컬렉션에서는 공사장 표지판과 인부의 작업복, 스킨스쿠버와 사이클리스트의 유니폼 등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을 전개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강렬한 네온 컬러를 많이 사용했더라고요. 이 색상을 선호한 이유가 있나요?
여러 인터뷰에서 색상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아무래도 유년 시절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 게임 소프트웨어 디벨롭 일을 했던 아버지의 직업 덕에 일본을 오가며 8비트 콘솔 게임을 항상 접했는데요. 게임 플레이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게임에서 흘러나오는 사운드와 그래픽 이미지로 채워진 화면이 시선을 끌더군요.
표지판의 인포그래픽은 간결하지만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다이버와 사이클리스트의 유니폼, 인부의 작업복은 일상복과 달리 자신을 캐릭터화, 혹은 ‘무적화’한다는 생각까지 들었거든요. 이를테면 ‘Ranger’처럼요. 제게 형광색은 가장 익숙하면서도 별나고 폭력적인 색이에요. 피지컬한 폭력이 아닌 색채가 뿜어내는 시각적 자극과 힘이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저를 사로잡는 요소입니다.
— 플라이스의 의상은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과 배색에 중점을 둔 느낌입니다.
맞아요. 저도 실루엣이 눈에 띄기보다는 색상이 더 돋보이는 브랜드라고 생각해요. 색 조합만 잘 해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초밥도 굉장히 심플한 음식이지만, 고도의 테크닉이 배어 있듯 저희 의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깎아내고 핵심만 보여주는 것’이 플라이스의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 한편 이승준 디렉터님은 ‘주느세콰(JENESAISQUOI)’라는 브랜드의 디렉팅을 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컬렉션을 살펴보니 미니멀한 실루엣과 형광 배색이 돋보이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맡고 있나요?
벌써 주느세콰의 디렉팅을 맡은지 3년이 다 되어가네요! 베를린에서 활동하며 잠시 한국에 출장 왔을 때 주느세콰 대표님과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데요. 주느세콰를 리뉴얼하는 작업부터 브랜딩과 아트 디렉팅까지 모든 부분에 다 관여했기에 마치 제 분신처럼 애정이 가는 브랜드예요. 주느세콰를 위해 새로운 전략을 계획하고, 어떤 이미지로 소비자들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을지 매일 고민합니다. 주느세콰에서 키 아이템은 제가 모두 직접 디자인하고 있으며, 제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어요. 앞으로도 플라이스를 대하듯, 열정적으로 임할 계획입니다.
그래픽과 배색으로 직조한 브랜드, 플라이스 ②
▼ 2편에서 계속됩니다.
글 김세음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플라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