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01

캥거루와 바다에 가려진 호주의 이면

한국-호주 60주년 기념 전시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한국과 호주 수교 60주년을 맞이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호주의 복잡다단한 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2021년 12월 14일부터 2022년 3월 6일까지 중구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는 전시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다.
호주 골드코스트 해변 ⓒ Petra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캥거루와 코알라, 새파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사막, 넘실대는 파도에 올라탄 서퍼, 아름다운 오페라하우스… 호주를 검색하면 나오는 전형적인 이미지다. 이러한 이미지는 ‘진짜 호주’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을까? 우리는 과연 호주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호주는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이 ‘개척’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새로운 식민지를 찾던 영국은 호주라는 신대륙을 발견하고 죄수와 부랑자를 유배하는 유배지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1788년 영국의 해군 아더 필립(Arthur Philip)이 죄수 700여 명과 하급관리를 태운 배를 끌고 건너와 호주를 영국의 속국으로 선포, 총독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이건 백인의 입장에서 쓰인 역사다. 호주 대륙에는 제임스 쿡이 ‘침략’하기 수만 년 전부터 많은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애버리진(Aborigine)이라고도 불리는 호주 원주민은 넓은 땅에서 얻는 고기와 열매에 만족하며 발달된 기술 없이도 고유의 문화를 갖고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총과 칼을 휘두르는 유럽인에게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한 건 한순간이었다. 대륙을 점령한 영국인은 원주민을 사람이 아닌 원숭이와 같은 열등한 동물로 취급했다. 영국의 해적이자 탐험가였던 윌리엄 댐피어(William Dampier)는 1697년 자신의 저서에서 “그들은 짐승과 거의 다르지 않다”, “원숭이처럼 서로를 쳐다보며 히죽거린다”고 조롱했다.

 
호주를 탐험한 최초의 영국인이자 해적, 탐험가였던 윌리엄 댐피어(왼쪽). 윌리엄 댐피어와 호주 토착민의 모습.

 

백인들의 이러한 학살과 억압 기조는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원주민을 심지어 시민이 아니라 자연유산으로 분류할 정도였다. 호주 정부는 개화 정책이라며 원주민 언어를 금지하고 원주민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해 수용소로 보내거나 입양시켰다. 백인을 위한 노동자로 키워지는 과정에서 신체적, 정신적, 성적으로 학대당한 아이들이 수두룩했고, 어른이 되서도 사회에 정상적으로 편입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호주 정부는 2008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적 차원의 피해 보상 합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서울시립미술관

 

이번 전시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한 축을 이루는 호주의 예술가와 콜렉티브, 토착민 아트센터 등 35팀을 초대하여 여러 세대에 걸친 호주의 동시대 미술 실천을 폭넓게 조망한다. 호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재고하고, 고정된 시각에서 탈피해 호주의 미술과 사회를 구성하는 복잡다단한 문화·사회·정치적 갈피를 따라 다층적으로 사유하도록 제안한다. 관람객은 궁극적으로 호주라는 한 국가와 지역을 넘어 이를 작동케 하는 특권과 권력, 지배의 개념을 재검토하게 된다.

전시 제목인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라는 문장은 GPS를 활용하는 내비게이션 장비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동안 알고 있던 전형적인 길에서 벗어나 호주를 이해하는 새로운 여정을 제안하고 공유하는 뜻이 담겼다. 영어로는 ‘언 러닝 오스트레일리아(UN/LEARNING AUSTRALIA)’라는 제목이 붙었다. 직역하면 ‘탈 학습’. 백인들이 정리하고 주입한 호주 말고 상호 의존적인 배움의 과정을 통해 호주를 새롭게 탐구하려는 시도를 함축한다.

 

전시 일부 ⓒ designpress

 

공동 기획을 맡은 서울시립미술관과 아트스페이스는 본격적인 전시 만들기에 앞서 약 2년에 걸쳐 사회, 문화, 정치 문제와 양국의 역사, 미술을 둘러싼 밀도 있는 교류를 나눴다. 그 결과 회화, 영상,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를 넘어 호주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와 원주민 작가의 작품을 아우르는 폭넓은 자리가 마련됐다.

로비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작품은 호주 현대작가 아치 무어(Archie Moore)의 <연합 국가>. 호주 원주민 부족 14곳의 국기를 가상으로 만든 것이다. 작가는 흔히 국기 디자인이 각 나라의 역사적, 지리적 특징을 반영하는 것처럼 구글 어스에서 원주민 부족의 지형적, 문화적 특징을 살펴보고 가상의 깃발을 디자인했다. 이 작업은 식민지 초기, 호주 전역의 토착민 언어를 분류해 무작위로 통합한 식민 계획을 반박한다. 이로 인해 토착민의 문화적 정체성과 그 장소와의 연결성은 처참하게 끊어졌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시드니 공항 국제선 터미널 T1에 설치된 작품이기도 하다.

 

아치 무어의 ⓒ designpress

 

깃발 아래 마치 비닐하우스처럼 세워진 구조물은 파푸아뉴기니 출신으로 브리즈번에서 활동하는 작가 타로이 하비니(Taloi Havnini)의 작품 <교화>다. 호주 원주민은 정착해서 농사를 짓지 않고 이동하며 생활했는데, 잠시 머무르는 곳에 나무를 엮어 간이 건물을 지었다. 작가는 호주의 하코 부족원 구성원과 함께 건물을 지음으로써 토착 지식을 계승한다.

 

타로이 하비니의 ⓒ designpress

 

동물 가죽을 도화지 삼은 강렬한 작품도 있다. 호주의 한 부족은 아기가 태어나면 주머니 쥐의 표피를 꿰매 가죽 옷을 만들어 선물하는 전통이 있다. 작가 캐롤 맥그레거(Carol Mcgregor)는 이러한 주머니 쥐으로 만든 전통 옷 위에 호주 야생 꽃을 그려 작품을 완성했다. 여기서 꽃은 죽음과 비극을 상징하는 근조 화환. 1970년 호주 정부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초청해 쿡 선장의 상륙 200주년을 축하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열었는데, 원주민 입장에서 ‘현대 호주의 탄생’은 침략과 학살의 역사였기 때문에 당시 흑인 인권 운동가인 우드게루 누누칼은 항의의 의미로 근조 화환을 바다 위에 띄워 의도적으로 왕실 일행 앞을 지나가도록 했다. 우드게루를 추모하고 시위의 의미를 환기하는 이 작품의 제목은 <우드게루를 위한 화환>이다.

 

캐롤 맥그레거의 작품 앞면(왼쪽)과 뒷면 ⓒ designpress

 

작가 메간 코프(Megan Cope)는 전시장 한쪽에 조개를 한가득 쌓았다. 콘크리트로 만든 조개 1천 800개다. 고고학에서 조개 껍데기는 사람의 흔적을 의미한다. 대륙 곳곳에 원주민 공동체가 모여 산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은 이들을 아예 없는 존재 취급하고,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를 발견했다며 식민지로 삼는다. 유럽 이주민은 조개 껍데기를 태워 자신들의 건축물을 짓는 재료로 이용하면서 원주민의 흔적을 파괴했다.

 

메간 코프 ⓒ designpress

 

국내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인지도를 높인 작가 다니엘 보이드(Daniel Boyd)의 작품 3점도 만날 수 있다. 보이드는 볼록하고 투명한 풀(glue)로 찍는 기법으로 유명하다. 여러 색으로 밑 그림을 그린 후 풀로 투명한 점을 찍거나 점 위에 색을 얹는데, 그렇게 완성된 볼록한 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 ‘렌즈’를 의미한다. 호주 원주민과 식민지 역사에 천착해온 보이드는 <무제(TDHFTC)>에서전통 춤 공연을 준비하는 누이의 모습을 그렸다. 1층의 미술관 유리 파사드에는 <무제(37°33’51.2”N 126°58’24.4”E)>가 설치됐다. 수많은 원형 구멍을 낸 작품은 망점으로 변환돼 로비에 새로운 빛의 패턴을 쏟아낸다. 식민지 이미지를 재작업하는 보이드의 다른 작업처럼, 간단한 기법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 designpress
다니엘 보이드 작품들 ⓒ 서울시립미술관

 

호주의 현대미술작품 60여 점을 통해 호주를 하나의 고정된 주제가 아닌 다층적 복합체로 재탐색하게 하는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전은 사전 예약 없이 관람 가능하며 하루에 두 번 도슨트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3월 6일까지, 입장료 무료.

 

 

유제이 기자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주소
서울 중구 덕수궁길 61
일자
2021.12.14 - 2022.03.06
헤이팝
공간 큐레이션 플랫폼, 헤이팝은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와 브랜드에 주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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