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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6

명명되어서는 안 되는

챕터투에서 만나는 강철규, 이의성, 정희승 3인전
챕터투는 2016년, 서울 연남동에 설립된 공간으로 젊은 미술가들의 예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지금 그곳에서 5기 레지던시 입주작가전이자 강철규, 이의성, 정희승 3인이 참여하는 <명명되어서는 안되는(Better Not to be Named)>이 열리고 있다.
이의성, 털 날리는 계절, 2022(위), 2019(아래), 설치 전경, 사진: 오정은

 

“우리의 언어는 입안에서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가 나오는 게 아니라,

혀끝에서 맴도는 것이, 도무지 찾아지지 않는 것이 찾아져 입술 위에서 겨우 나오는 것.”

파스칼 키냐르

 

챕터투는 감정, 관계, 분위기 등 미묘하고 비가시적인 세계의 시각화를 모색해 왔던 이들 작가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고 앞으로의 행보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며, 하나의 명칭으로 단정해 명명될 수 없는 풍부한 해석과 유추가 필요한 전시의 주제를 밝혔다. 전시 서문에는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의 문장이 인용되는데, 이는 불완전한 표현 기호로써의 ‘말’의 한계를 상기시키면서 ‘뉘앙스’, ‘분위기’와 같은 불명확한 서사와 인과성을 가진 존재에 중점을 두는 전시의 기획을 대변한다.

 

“미술 작품에 있어서 ‘무제(Untitled)’가 보편화된 과정의 이면에는 특정한 제목이

작품 전체의 기조와 분위기를 왜곡하고 한정 지을 수 있다는 공통된 두려움에 기인하기도 한다.”

<명명되어서는 안되는> 전시 서문 중

 

강철규, 알고리즘(Algorithm), oil on canvas, 2022 © 챕터투

 

강철규는 <유연한 경계들>(2022), <상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2021), <나는 숲으로 간다>( 2020)등의 전시에 참여하며 회화가 매체적으로 담을 수 있는 조형 감각과 심오한 정서를 일관성 있게 보여주고 있는 작가다. 그는 상실에 관한 자신의 기억을 작업에 투영해왔고, 주로 초록색으로 채색된 화면 속 이미지는 점차 슬픔과 불안이 가미된 숲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났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유화 <알고리즘(Algorithm)>(2022)에서도 작가 특유의 색감으로 채워진 숲과 나무가 보인다. 멀리 초원과 석양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장소에는 특이하게도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나체로 춤을 추는 사람들, 높이 솟은 불꽃 주위로 모여든 채 서있는 사람들, 얼굴에 종이봉투를 쓴 양복 신사와 전기톱으로 무언가를 자르는 중인 노동자, 고개를 푹 숙이고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남자, 유령처럼 반투명한 몸으로 정면을 응시 중인 검은 옷의 사람 같은 이들이다. 어떠한 내러티브도 상징적인 도상의 뜻도 확정할 수없이 기묘하고 초현실적인 광경으로 보이는 그림은 인간 내면에 심어진 두려움과 비극적 정서, 우울감을 건드리는 강철규 작가 특유의 화법을 재생한다.

 

강철규, 솔리튜드(Solitude), oil on canvas, 2021, 사진: 강철규

 

함께 전시 중인 작업 <솔리튜드(Solitude)>(2021)는 캔버스 3개가 이어진 회화로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고 담배 연기를 내뿜는 사람의 짧은 동작이 멀리 창밖으로 보이는 파도의 움직임과 함께 묘한 미장센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인터뷰에서 강철규는 자신의 작업을 ‘그림일기’로 칭하면서 “이런 그림일기가 마치 연재하는 글이나 만화처럼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서사가 생겼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서사는 글처럼 읽기보다는 유추와 감정적 공감을 통해 독해되는 것에 가깝다. 미술이 존재하는 처음의 이유가 그랬듯이.

강철규, 알고리즘, 2022(좌), 솔리튜드, 2021(우), 설치 전경, 사진: 오정은

 

“어린 시절, 스프링 연습장을 갈아 치우며 많은 그림을 그렸고, 주로 웅크린 아이와 강인해 보이는 전사를 그렸죠. 부모님이 좋아할 그림은 아니었어요. 그림을 그리며 외롭고 혼란스러웠던, 고독하면서도 좋은 때 어딘가 아주 깊이 잠겨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게 여태까지 이어져오는 것 같아요. 모든 이야기가 그런 잠긴 곳으로부터 나오는 듯해요. 그런 이야기를 요즘은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왜인지 몰라도 그 세계관이 요즘 마구 변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많은 일이 생기고 존재의 의미도 전복되는 것 같아서인지. <알고리즘(Algorithm)>은 일단 떠오르는 대로 그린 겁니다. 서사가 뒤죽박죽이 되고, 난잡하게 섞인 무언가가 나를 구성하고, 그런 더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골라내고 있어요.”

– 강철규 작가

 

이의성, 털 날리는 계절(Shedding Season), 2021 © 챕터투

 

수행적인 조각 행위가 축적된 조각 혹은 조각적인 대상을 통해 작업의 생산성, 노동력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며 인천아트플랫폼, 전북도립미술관 등에서의 다수 전시와 2019년 송은미술대상 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이력을 쌓은 이의성은 <Thermo° pack>(2019), <휨의 정도>(2019), <털 날리는 계절>(2021), (2022)을 통해 조각의 물질/비물질적 변주와 혼용 과정에서의 음율감을 보여주며 이번 전시의 결을 함께 하고 있다.

 

정희승, 일식(Eclipse), 2020

 

광주비엔날레, 국립현대미술관, 하이트컬렉션 등의 전시에 참여해온 중견작가 정희승은 <일식(Eclipse)>(2020), <사냥꾼(Hunter)>(2020), 그리고 챕터투 맞은편의 예술 서점 스프링플레어에 전시된 <반영(Reflection)>(2020)을 통해 참여하고 있다. 정희승의 사진은 재현 매체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이미지로서 서정시와 같은 심상으로, 대상의 이면을 미학적으로 탐구한다.

 

정희승, 반영(Reflection), 2020, 스프링플레어 설치 전경, 사진: 오정은

 

전시 <명명되어서는 안되는(Better Not to be Named)>은 무료 관람으로 일요일은 휴관이며 2월 26일까지 열린다. 인근에 위치한 전시 공간 씨알콜렉티브에서는 고사리 작가의 개인전 <드는 봄(Spring has come)>이 열리고 있으니 연남동에 갈 계획이 있다면 관람 동선의 연결을 계획해 보아도 좋겠다.

 

 

오정은 기자

자료 제공 챕터투

장소
챕터투
주소
서울 마포구 동교로27길 54
일자
2022.01.20 - 2022.02.26
헤이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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