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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6

이진경의 <먼 먼 산>은 어디인가?

제5회 고암 미술상 수상 작가전
홍성군 이응노의 집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이하 '이응노의 집')에서 2021년 마지막 전시로 제5회 고암미술상 수상 작가, 이진경의 <먼 먼 산—헤치고 흐르고>가 열린다. 고암 미술상의 부상으로 주어지는 이번 이진경 전시는 2011년 개관한 이응노의 집 개관 10주년과 맞물려 더욱 뜻깊게 주비되었다.
전시 포스터

 

고암 이응노를 고향 홍성으로 다시 모시기 위한 130여 점의 신작

이진경은 자신의 작업 세계를 확장해 고암 이응노의 넋을 위로하는 자리가 되도록 의도하고, 이응노의 집 전시공간에 맞춰 신작 위주로 준비했다. 기존의 수상 작가전과 크게 다른 지점이다. 수상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 작가는 이응노와 그의 삶에 드리운 한국 근현대사의 흔적, 그리고 그의 고향인 홍성을 이루는 지리 인문 요소들을 작가 특유의 방법론으로 연구하고 수집하기 시작했다. 충청도 땅에서 사람과 부딪치고 땅을 밟으며 만나고 익힌 물산과 민속들을 엮어 재해석한 결과물을 선보인다. 무려 600점을 헤아리는 전시작 중 절반 이상인 300여 점이 지난 1년간의 신작으로 구성된다.

 

전시 제목은 <먼 먼 산—헤치고 흐르고>이다. 여기서 ‘먼 먼 산’은 근대 시인 김소월의 ‘합장’에서 모셔온 구절이다. 산은 우리 나라 땅 그 자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섬은 바다 밑 땅에 솟은 산의 봉우리다. 산은 단단한 바위를 품고, 그 바위 밑에는 뜨거운 불꽃이 있다. 백두산과 한라산은 그 불꽃의 흔적이다. 어린 이응노를 위로해 준 배움터, 늙은 이응노가 프랑스에서 가장 그리워한 기억은 고향의 용봉산과 월산이었다.

 

이진경, 눈감고 간다

 

우리는 문득 그리운 마음이 들 때 먼 산을 보고, 그 마음이 치솟아 어쩌지 못할 때 산에 오른다. 작가가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산-아리랑 고개를 넘는 일이었다. 산을 짓는 일이었다고 해도 좋다. ‘먼 먼 산’은 가려고 해도 갈 수 없는 북녘의 산, 백두산과 금강산이며 죽은 자들이 간 곳이다. 이응노에게 대나무와 사람과 문자가 하나로 얽히듯, 이진경에게 산과 싹과 불과 획은 하나로 솟는다.

 

“김소월의 시 중에 840편이 일본 총독부에 의해 불태워졌고 200여 편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너무 쉽기 때문에 노래로 만들기도 좋아 여러 곡의 노래가 김소월의 시로 만들어졌습니다. 쉬운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제 그림도 쉬워요.” _이진경

 

글씨와 그림은 하나의 붓이다

이진경은 한국의 일상 곳곳에서 익숙하게 접하는 ‘이진경체’로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미술가다. 작가는 과거에 흔히 볼 수 있었던, 페인트붓으로 쓴 간판에서 영감을 얻은 서체를 화폭 속으로 끌어와 회화-서예의 영역을 아우르고 이런 작품들을 여러 점 병치해 회화-설치 작업을 진행한다. 전시장과 일상 공간을 구분짓지 않고 넘나드는 작가의 이러한 활동은 주류 미술의 권위에 좀처럼 포섭되지 않고 단단하고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해 왔다.

 

간판이 그렇듯 호소성 짙은 글씨는 표어나 구호문이 되기도 하고 명패가 되기도 한다. 이름 불리지 않던 주체들, 우리말의 다양한 발음과 낱말과 음보들을 작가는 작업 속에서 또박또박 불러 준다. 글씨로 가득한 그의 화폭은 그 자체로 조형적이고, 감상자로 하여금 각자의 고향을 떠올리게도 하고, 각자의 기억과 감각을 되살려낸다.

 

이진경, 싱싱하게 살아 있으라
이진경, 달, 2021
이진경, 소로리볍씨
이진경, 목숨 수, 2021

 

한글이라는 기호로 대체된 형상이 이진경 작업의 한 축이라면, 전통 서화와 민화의 태도를 계승한 필획은 작가의 또 다른 세계다. 대나무와 서예의 경계를 넘어섰던 고암 이응노의 태도, 이 땅 곳곳을 유랑하며 사람과 풍경을 사생해 문자 추상과 군상에 가 닿은 이응노의 세계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생명력을 품어 키우는 이진경의 작업 세계

이진경의 작업은 비단 미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환경, 생태, 지역, 역사 등 삶을 둘러싼 다양한 가치를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로 담아내 왔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상처 받은 동물, 토종 식물, 씨앗, 사람, 태도, 노래, 민요는 모두 이진경이 작가로서 품어 치유해 온 것들이다. 작가는 그것들을 치유하지만, 그 작품을 통해 감상자는 약해서 잊혀진 듯했던 이 땅의 이름과 가락들을 만나 치유받고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특히 이진경은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의 고지도를 연구하고 재해석하며 한반도 물산 지도를 다시 그려 왔다. 한반도 각 지역의 기후, 풍토, 물산, 전설, 공예, 장소, 민속, 문화 등을 깊이 익히고 사람들을 만나 자료를 얻어 전통에 기반한 새로운 조형을 창출하고자 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고지도들은 이 연작의 일부로 전시로서는 처음 소개된다.

 

제5회 고암 미술상 수상 작가전 전경

 

확장된 전시로 고암의 넋을 부르는 전시 공간

이번 개인전은 전시장뿐만이 아니라 전시장 밖 외부로까지 공간을 펼친다. 외부에 설치된 부표 작업은 이응노와 이진경을 연결해 주는 증표이다. 이응노는 생전에 고국에서 철저히 상처받고 배제되었다. 타향에서 타계하여 아직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며 홍성 이응노의 집은 그 뜻을 기려 세워졌다. 이 의의에 비추어 이진경은 이응노 화백의 넋을 위로하는 <천도재>, <설위설경>을 준비했다.

설위설경(設位設經)은 홍성과 태안 일대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 온 민속 유산이다. 강노심 법사는 설경(說經) 앉은굿으로 평생 잡귀를 물리치고 죽은 이를 달래어 왔다. 이진경 작가는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홍성에 내려와 설위설경의 진법을 배웠고 전시의 일부로서 강노심 법사와 함께 천도재를 지낸다. 이는 이응노의 천도이기도 하지만 동학-독립운동-분단-동백림 사건-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이응노가 그렸던 군상 속 수많은 이들의 천도이기도 하다. ‘절두’, ‘불꽃’ 등 새로 선보이는 연작들은 강렬한 필치로 이 주제에 관해 한국인들의 마음 바닥에 깔려 있던 지점을 건드린다.
 
야외 외벽(북카페) 한쪽은 작가가 직접 쓰고 제작한 간판 작업을 설치하고, 실내는 이응노의 집 전시홀 전체에 설위설경을 설치해 한을 품고 죽은 이들을 부르는 초혼의 무대로 구성된다. 이번 전시는 개관 10주년을 맞이하는 이응노의 집 건축의 기획 의도를 샅샅이 살려 낸 전시다. 이진경의 1990년대 작업부터 신작까지를 통틀어 다시 살피고 새로운 주제로 구성해 낸 이번 전시에서 지난 30여 년간 작가가 다양하게 확장해 온 드넓은 우주를, 그리고 그것이 하나로 이어지고 서로를 비추는 만다라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응노의 집을 설계한 건축가 조성룡, 설위설경 강노심 법사, 역사 강사 배기성, 지화 장인 정용재 등은 이진경과 지난 2년간 깊은 대화와 교감 속에서 함께 전시를 준비해 왔다. 이 협업의 과정 또한 영상으로 전시된다.

제5회 고암 미술상 수상 작가전 <먼 먼 산—헤치고 흐르고>에서 이진경은 기존 성과의 정리를 넘어서서 새로운 지평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이 시대 예술과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상을 모색하는 험난한 시도이기도 했다. 한 작가의 개인전을 넘어서 고암 이응노와의 대화, 더 나아가 한국 근현대사의 예술을 통한 치유로 초대한다. 생명과 평화의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는 굿판이 2021년 신축년 겨울 홍성에서 펼쳐진다.

 

 

 

김만나

자료 협조 수류산방, 이응노의 집

장소
이응노의 집 (충남 홍성군 홍북읍 이응노로 61-7)
일자
2021.12.10 - 2022.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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