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2

한 점의 예술로 탄생한 전집 에디션

열린책들 x 도스토옙스키 200주년 기념판.
독창적이고 새로운 사물, 그에 더해 감동까지 주는 대상이 ‘책’이라면 그것이 예술품이고, 그것을 만든 발행인이 예술가 아닌가. 세계적인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출판사 열린책들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도스토옙스키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4대 장편 세트를 새로운 장정으로 출간하고 이를 소개하는 전시를 준비한 것. 한 명의 작가를 향한 지극하고 절절한 애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파주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전시 전경

 

도스토옙스키 전집이 한국에서 최초로 발행된 것은 2000년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식민지 시대부터 한국 문학가와 대중에게 알려졌고 작품 번역도 활발했으나 러시아어 원본에 기반해 전집을 발행한 것은 2000년이다. 당시 열린책들은 회사의 사운을 걸고 『도스또예프스끼 전집』(전 25권)을 기획, 제작, 출간했다.

사운을 걸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2000년 당시 전집을 낼 때 제작비만 5억 가량 들었다. 한 세기에 몇 권 나올까 싶은 대단한 작품이라 생각했고 사람들이 언젠가 알아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열린책들은 한 작가의 책을 전부 출판하는 ‘전작주의’로 유명한데, 그 시작이 도스토옙스키 전집이었다. 이후 도스토옙스키 전집은 단 한 권의 절판도 없이 20년간 총 550쇄에 걸쳐 출판되었다.

 

전시에서는 열린책들 세계문학 001번 의 초판본을 비롯해 레드판, 보급판, 세계 문학판 등 다양한 버전의 책을 만날 수 있다.

 

열린책들 x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2021년 11월 11일은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이었다. 이를 기념해 열린책들은 1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제작한 기념판을 내놓았다. 총 8권으로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각 2권)을 수록했고, 주목받는 신예 화가 김윤섭이 표지 작업에 참여했다.

 

제목과 출판사 로고가 없는 표지.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신판은 내용 축약이 전혀 없다. 등장인물 소개와 해설 논문, 작품 줄거리, 도스토옙스키 연보 역시 생략 없이 수록했다. 『악령』과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현재 유통되는 버전과 달리 3권이 아닌 2권으로 분권해 제작했다. 카라마조프 하권의 경우, 한 권에 900페이지가 넘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 않았다. 막대한 비용이 들고 제작이 까다로워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는 천 장정을 사용한 것도 눈에 띈다. 그야말로 20년간 도스토옙스키를 읽어온 애독자, 도서 애호가에게 전하는 특별한 선물인 셈이다.

 

 

 

Interview with 김윤섭

 

전시장에서 만난 김윤섭 작가. 사진제공: 열린책들

 

열린책들이 이전에 냈던 도스토옙스키 전집 표지화를 장식한 작가는 무려 뭉크! 더군요. 부담이 컸을 거 같아요.

안 그래도 제게 200주년 기념 표지화를 맡기셨을 때 그랬어요. ‘뭉크 표지화 이렇게 좋은데, 왜 저를…’ (웃음)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이고, 독일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정작 그는 노르웨이 사람이었고요. 그림을 업으로 삼은 화가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 역시 뭉크 그림을 정말 좋아해요. 하지만 작업을 하기로 결정한 후부터는 뭉크를 떠올리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세계 거장의 작품을 현대의 시선으로 담아낼 수 있을지에 집중했어요.

 

한 명의 작가가 그렸지만 각 작품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느낌이에요.

어떤 작품은 수많은 군상이 등장하고, 어떤 작품은 주인공의 독백이 중심이 되잖아요. 네 편의 장편 소설을 각각 대표할 수 있는 무드랄까, 느낌을 찾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던 거 같아요. 『죄와 벌』 표지화에서는 낮과 밤의 이미지를 활용하고 만화 프레임을 적용했어요. 만화는 단순히 여러 프레임의 회화를 겹친 것이 아니라 칸들이 이어져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해온 장르에요. 이를 두 편의 유화로 보여주고 싶었고, 『백치』에서는 인물의 표정과 내면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어요.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인형극을 염두에 두고 당시 도스토옙스키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상하며 군상들을 그려 나갔어요.

 

악령(위), 죄와 벌(아래) 표지화. 그림마다 모두 도스토옙스키가 등장하는데, 때로는 주인공 뒤편에 벽에 걸린 그림으로, 때로는 자신이 창조한 소우주를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도스토옙스키의 네 편의 장편 소설을 묘사하는 동시에 김윤섭의 주제인 작가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를 확장하는 작업으로 지금까지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초상화나 작품 삽화들과는 구별되는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

 

애니메이션 전공하고 설치 작업을 하다 2016년부터 평면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만화애니메이션 학과를 졸업하고 초기에는 페이퍼 애니메이션을 진행했고 이후에는 SNS 상의 게시물을 소재로 설치나 평면회화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했어요. 미술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그곳에서 작업하며 전시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의 작업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되었어요. 현대미술에서 점차 조형성이 잊혀진다는 느낌이 들었고, 다시 돌아가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실하게 하루하루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백치(위),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아래) 표지화.

 

이번 책은 표지에 제목을 넣지 않았어요. 그림에 대한 존중이라고 봐도 될까요.

이번에 협업한 표지화 원화는 전시와 함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이 모두 컬렉션 했어요. 원화를 소장할 수는 없는 대신 책을 구입하면 판화를 구입하는 것처럼 느껴질 거예요. 표지에 제목과 출판사 로고가 없거든요. 리커버 시리즈에서 제목을 빼는 경우는 간혹 있지만 이렇게 작업한 건 전례 없는 일이라 들었어요.

 

열린책들은 『프로이트 전집』(2003, 고낙범), 『카잔차키스 전집』(2008, 이혜승) 등 이전에도 화가와 표지 작업을 협업하며 출판계와 미술계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어요. 함께 일한 소감이 어떠신가요.

이러한 출판사는 작가들에게 정말 감사한 존재예요. 새로운 기회 앞에서 작가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작업을 발판 삼아 또 다른 세계가 이어지고요. 그래픽 디자인이 아닌 표지화 작업이 세련되게 나올 수 있을까 좀 걱정했지만 결과물을 보니 만족스러워요.

 

김윤섭 (Kim Yunseob)
김윤섭은 1983년생으로 국립공주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 학과를 졸업하였다. 2009년 부산 다대포 예술공장에서 <마계,근방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10년 퍼블릭에어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 <무의미를 목표로 한 접속>, 2016년 설미재미술관, 갤러리조선 <순례자-순교자, 이 세상은 너무 오래돼서 새로운 게 없어요>, 2020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마계인魔界人> 등 14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2016년 이후에는 평면회화 위주로 작업하며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문학의 형식을 회화로 구현해 내고 있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2020년 기획전 <Aritist Project4:혼재>전에서 반 고흐, 자코메티, 베이컨과 같은 대가들을 자신의 화면 속으로 데려와 그들을 순교자에 비유하며 일종의 정신적 오마주와 같은 형태로 나타낸 바 있다. 2021년에는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열린책들>이 출간하는 도스토옙스키 4대 명작의 리커버북 표지 디자인 10점을 제작하였다.

 

 

 김만나

자료 협조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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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의 예술로 탄생한 전집 에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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