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그림 작가를 떠올리면 유연하게 휘어진 곡선과 물감을 갓 짜낸 듯 생생한 컬러가 먼저 떠오른다. 이러한 조형 언어는 그의 대표작 〈모노 시리즈(Mono Series)〉에서 출발한다. 단일(單一)을 뜻하는 제목처럼, 끊어지지 않는 하나의 선이 공간 안에서 구조를 이루며 조각으로 확장되는 작업이다. 때로는 의자나 테이블처럼 기능을 갖춘 오브제로, 때로는 공간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조각이 되며 기능과 조형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든다.
이번 전시는 ‘모노 시리즈’와 더불어 신작 ‘Les Feuilles Series(잎 시리즈)’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새롭게 공개되는 작품은 총 7점. 평소 그의 작업을 눈여겨봤던 이라면, 이번 연작에서 이전과는 다른 결을 감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 신작은 어떤 점에서 새로울까.
자연의 기척을 닮은 형상
이번 신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변화는 형태의 출발점에 있다. 〈Les Feuilles Series〉는 자연에서 발견한 형상을 조형의 출발선으로 삼는다. 잎의 윤곽과 줄기의 흐름을 떠올리게 하는 식물 구조가 작품 전반에 스며 있다.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선과 구조를 겹겹이 쌓아 올리며 이전과는 다른 조형의 밀도를 만들어낸다.
시리즈 제목인 ‘Les Feuilles’는 프랑스어로 ‘잎’을 뜻한다. 이름 그대로 이번 작업에서는 성장과 확장, 반복이라는 자연의 질서가 주요한 모티프로 작동한다. 하나의 선으로 구조를 세우던 이전 작업과 달리, 이번에는 여러 선과 면이 중첩되며 보다 입체적인 덩어리를 이룬다. 금속이나 PLA처럼 단단한 재료를 사용했음에도, 작품의 형태는 식물이 자라듯 유기적인 움직임을 품고 있다.
자연은 정그림의 작업 세계를 오래도록 관통해 온 단서이기도 하다. 그는 형태를 구상할 때 식물의 성장 방식이나 동물의 패턴처럼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구조를 자주 참고해 왔다. 재료를 구부리고 비틀며 형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도, 인위적인 과장보다는 자연스럽고 균형 잡힌 곡선을 찾는 데 집중한다. 실제로는 창밖의 풍경이나 주변 환경에서 받은 인상이 작품의 형태를 결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자연을 관찰하며 길어 올린 선과 리듬이 그의 조형 언어를 이루는 기반인 셈이다.
이번 신작 역시 이러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잎과 줄기에서 비롯된 형상이 작품의 구조로 이어지고, 이전 작업에서 축적해 온 선의 언어는 여기서 한층 복합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자연을 닮은 형상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안정감은 학습된 감정보다 본능에 가깝다. 그것은 특정한 이미지를 인식해서라기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감각에 가깝다고 느낀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의 흐름과 닮은 형태와 리듬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긴장을 내려놓고 균형을 회복한다. 비록 도시에 살며 자연과 분리된 존재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연과 함께할 때 가장 건강하고 충만한 상태에 가까워진다. 이번 전시의 작업들은 바로 이러한 감각을 더듬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 정그림 아티스트 노트 발췌
공간을 채우는 감각들
이번 전시는 시각적 감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공간을 채우는 은은한 아로마와 금속의 울림이 더해진다. 햇빛을 머금은 과일 껍질을 문질렀을 때 번지는 시트러스 향과 흙 내음을 머금은 나무 향이 겹치며 전시장 전체에 따뜻한 기운을 만든다.
작품은 주변 환경과 관계를 맺으며 미세하게 움직인다. 전시장 문이 열릴 때마다 스며드는 바람에 금속으로 만든 잎이 서로 부딪히며 가볍게 울리고, 창밖의 소나무 풍경과 자연광은 작품의 표면에 비치며 공간 안팎의 풍경을 포개 놓는다. 이 전시는 조각을 하나의 물체로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 속에서 형성되는 감각의 장으로 확장된다. 향과 빛, 바람과 소리가 작품과 함께 작동하면서 관람객은 전시를 눈으로만이 아니라 몸의 감각으로 천천히 통과하게 된다.
작가는 이번 작업을 마치 명상하듯, 고른 호흡 속에서 천천히 완성해갔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이 전시는 관람객에게도 잠시 멈춰 서는 시간을 건넨다. 작품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향을 맡고, 바람에 흔들리는 금속 잎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호흡의 속도도 한결 느려진다. 자연의 질서를 떠올리게 하는 선과 형태 앞에서, 잠시 일상의 박자를 내려놓고 대지의 시간에 몸을 맡겨보는 것도 좋겠다.
글·사진 김기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