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는 서울역이 개장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무대였던 서울역사를 복원해 시민들의 복합문화공간으로 개관한 문화역서울284에서 올해 첫 기획 전시가 열렸다. 우리나라 지역 곳곳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공예를 여행에 빗대어 풀어낸 〈공예행: 골골샅샅 면면촌촌(Craft Journey, all over the place, everywhere)〉 전시이다.

공예행은 기차의 목적지를 ‘-행’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공예를 매개로, 혹은 공예를 목적지로 떠나는 여행을 말한다. 전시의 부제인 ‘골골샅샅 면면촌촌’은 ‘방방곡곡’의 순우리말과 유사어로 나라의 구석구석 모든 곳을 이른다. 단어를 반복적으로 배치해 기차의 모양을 형상화했다. 이번 전시에서 말하는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닌, 일상에서 다양한 공예의 변주를 발견하고, 다시 공예의 본질로 돌아오는 회귀의 여정이다. 관객들은 지역성을 살린 각각의 공간을 지나 장터를 종점으로 다시 여행의 출발지로 돌아오게 된다. 공예행의 경로가 될 일곱 개의 공간을 하나씩 살펴봤다.
푸른 여명과 하얀 대지

동이 트는 푸른 하늘과 하얀 대지를 쪽빛 원단과 도자로 표현한 중앙홀은 이번 전시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쪽물을 들인 원단 〈여백의 쪽빛〉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인 정관채의 작품이다. 그의 고향인 전남 나주시 샛골 인근은 홍수가 잦아 벼보다 미나리과인 쪽이 잘 자랐고, 쪽물을 들인 무명천은 자연스레 지역 특산품이 되었다. 화학 염료에 밀려 국내에서 쪽이 완전히 사라졌던 7, 80년대에 쪽씨 하나로 쪽 염색을 복원한 것도 그다. 신비롭고 고귀한 자연의 빛깔을 눈에 담으며 공예행을 시작하자.
서편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반도의 서해안과 전라도 지역은 온난하고 습한 기후 때문에 왕골, 대나무, 닥나무 등 섬유질이 많은 식물이 잘 자랐다. 오래전부터 이를 이용한 바구니, 합, 방석, 발 등 직조 공예가 발달했고, 생활에도 밀접하게 자리했다. 선선한 바람이 대나무 사이를 지나가며 엮이는 모습을 상상한 두 번째 전시 공간에서는 다양한 연령층의 작가들이 전통 기술과 현대적 감각을 융합해서 만든 멋스러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움을 담은 제주의 윤슬

신촌리는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길에 처음 마주하는 바닷가 마을로 해녀의 주 활동 지역이기도 하다. 제주에서 태어난 고용석은 바다에서 물질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며, 푸른빛의 윤슬과 바다의 너울을 백자 여러 점을 배치해 표현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고향의 맑은 바닷빛을 담기 위해 조선백자에 투명한 유약을 미세한 톤으로 씌워 차이를 뒀다. 여러 점을 이렇게 모아 바다처럼 표현해 전시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작품과 눈높이를 맞춰 바닷물결을 바라보며 그리운 사람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다.
강처럼 흐르는 소반의 물결

역사와 전통, 교육의 도시 진주는 예부터 양반들이 모여 살던 지역 중 하나다. 좋은 나무들이 넉넉히 자라던 진주는 목가구와 명주천(실크)을 찾는 양반들이 많았고, 일찍부터 관련 공예가 발달했다. 진주의 남강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겼던 진주의 옛 선인들을 그리며 작품들이 강처럼 흐르듯 소반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양반의 갓끈을 표현한 이정훈의 〈양반-테이블[갓]〉, 국가무형문화재 소목장 이수자이자 26년 차 여성 목수인 유진경의 작품 등을 볼 수 있다.
팔영산의 달빛과 사임당의 색실

대통령과 영부인이 기차를 타기 전에 대기하던 공간이었던 귀빈실은 서울역 내에서도 눈에 띄게 아름다운 곳이다. 이 공간에는 어떤 격조 있는 작품이 어울릴지 고민하다 조선의 미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달항아리와 분청사기를 배치했다. 덤벙 기법의 분청사기를 꽃 피웠던 전라남도 고흥은 수많은 도공이 산 따라 물 따라 머무르며 예술의 정수를 보여준 지역이다. 전통 기법을 그대로 살린 작품부터 현대 예술을 달항아리에 녹인 강준영의 작품까지 공간을 지키고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상영이 만든 색색의 자수들이 실에 연결되어 너울거린다. 강원도 강릉은 전통 자수 기법을 이어가는 지역으로, 추상적이고 화려한 문양의 패턴과 형식의 변주를 특징으로 한다. 자연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그림과 자수로 표현했던 신사임당의 정신을 배경으로 고전적이지만 세련된 스타일의 자수를 입체적인 형태로 전시했다.
투박한 음식, 귀한 식사

수저가 그려진 옹기 작품들이 눈에 띄는 마지막 공간은 한라산의 신성한 기운을 품고 있는 제주의 부엌 풍경을 상징적으로 연출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달리 땅이 척박했던 제주는 음식의 형태가 소박하고 단출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만큼은 어느 지역보다도 귀했다. 제주에서 전통적으로 생산하던 옹기는 화산토를 재료로 유약을 칠하지 않은 것이 많다. 고온으로 가마에 구워낸 제주 옹기는 표면이 단단해 쉽게 깨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20년 넘게 제주에서 좋은 흙을 찾아다니며 옹기를 만들고 있는 도예가 부부 강승철, 정미선의 작품과 곡식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양웅걸의 〈발궤〉, 박소연의 커트러리 등이 있다.
여행의 여운을 남길 생활 공예품

관람을 마친 후에는 샅샅장터로 가보자. 서울, 전주, 아산, 담양, 제주 등 전국 각 지역의 전통공예와 독특한 기법을 활용한 제품들을 판매한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것을 만나듯 전통이라는 씨앗에서 발아한 현대 공예품을 만날 수 있다. 전주 한지를 이용한 편지지, 전통 방식으로 엮은 정겨운 모양의 빗자루 등 생활의 한편을 차지할 공예품으로 이번 공예행의 여운을 남겨보는 건 어떨까.
글·사진 김기수 기자